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
(Yanghwajin Foreign Missionary Cemetery)
요즘은 우리나라에 와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이라고해야 간혹 길거리에서 볼수 있는 젊은 몰몬교 선교사들이 거의 전부이지만 일찍이 개화기의 구한말, 그리고 일제 강점 시기에는 이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외국 선교사들이 자원하여 극동의 은둔국인 한국(조선)을 찾아 왔다. 주로 미국 선교사들이 많았다. 이들은 병원을 세워 병든자들을 고쳐주었고 우물안 개구리들인 우리 민족을 위해 학교를 세워 새로운 지식을 심어 넣어 주었다. 이들은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되자 조선의 독립을 위해, 나아가 우리 민족의 자존을 위해 헌신하였다. 서울의 한강변, 마포 합정동에는 이렇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대신 지다가 이국 땅인 한국에서 세상을 떠난 선교사들의 묘역이 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이다. 그중에는 순교한 분도 계시고 진정으로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을 위해 목숨을 던진 분들도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그분들이 뿌린 씨앗이 자라 큰 열매를 맺게되어 세계 방방곡곡에 한국인 선교사들을 보내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고 있다. 간혹 가지 말라는 곳에 일부러 가서 선교하다가 낭패를 본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안내 표지판
마포 합정동의 한강변에 외국인선교사 묘원이 있고 그 옆으로는 절두산 천주교순교성지가 있다. 강변도로를 지나가면서 항상 ‘한번 들어가 봐야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마침 어느날 강화에 갔다 오는 길에 마음먹고 들렸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는 평소 존경하는 아펜젤라 목사님 가족의 묘지도 있어서 진작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다. 아펜젤라 목사님은 우리나라에 감리교회의 씨앗을 뿌리신 분이다. 아펜젤라 목사님은 결혼한지 두어달 후에 부인과 함께 한국선교를 자원하여 구한말인 1885년 4월 5일 일본으로부터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하시었다. 그는 인천 내리교회를 설립하는 일을 크게 후원하였으며 그해 6월 서울 정동에 배재학당을 설립하시었고 이어 10월에는 정동교회를 세우셨다. 아펜젤라 목사님은 성경의 한글번역 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시던중 1902년 6월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목포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여 순직하시었다. 이때 사실 아펜젤라 목사님은 살아날수도 있었으나 어떤 한국소녀를 구하시느라고 대신 익사하시었다. 숭고한 사랑의 실천이셨다. 그날이 1902년 6월 11일이었다. 양화진에는 아펜젤라 목사님의 이같은 희생을 기리기 위해 배재총동창회에서 세운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H.G. 아펜젤라(1858.2.6-1902.6.11)는 미국 북감리회 해외선교본부에서 한국에 최초로 파송된 선교사로 배재학당 설립자이시다. 선교활동 중 목포 앞 바다 전복된 배에서 한국 소녀를 구하려다가 당신이 익사하시었다.
아펜젤라 목사님 추모비
추모비의 다른 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아펜젤라목사님이 제물포에 첫 도착하시어 드린 기도문이다. 기념비를 지탱하고 있는 다리에 배재 뱃지가 각인되어 있음은 인상적이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상륙하신 첫 기도.
아펜젤라 목사님 추모비의 기도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외국인 선교사와 가족 143명이 다른 이들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선교사들은 모국에서의 평온한 앞날을 뒤로하고 당시 세상의 변방이던 쇄국의 코리아에 복음의 빛을 나누기 위해 오시었다. 선교사들은 병원과 학교의 설립등 사회제도뿐만 아니라 신분제 및 남존여비 관습의 철폐와 같은 정신세계로에서도 우리 민족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더욱이 이들중 일부는 일제의 한반도 무단 강점을 우리 민족과 함께 아파하였고 우리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많은 위험을 감수하였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사회 전반을 살펴보면 이들을 통해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맺은 열매들을 쉽게 확인할수 있다.
한국교회는 1985년 한국기독교1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 사업회를 구성하였고 양화진에 깃든 참된 정신을 계승하고 보존하기 위해 ‘100주년기념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묘역을 재정비하고 또한 양화진 홀을 개관하여 이곳에 묻힌 선교사들을 기리고 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양화진에 설립된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가 관리하고 있다. 묘원에는 배재학당과 정동교회를 설립한 헨리 아펜젤라 목사님을 비롯하여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베델, 백정선교의 주역인 무어, 고아들을 위해 헌신한 위더슨, 한국성서 번역의 주역인 레이놀즈, 원산회개운동을 시작한 하디, 고종황제의 외교 밀사였던 헐버트, 배화학당을 설립한 켐벨, YMCA운동의 선구자인 브로크만, 이화여전 초대교장인 아펜젤러,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턴, 평양선교의 개척자인 W.J. 홀, 남편과 딸을 잃으면서도 43년간 의료선교에 헌신한 R.S. 홀 부인, 결핵퇴치에 공헌하고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발간한 R.S. 홀, 일본인으로서는 유일한 소다 가이치, 제중원에서 의료선교에 앞장선 헤론, 한국학의 선구자인 게일, 숭실학당을 설립한 베어드, 새문안교회와 조선기독교대학을 설립한 H.G. 언더우드,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H.H. 언더우드,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한 에비슨 목사님 등이 안장되어 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 묘원
양화진홀은 작은 전시공간이지만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선교사들의 삶을 기리고 그들의 활동을 재조명하고 있다. 당시 선교사들은 어떤 분들이었으며 왜 조선을 찾아왔는지, 하나님께서 이들을 조선으로 이끌기 위해 어떻게 섭리하셨는지, 이들이 조선에 와서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 그리고 양화진의 모습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천했는지를 주제로 삼고 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방문할수 있다. 교통편은 지하철 2호선과 6호선 합정역에서 내려 7번 출구로 나와 조금 걸어가면 된다. 무릇 기독교인들이라면 한번쯤은 방문하여 이들의 숭고한 헌신에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할것이다. 주중에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방문할수 있다. 안내 설명도 가능하다. 주일에는 일반인의 참배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교회
양화진 홀
양화진 홀의 비디오 전시 장면
한국을 지극히 사랑하신 사워 목사님은 귀국하시어 오하이오주에서 돌아가셨지만 한국을 위해 기여하신 공로로 양화진에 기념비를 세웠다. 부인과 아드님도 한국을 위해 봉사하시다가 미국에 가시어 작고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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