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궁 일화/창덕궁과 비원

월대(月臺) 이야기

정준극 2009. 3. 23. 11:39

 

월대(月臺) 이야기


돈화문 앞에는 상당히 넓은 월대(月臺)가 있다. 궁궐 정문이 위엄을 나타내주는 월대이다. 그런 월대인데 일제 시대에 월대를 없애고 평평한 아스팔트 길로 만들었다. 총독부 고관들까지도 자동차를 타고 창덕궁을 드나들다 보니까 월대가 거추장스러워서 월대를 없애고 아예 아스팔트로 덮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옛 월대를 되살려 놓았다. 월대라는 말이 자주 나오기 때문에 기왕에 설명을 붙이자면, 월대는 월견대(月見臺), 즉 글자그대로 달을 바라보기 위해 올라서는 축대를 말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궁궐에서 각종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는 장소를 말한다. 궁궐에서 하례, 또는 가례와 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때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사람들이 올라서는 장소이다. 궁궐의 정전에는 대체로 월대가 2단으로 되어 있다. 한층 멋을 부리기 위해서이다. 월대는 반드시 정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곳이든 궁궐의 중요 행사가 거행되는 축대이면 월대이다. 그러므로 인정문 아래도 월대가 될수 있다. 정전에서만 달을 볼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인정전 월대와 월대 위에 놓인 드므. 드므는 화마를 추방하기 위한 상징적인 물건. 


대궐에서 임금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가려면 세 개의 문을 지나야 한다. 창덕궁의 경우에는 돈화문을 거쳐 진선문(進善門)과 인정문(仁政門)을 거쳐야 한다. 만일 왕이 살아 있으면서 왕세자에게 양위하면 대단히 축하해야할 일이라고 하여 인정전의 월대에서 즉위식을 가진다. 길례(吉禮)이다. 그러나 부왕이 승하하였는데 왕세자가 즉위하려면 인정전의 월대에 까지 오르지 못하고 그 아래에 있는 인정문의 월대에서 즉위식을 가진다. 흉례(凶禮)이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즉 국상이 선포되면 5일장도 아닌 무려 5개월장을 지냈다. 왕의 빈청은 인정전에 마련된다. 선왕의 빈청이 마련되어 있는 인정전에서 즉위식을 갖는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그래서 인정전의 아래에 있는 인정문의 월대에서 즉위식을 갖는다. 즉위식이 거행되면 인정문 앞의 마당에 만조백관이 늘어서고 악공들도 별별 악기를 모두 들고 나와 좌정한다. 하지만 아직 상중이므로 깽깽거리는 음악연주는 없다. 악공들은 연주도 하지 않으면서 생색만 내고 앉아 있었다. 세상에 그런 편한 직업이 어디 있겠는가? 왕세자로서는(왕세자비 포함) 일생일대의 즉위식을 거행하는데 기왕에 풍악도 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그럼 선왕의 빈청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다른 장소나 다른 전각에서 즉위식을 가지면 될것 아닌가라고 생각할수 있다. 그건 안된다. 즉위식은 반드시 선왕의 돌아가신 궁궐에서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별별 규정이 다 있었다.


조정(朝廷)에 늘어선 품계석에 대하여는 잘 아는 내용이므로 역시 설명생략! 다만, 과거에 장원급제하면 종3품의 자리에 설수 있으며 일반급제하면 종9품의 자리에 설수 있다. 과거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창덕궁에서는 과거가 자주 치루어졌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후원의 춘당대라는 곳에서 주로 문과에 해당하는 과거시험을 보았다. 전국의 유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는데 많을 때에는 응시자가 1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백수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였다. 잡 셰어링은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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