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궁 일화/창경궁의 영욕

사도세자의 한이 맺힌 문정전

정준극 2009. 3. 29. 23:13

사도세자의 한이 맺힌 문정전


사도세자에 대하여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恨中錄)은 중학교 국어교과서에도 나오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이산 정조는 당시 양주 매봉산, 지금의 청량리 지나서 서울시립대학교 자리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수원 남쪽 화성으로 옮겼으며 나중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합장하고 융릉이라고 불렀다. 정조대왕은 아버지의 묘소에서 가까운 수원에 행궁을 짓고 자주 능행을 했으며 나중에는 수원으로 아예 도읍을 옮길 생각까지 했다. 그런저런 얘기를 다 하자면 한도 끝도 없으므로 여기서 줄이고 다시 사도세자 얘기로 돌아가 보자.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는 영특했다. 어릴 때부터 노론(老論)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여 노론을 싫어했다. 영조가 아무리 탕평책을 써도 당파 싸움은 오늘날의 정당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문정당 앞 마당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다가 비참하게 숨을 거둔 현장이다.

 

영조는 나이가 들자 세자에게 직무대리를 시켰다. 대리청정이다. 위기감을 느낀 노론은 온갖 모략을 다해 사도세자를 모함했다. 심지어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李氏)까지도 세자에 대한 유비통신을 그대로 믿을 정도였다. 노론의 모략에 넘어간 영조는 급기야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세자가 억울하다고 호소하자 영조는 바로 이곳 문정당 앞뜰에 커다란 뒤주를 가져오라고 해서 그 속에 세자를 집어넣었다. 때는 오뉴월 삼복 더위였다. 뒤주에 갇힌 세자는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꼬박 8일 동안 신음하다가 끝내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자기 아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아버지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영조는 세자가 죽자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었던지 아들을 애도하여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격식에 맞추어 장례를 치르게 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이산)는 얼마나 가슴에 맺힌 한이 컸을까? 그리고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가슴은 또 얼마나 억장처럼 무너졌을까? 문정전 마당에 서면 문득 당시의 상황이 떠오를 것 같다.   

 

문정전의 내부 일월오악도와 용상. 천정의 단청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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