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궁 일화/창경궁의 영욕

장희빈의 저주가 서린 통명전

정준극 2009. 3. 29. 23:16

장희빈의 저주가 서린 통명전


일개 궁녀였던 장옥정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 왕자를 출산하여 희빈의 자리에 오른다. 장희빈이 낳은 아들이 나중에 경종이 된 사람이다.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킨다. 이같은 참담한 일은 실은 서인과 남인간의 당파싸움의 결과이기도 했다. 숙종은 서인들을 내치는 과정에서 인현왕후까지 폐위시켰던 것이다. 이에 서인들은 합심하여 남인들을 제거한다. 남인들을 등에 업었던 장희빈은 왕비까지 되었으나 서인들의 책략으로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다.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바늘을 꽂은 인현왕후 모습의 꼭두각시와 동물의 시체를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通明殿) 주위에 묻는다. 결국 장희빈의 간악한 행동이 발각되어 장희빈은 궁궐 밖으로 내쳐지고 끝내 사약을 받는다. 장희빈의 나이 43세였다. 연산군의 어머니는 윤기묘(尹起畝)의 딸 폐비 윤씨이다. 월탄 박종화 선생의 장편 ‘금삼(錦衫)의 피’는 장희빈에 얽힌 얘기이다.

 

     

인현왕후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장희빈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이었다.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통명전에는 용마루가 없다.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과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 용마루가 없는 이치와 같다. 왕이 왕비와 함께 침수에 드는 곳인데 지붕 위에 또 다른 용이 있으면 방안에 있는 왕을 짓누르는 것과 같으므로 용마루를 없앴다는 얘기다. 통명전은 주로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했지만 종종 빈전(殯殿)으로도 사용했다. 중종비와 명종비의 빈전으로 사용한 것은 대표적이다. 경종은 통명전을 편전으로 사용했다. 통명전 옆에 있는 양화당(養和堂)은 주로 내전을 방문하는 손님들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지금의 통명정과 양화당은 오리지널이 아니라 1834년 순조 때에 재건한 것이다. 


 통명전에는 용마루가 없다.

 통명전의 앞마당에는 박석을 깔았다.

 통명전은 월대위에 지었으며 월대 양쪽으로 드므를 두었다. 

 

드라마 속의 인현왕후(좌)와 장희빈(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