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그랜드 오페라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등장

정준극 2009. 3. 30. 23:23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효시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


표준형 그랜드 오페라는 1820년대에 파리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랜드 오페라는 프랑스의 전매특허였다. 오버(Auber)의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La muette de Portici)가 효시이다. 오버의 그랜드 스타일 오페라는 곧이어 인근의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로 전파되었다. 사람들은 그랜드 오페라가 아니면 진정한 오페라로 간주할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랜드 오페라에 박수를 보냈다. 그랜드 오페라 애호가들은 다른 시시한 오페라는 시간이 있으면 가서 보면 되고 안가도 그만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몇십년동안을 그런 상태로 지냈다. 그러다가 19세기말에는 그랜드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시들해졌다. 극장으로서는 우선 제작비가 너무 들어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두 번째 어려움은 대규모 출연자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그랜드 오페라는 정상급 성악가 10명 정도가 한꺼번에 출연해야 한다. 4-5막이나 되는 장시간 공연에 적합한 정상급 성악가를 10여명씩이나 구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로씨니의 '렝스로의 여행'이다. 그러는 와중에 사회가 변하였다. 19세기 말의 추세는 그저 울고 짜고 웃기는 오페라면 규모가 크던 작던 상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영웅담이나 복잡하기만 한 신화, 그리고 잘 먹고 잘살던 사람들의 역사 스토리에 대하여는 체할것 같았다. 사람들은 코믹하거나 로맨틱한 스토리를 더 선호하였다. 신들이나 왕족들의 얘기가 아닌 보통사람들의 얘기를 더 좋아했다. 그랜드 오페라가 설 무대는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의 한 장면. 오페라 코미크.

 

그러던중 세기말 파리에서는 ‘그랜드 오페라가 뭐 말라비틀어진 것이냐? 도무지 현대적 감각이란 것은 찾아 볼수 없는 허황된 것이 아니드냐?’면서 은근히 그랜드 오페라를 반대하고 공격하는 세력이 생겼다. 이른바 전위(아방 갸르드) 지식인들이 그렇게 주장했다. 예를 들면 드비시였다. 드비시는 그랜드 오페라를 보고 알맹이 없이 방대하기만 한데 대하여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런데 참으로 신통하게도 그랜드 오페라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러 작곡가들이 계속 그랜드 오페라를 고집하며 작품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속으로 ‘오페라라고 하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라면서 만족한 웃음을 띠며 그랜드 오페라를 생산하였다.


19세기 말의 파리는 과연 유럽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다. 예술가로 성공하려면 파리로 와야 했다. 내노라하는 예술가들이 파리행 기차표를 구입하였다. 특이 오페라 작곡가들이 파리로 몰려왔다. 파리의 오페라 스타일은 국제적이면서도 복합적인 것이 되었다. 그랜드 오페라의 스타일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중 몇 명의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들의 작품은 두드러졌다. 루이지 케루비니(Luigi Cherubini)는 오페라에 음악반주를 곁들인 레시타티브를 사용하는 것이 극적인 효과를 보다 높일수 있다고 하면서 과거 대사 스타일의 오페라를 우습게 생각했다. 갸스파레 스폰티니(Gaspare Spontini)는 나폴레옹을 찬양하는 작품을 썼다. 황제를 찬양하려면 스케일이 그랜드해야 했다. 파리의 갸르니에 오페라극장(일반적으로 파리 오페라극장)은 당초부터 프랑스 스타일의 오페라를 소화할수 있게 설계되었다. 프랑스 스타일의 오페라는 발레가 등장하는 것이며 무대장치가 기계적으로 정교한 것을 뜻한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발레가 등장하려면 무대가 넓어야 한다. 하늘을 날라 다니고 화산이 터지는 것과 같은 장면을 기계적으로 만들려면 무대가 넓어야 한다. 무대가 넓어야 한다는 것은 그랜드 오페라의 첫 조건이다.

 

 '트로이 사람들' 공연 스케치. 파리 오페라.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선구자들: 케루비니, 스폰티니, 로시니 

어? 이탈리아 작곡가들


세기말에 파리에 와서 활동했던 케루비니, 스폰티니, 그리고 특히 로시니의 몇몇 오페라는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선구자 겸 향도라고 할수 있다. 스폰티니의 La vestale(베스타 여사제: 1807), Fernand Cortez(페르난드 코르테즈: 1809), 케루비니의 Les Abencerages(1813), 로시니의 Le siege de Corinthe(고린도 공성: 1827), Moise(모세: 1828)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 오페라는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특성이라고 할수 있는 요소들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케루비니, 스폰티니, 로시니등이 파리에서 작곡한 그랜드 오페라들은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선구자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께름직하다. 이들이 모두 이탈리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작곡가들은 포도주 마시고 낮잠 자고 있었나? 그러한 때에 다니엘 오버(Daniel Auber)가 등장하였다. 오버의 La muette de Portici(포르티치의 벙어리 소녀: 1828)는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구성요소들을 모두 포함하는 기특한 것이었다. 이어 나온 로시니의 Guillaume Tell(귀욤 텔: 윌리엄 텔: 1829)은 비록 이탈리아인에 의한 작품이지만 진정한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였다. 윌리엄 텔은 로시니의 마지막 오페라였다.

 

로시니의 '귀욤 텔'(윌리엄 텔) 무대.


수퍼스타 마이에르베르

‘악마 로베르’로부터 시작


만인이 인정하는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수퍼스타는 쟈코모 마이에르베르(Giacomo Meyerbeer)였다. 마이에르베르는 Robert le diable(악마 로베르: 1831)로부터 시작하여 파리 오페라의 무대를 바꾸어 놓았다. 몇 년후 내놓은 Les Huguenots(위그노: 1836)는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걸작중의 걸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또하나 초기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자크 알레비(Jacques Halevy)의 La Juive(유태 여인: 1835)이다. 알레비의 유태 여인은 위그노보다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연되었으며 지금도 고품질 그랜드 오페라로서의 명예를 안고 있다.

 

 '악마 로베르'

 

1830년대의 초기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는 표를 구하지 못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의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는 훗날 바그너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바그너 초기의 오페라인 Rienzi(리엔치: 1842)는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영향을 한껏 받은 것이었다. 리엔치는 드레스덴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얼마가지 못하고 잠잠해졌다. 마이에르베르의 다른 그랜드 오페라가 독일을 휩쓸었기 때문이었다. 1840년대의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대표선수는 도니제티의 Les martyrs(순교자)와 Don Sebastien(돈 세바스티앙: 1843), 알레비의 La reine de Chypre(시프레의 여왕)와 Charles VI(샤를르 6세: 1843), 그리고 마이에르베르의 Le prophete(예언자: 1849)등이다.

 

베르디의 ‘시실리의 만종’

1850년대와 1860년대의 그랜드 오페라


1850년대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작품은 베르디의 Les vepres siciliennes(시실리의 만종: 1855)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에서 완성되어 프랑스에서 초연되었으나 나중에는 이탈리아에서 더 많은 갈채를 받았다. 스토리가 프랑스군에 대항하는 시실리 사람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프랑스 토박이 작곡가로서 샤를르 구노는 첫 그랜드 오페라인 Sapho(사포)를 내놓았지만 사람들이 ‘저것도 그랜드 오페라인가?’라고 수군거리는 바람에 명함도 별로 내놓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가이드처럼 여겨졌던 마이에르베르는 ‘그랜드도 좋지만 극장에서 잘 받아주지 않으니 어찌하랴? 극장이 좋아하는 것을 내놓을수 밖에!’라면서 은근히 코믹 오페라에 주력하였다. 알레비는 침체하였다. 알레비는 La Juive, La reine de Chypre, Charles VI가 연속 히트를 거둔 이후 거의 10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후속타 그랜드 오페라를 내놓지 못하였다.

 

'시실리의 저녁기도'

 

그럴때에 샤를르 구노의 Faust(파우스트: 1859)가 나왔다. 사람들은 ‘아이고, 그랜드 오페라를 더 못보고 죽는 줄 알았는데 드디어 토종 그랜드 오페라가 나왔구먼!’라면서 좋아했다. 그러나 구노도 먹고 살기에 바쁘다 보니 그랜드 오페라보다는 오페라 코믹에 신경을 쓰지 않을수 없었다. 구노는 '파우스트' 이후 1860년대 중반까지 이렇다 할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를 내놓지 못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이란 말인가? 거성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등장하였다. 베를리오즈의 Les Troyens(트로이 사람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일 것이다. 이 오페라의 스토리는 디도와 이니아스에 대한 간단한 러브 스토리이지만 그 규모에 있어서만은 종횡무진이었다.  Les Troyens은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1863년 3막과 4막만을 파리 테아터 리릭(Theatre-Lyrique)에서 초연하였으며 1막과 2막은 콘서트 형식으로 베를리오즈 사후 10년후인 1879년 파리 샤틀레극장(Theatre du Chatelet)에서 초연되었다.

 

파우스트의 한 장면


‘시바의 여왕’의 환생


1850년대는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침체시기였지만 1860년대에 들어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마치 잃어버렸던 세월을 되찾으려는 듯 1980년대의 프랑스는 그랜드 오페라에 오로지 매진하였다. 샤를르 구노의 La reine de Saba(시바의 여왕)는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르네상스를 알리는 등대였다. 오늘알 이 오페라는 별로 거의 공연되지 않고 있어서 ‘그런 오페라도 있었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 오페라에 나오는 테너 아리아 Inspirez-mio, race divine은 위대한 카루소가 음반으로 취입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즈음에 위대한 작곡가 마이에르베르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마이에르베르의 마지막 그랜드 오페라인 L'Africaine(아프리카 여인)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1년후인 1865년 초연되었다. 사람들은 마이에르베르의 죽음으로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명맥이 끊어질것 같아 노심초사하며 걱정하였다. 그런데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라고 해서 반드시 프랑스 사람만이 작곡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일찍이 케루비니, 스폰티니, 도니제티, 로시니 등은 이탈리아 사람들이었지만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프랑스 그랜도 오페라를 내놓았던 것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시바의 여왕'. 현대적 연출


그 즈음에 이탈리아의 위대한 베르디 선생이 파리로 와서 생활하게 되었다. 베르디는 Don Carlos(돈 카를로: 1867)를 파리 이주 기념으로 내놓았다. 웅장한 스케일의 그랜드 오페라였다. 발레는 없지만 대신 종교재판관에 의해 화형당하는 장면은 고품질, 고품격의 스펙터클한 것이었다. 이듬해에는 암브로와즈 토마(Ambroise Thomas)가 Hamlet(햄릿: 1868)을 내놓았으며 이어 1960년대를 마무리하듯 Faust(파우스트)를 선사했다.

 

'돈 카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