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그랜드 오페라

사양길의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

정준극 2009. 3. 30. 23:28

사양길의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

 

파리 갸르니에 오페라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는 왜 사양길로 접어 들게 되었는가? 그 대표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믿거나 말거나!


-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 스타일과 포맷으로 작곡하려는 작곡가가 점차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현상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새로운 소재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사용한 스토리를 재탕 및 삼탕할수는 없는 일이었고 별것도 아닌 스토리로 그랜드 오페라를 만들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그나저나 극장측의 이익도 생각해야 했다. 그랜드 오페라 한번 잘못 공연하여 실패하면 쪽박을 찰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두 사항은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첫 번째 사항을 생각해보자. 음악이란 듣는 사람, 즉 관중을 최대의 고객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오페라 작곡가들의 태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사회가 발전할수록 별별 생각지도 않았던 사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관중위주의 생각은 저리 가버리고 대신 다른 사람들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평론가, 여론 주도층(예를 들면 신문, 방송, 잡지), 지휘자, 제작자 들이다. 그리고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작곡가들도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다. 오페라 작곡가들은 이런 여러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받았다. 규모가 큰 그랜드 오페라를 내놓으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그 작품을 내놓은 작곡가들과 작품을 못살게 굴었다. 별별 험담을 다 쏟아 붓고 그것을 마치 온당한 평론인 것처럼 의슥거렸다. 그러므로 작곡가로서는 귀찮아서라도 그랜드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게 되었다.

 

 파리 오페라극장에서의 '예언자' 무대 스케치


평론가들은 작곡가들에게 ‘보시오! 바그너를! 당신들도 바그너와 같은 음악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라고 끈질기게 요청하였다. 결과, 댕디(d'Indy), 쇼송(Chausson), 포레(Faure)와 같은 작곡가들은 자기들의 작품에 바그너 스타일을 도입코자 노력하였다. 예를 들면 Fervaal(페르발: 댕디), Le roi Arthus(아서왕: 쇼송), Penelope(페네로프 왕비: 포레) 등이다. 그러나 이같은 바그너 모방성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들은 대체로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도 관심을 끌지 못했다. 어째서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고자 한다. 너무 복잡해서 그 이유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것 같아서이며 또한 지면도 부족해서이다. 하지만 만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스티븐 휘브너(Steven Huebner)의 fin du siecle 을 읽기를 권한다.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쇼송의 '아서 왕'

 

두 번째 이유는 간단하다. 새로운 오페라가 계속 나와 무대를 차지하기 때문에 오래된 그랜드 오페라는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파리의 대부분 극장들은 새로운 감각의 새로운 작곡가들에게 새로운 오페라를 의뢰하는 경향이었다. 파리의 오페라 극장들은 신인 등용문이었다. 예를 들면 비제이다. 다행하게도 파리에는 옛날 오페라를 우대해주는 극장이 하나 있었다. Gaite Lyrique였다. 이 극장에서는 알레비의 La Juive를 오랜기간 공연하였다. 제작비가 많이 드는 그랜드 오페라임에도 불구하고 옛것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는 팬들을 위해 봉사한 셈이었다. 알레비의 La reine de Chypre(시프레의 여왕)도 이 극장에서 연속 공연되었다. 전설적인 테너 존 오설리반(John O'Sullivan)이 주역을 맡아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로시니의 '렝스로의 여행' 피날레 장면. 페사로 로시니 극장.


한편, 파리의 유명 오페라 극장들은 레퍼토리를 프랑스 작품에만 한정하지 않고 다른 나라 작품도 초빙하여 관중의 저변확대를 기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바그너의 작품은 단골 메뉴였다. 그 때문에 오리지널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가 찬밥신세가 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파리에서는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가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프랑스의 그랜드 오페라를 잊지 않고 있어서 위안이 되었다. 비엔나의 슈타츠오퍼는 알레비의 '유태여인'(La Juive)을 거의 정기적으로 공연했다. 특히 구스타브 말러가 슈타츠오퍼의 음악총감독으로 있을 때에 그랬다. 말러가 유태계인 것을 고려하면 이해가 된다. La Juive는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이후 슬며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거리의 벽에는 ‘유태인을 몰아내자!’라는 구호가 심심치 않게 써있는 때에 La Juive를 무대에 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신에 바그너가 무대를 차지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1930년대에 바그너 성악가가 많았음은 그 때문이었다. 바그너 선호 경향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스페인, 포르투갈,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고작 몇편의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가 가물에 콩나듯 공연되고 있을 뿐이다. 몇 년전 워싱턴 오페라극장에서 마스네의 '르 시드'(Le Cid)가 공연된 것은 대단한 화제였다. 타이틀 롤인 르 시드를 맡을 마땅한 테너가 없어서 고민하였으나 스페인 출신의 플라시도 도밍고가 맡아 대성공을 거두었다. 르 시드는 시카고에서도 공연되었으나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돈 많은 미국의 오페라 극장들도 제작비를 따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르 시드'. 1999년 스페인 세빌랴의 메스트란사 극장(Teatro de la Maestranza). 플라시도 도밍고 타이틀 롤. 화려하고 장엄한 무대. 그랜드 오페라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