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코믹 오페라

이탈리아의 코믹 오페라

정준극 2009. 3. 31. 14:12

[이탈리아의 코믹 오페라] 

 

시기는 17세기 후반.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각종 신화를 소재로 한 무거운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가 판을 치고 있었다. 당시 이른바 오페라(오페라 세리아를 말함)라는 것은 돈 많고 지체 높은 귀족들이나 보는 것이며 무전유죄의 일반 백성들은 구경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일반 시민들은 ‘우리도 오페라나 한번 보고 죽자!’면서 오페라에 대한 동경심을 은근히 나타내 보였다. 단, 무겁고 심각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신화오페라는 사절! 일반 백성들은 위한 쉽고도 가벼운 오페라를 원했다. 이때 알레싼드로 스트라델라(Alessandro Stradella: 1639-1682)라는 사람이 일반 시민들을 위한 오페라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종래와는 다른 스타일의 명랑한 오페라를 내놓았다. Trespolo tutore(가정교사 트레스폴로)라는 작품이었다. 이를 오페라 부파라고 불렀다. 주인공인 트레스폴로(Trespolo)는 어리석고 웃기는 사람이었다. 여주인공 데스피나(Despina)도 웃기는 아가씨였다. 이 두 사람의 연기와 노래는 장안의 대화제였다. 그로부터 트레스폴로와 데스피나는 후속 오페라 부파의 단골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아무튼 스트라델라는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선도자로 인정을 받고 있다.

 

가정교사 트레스폴로(Il Trespolo tutore) 스케치


알레싼드로 스트라델라의 뒤를 이어 알레싼드로 스칼라티(Alessandro Scarlatti)가 등장하였다. 스칼라티는 나폴리에서 오페라 부파라는 꽃을 활짝 꽃을 피게 만든 인물이었다. 스칼라티의 Il Trionfo dell'onore(명예의 승리: 1718)는 대사가 나폴리 사투리로 써졌다. 어려운 라틴어, 또는 귀족들이나 쓰는 고상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대사가 아니었다. 나폴리 사람들로서는 내용이 피부에 팍팍 와 닿는 것이어서 좋아 죽을 지경이 되었다. 나폴리 사람들은 나폴리에서 공연되는 오페라 부파를 마치 새로운 오페라의 장르인 것처럼 ‘나폴리 오페라’라고 불렀다. 스칼라티는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교주였다. 이로부터 스칼라티의 오페라 부파 스타일은 오늘날 까지도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교본이 되었다. 오페라 부파의 전통은 스칼라티의 뒤를 이어 페르골레지(La Serva Padrona: 하녀마님), 피치니(La Cecchina), 치마로사(Il Matrimonio Secreto: 비밀결혼), 그리고 마침내 모차르트를 거쳐 로시니에 이르기 까지 화려한 전통을 유지하여 왔다.

 

스칼라티의 '명예의 승리'(Il Trionfo dell'onor)의 한 장면


코믹 오페라(오페라 부파)라고 해서 처음부터 대우를 잘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일반 오페라(오페라 세리아)의 공연 도중 심심풀이 막간 작품으로 대우를 받았다. 그러다가 코믹 오페라, 특히 나폴리 오페라가 독립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자 진짜 독립적 작품으로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1750년부터 1800년까지의 사건이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가 완전 정착하는 데에는 페르골레지의 공로가 컸다.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의 La Serva Padrona(하녀 마님)는 그가 세상을 떠난지 13년 후에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어찌나 재미있는 작품이었던지 전 이탈리아와 전 프랑스를 휩쓸 정도였다. 이 오페라 부파는 루소(Rousseau)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여권신장! 자유결혼!

 

대인기를 끌었던 La serva Padrone(하녀 마님)의 한 장면


1760년 니콜로 피치니(Niccolo Piccinni: 1728-1800)는 베니스의 위대한 극작가인 카를로 골도니(Carlo Goldoni)의 대본에 음악을 입혀 La Cecchina(체키나)라는 타이틀의 오페라 부파를 내놓았다. 원작은 영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파멜라(Pamela: 또는 보상받은 정절)라는 소설이었다.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훗날 베르디는 La Cecchina야 말로 진정한 이탈리아 코믹 오페라라고 선언했다. 이 말인즉 피치니의 La Cecchina는 오페라 부파로서 모든 것을 구비했다는 뜻이다. 대사는 사투리가 아닌 표준 이탈리어로 되어 있고, 막간용 인터메쪼가 아니라 독립적인 오페라였으며, 신화가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좋아하는 실제 스토리로 되어 있고, 드라마틱한 다양성이 있으며, 음악적으로도 아름다운 멜로디를 오케스트라가 뒷받침을 잘해 주는 작품이었다. 더구나 별도의 서곡까지 있었다. 막이 오르기 전에 별도의 서곡만 들어도 신이 날 정도였다. 베르디가 La Cecchina를 애호했던 또 다른 이유로 이 오페라 부파가 남부 이탈리아의 음악에 북부 이탈리아의 대사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의 통일을 주창하던 베르디에게 대단히 어필하는 사항이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는 19세기에 들어와서 로시니의 걸작 Il Barbiere di Siviglia(세빌리아의 이발사)와 La Cenerentola(신데렐라)로서 절정을 이루었다.

 

로시니의 La Cenerrentola(신데렐라)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