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코믹 오페라

영국의 발라드 오페라와 사보이 오페라

정준극 2009. 3. 31. 14:24

[영국의 발라드 오페라와 사보이 오페라]

 

영국의 코믹 오페라는 발라드(Ballad) 오페라로부터 비롯되었다. 연극에 노래를 가미한 것이다. 그러나 몇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노래는 누구나 잘 아는 대중가요 또는 전통적인 민속노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스토리가 로맨틱하고 재미있어야 한다. 초기 발라드 오페라의 대표적인 작품은 존 게이(John Gay)가 쓴 The Beggar's Opera(거지 오페라)이다. ‘거지’가 타이틀인 오페라가 아니며 오페라의 타이틀이 ‘거지 오페라’인 오페라이다. ‘거지 오페라’는 기본적으로 연극이므로 대본을 쓴 존 게이의 이름이 항상 우선되며 음악을 맡은 요한 페푸슈(Johann Pepusch: 1667-1752)의 이름은 소개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작곡가는 한두곡의 대중가요를 편곡하거나 새로 만들어 연극에 포함시켰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음악의 분량이 많이지게 되었다. 발라드 오페라라는 용어는 나중에 생긴 것이며 처음에는 코믹 오페라라고만 불렀다. 처음으로 코믹 오페라라고 부른 작품은 리챠드 셰리단(Richard Sheridan)이 대본을 쓴 La Duenna(보모: 1775)였다. 음악 스코어를 맡은 토마스 린리(Thomas Linley)의 이름이 비로소 소개되기 시작했다.

 


'거지 오페라'의 장면.

 

19세기 하반기까지 런던의 뮤지컬 극장은 수준미달 및 유치찬란의 형편이었다. 주로 판토마임이나 벌레스크(Burlesque: 벌레가 나오는 연극이 아니라 주로 유치하게 웃기는 촌극을 말함)가 공연되었다. 어떤 공연은 내용이 너무 음란하여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오페레타라는 것이 공연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오페레타를 가져와서 제멋대로 유치하게 번역하여 무대에 올렸다. 그러므로 점잖은 체면에서는 오페라 코믹 극장을 기피하는 증세를 가지지 않을수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자 일부 양식있는 시민들이 분연히 일어나 오페라 코믹 극장 정화운동을 추진하였다. 토마스 리드(Thomas Reed) 부부가 제일 앞장섰다. 가족들과 함께 와서 기분 편하게 즐길수 있는 도덕적 내용의 오페레타(코믹 오페라)를 공연토록 주선하였다. 양식 있는 런던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대륙의 프랑스에서는 오펜바흐의 오페레타가 바야흐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때에 쪼잔한 섬나라 백성들인 영국인들은 발라드 오페라에 만족하고 있었다.

 

 벌레스크 형태로 공연된 '거지 오페라'


영국에 프랑스의 본격 오페레타가 처음 선보인 것은 1867년이었다. 오펜바흐의 The Grand Duchess of Gerolstein(게롤슈타인 대공부인)이었다. 파리에서 초연된지 7개월 후였다. 영국인들은 잘 다음어진 대사, 유쾌하고 아기자기한 음악, 재미난 스토리, 화려한 무대의 프랑스 오페레타에 당장 매료하였다. 그리하여 1860년대로부터 10여년간 유럽의 오페레타는 영국의 오페라 극장을 강타하였다. Les Cloches de Cornville은 런던에서 롱런 히트한 유럽 오페레타였다.



 '게롤슈타인 대공부인'


1875년 리챠드 도일리 카르트(Richard D'Oyly Carte)라는 사람이 런던의 코믹 오페라계에 그럴듯하게 등장했다. 그는 유럽 대륙의 오페레타에 대응하여 영국만의 코믹 오페라를 창달해야 한다는 거룩한 사명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실천키로 하였다. 오페라 제작자였던 그는 작곡가인 프레데릭 클레이(Frederic Clay), 에드워드 솔로몬(Edward Solomon)등과 함께 ‘영국라이트오페라학파’를 일단 출범시켰다. 그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젊은 대본가 길버트(W. S. Gilbert)와 재능에 넘쳐 있는 청년 작곡가 설리반(Arthur Sullivan)에게 프랑스에서 수입해온 오페레타의 공연도중 막간에 사용할 짧은 작품을 하나 써 달라고 부탁했다. 프랑스제 오페레타는 오펜바흐의 La Perichole(라 페리콜레)였다. 길버트-설리반 팀은 Trial by Jury(배심판결)을 결과물로 제출하였다. ‘도일리 카르트 오페라 부프단’은 ‘배심판결’을 가지고 전국순회공연에 들어갔다. 막간오페라였지만 본오페라보다 더 인기를 끌었다. 이로부터 길버트-설리반의 신화가 시작되었다. 성공의 기본은 영국식의 재치있는 대사, 특히 단어를 이용한 일종의 말장난이 성공의 기본이었고 다음이 영국식의 명랑한 음악이었다.

 


 길버트-설리반의 '배심 판결'


프랑스 오페레타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영국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도일리 카르트는 길버트-설리반에게 제2탄을 의뢰하였다. 결과물은 The Sorcerer(마법사)였다. 도일리 카르트는 영국 오페레타를 위해 새로운 극장을 건설했다. 사보이극장(Savoy Theater)이었다. 런던의 사보이극장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전기를 설치한 극장이다. 길버트-설리반의 작품들은 차례로 사보이극장의 무대에 올려졌다. 이를 ‘사보이 오페라’라고 불렀다. 사보이극장은 사정상 1882년 문을 닿았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이었다. 길버트-설리반이라는 2인조의 성공으로 너도나도 2인조 바람이 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에드워드 뒤발(Edward Duval)이었다. 2인조 중에는 크게 성공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조기하차했다. 미국의 로저스-햄머슈타인은 대표적인 성공사례이다.

 


길버트-설리반의 'HMS 피나포어'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