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강화-인천

인천의 명물 차이나타운

정준극 2009. 4. 28. 23:01

인천의 명물 차이나타운

 

인천역 앞 차이나타운(중화가)의 입구에 있는 패루

 

우리나라에도 차이나타운이 있다. 오로지 인천에만 있다. 차이나타운을 한문으로 어떻게 표기하는지 궁금했는데 가서 보니 중화가(中華街)라고 적어 놓았다. 오래전 시카고에서 본 차이나타운의 패루(牌樓)에는 ‘중국촌’(中國村)이라고 적혀 있었다. 토론토에서는 중국성(中國城)이라고 적어 놓은 것을 보았다. 그런데 역시 우리나라 관공서는 다르다. 중구에서 발간한 팸플릿에는 서로 다르게 적어 놓아 변화를 주고 있다. '월미관광특구 차이나타운'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에는 화인가(華人街)라고 적어 놓았다. 그런데 '도보관광으로 즐기는 이색여행'이라는 타이틀의 팸플릿에는 중화가(中華街)라고 적어 놓았다. 한가지 표현이라도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저러나 실제로 인천의 화교들은 중화가라는 말 대신에 중국성 또는 당인가(唐人街)라는 표현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차이나타운을 소개하는 책자를 보면 무리 없이 중국성, 또는 당인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층층2길. 계단을 이용하여 진시황능 토용 병사들과 왕좌를 그려 놓았다. 앉아서 사진 찍는 곳이다.

 

차이나타운에는 패루가 세개가 있다. 이참에 패루가 무엇인지에 대하여도 설명하자면, 패루(牌樓)라는 것은  절에 들어갈 때에 있는 서 있는 일주문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마을의 현관임을 나타내는 건조물이다. 인천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면 길 건너에 웅장한 패루가 보인다. 차이나타운의 제1패루이다. 이제로부터 차이나타운에 들어선다는 표시이다. 이 제1패루는 중국 산동성의 웨이하이(威海)시가 2억원을 들여 제작하여 인천시에 무상으로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차이나타운을 거쳐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또 하나의 패루가 서 있다. 역시 대단히 정교한 작품이다. 제3패루이다. 선린문(善隣門)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한국과 중국 간의 선린을 다지자는 의미도 있겠지만 원래 이 동네의 명칭이 선린동이어서 선린문이라고 적어 놓은 것 같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부연하자면 차이나타운은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 북성동(北城洞), 항동(港洞)에 걸쳐 있다. 그런데 제1패루, 제3패루는 있는데 제2패루는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었다. 아마 차이나타운 북쪽 거리에 있는 아래 사진의 아치가 제2패루인것 같지만 확실치 않다.  

 

제2패루(?).

제3패루. 선린문.


다 아는 얘기겠지만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어떻게 조성되었는지에 대하여 아주 간략히 설명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조선은 대원군에 의해 쇄국정책을 지켜오다가 1882년과 1883년에 여러 사정상 어쩔수 없이 개항을 하게 되었다. 운양호사건은 대표적인 사정이었다. 이에 따라 중국(청)에서도 거상들이 제물포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중국은 이들을 보호한다는 목적아래 1884년 인천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중국은 주로 산동성에 사는 상인들에게 조선에 가면 돈을 잘 벌수 있으니 투자이민을 가라고 적극 권장하였다. 이에 따라 약 2천명의 중국인들이 현재의 선린동 일대에 들어와 살면서 차이나타운을 형성했다. 중국 사람들은 무역도 했지만 주로 음식점과 잡화상을 경영했다. 부두노동자들 중에도 중국인들이 많았다. 지금은 차이나타운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이 약 6백명에 불과하지만 차이나타운 초창기 당시에 2천명의 중국인들이 살았다는 것은 대단한 상황이었다. 거리마다 쏼라쏼라 소리였을 것이다. 이후 중국인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 1930년대에는 전국에 무려 5만여명의 중국인들이 살았다. 일제는 중국사람들이 많아지자 화교자본에 대한 위협을 느꼈다. 일제는 온갖 구실을 붙여 화교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특히 1937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화교들에 대한 핍박은 전보다 더욱 거세졌다. 많은 화교들이 대만으로 떠났고 일부는 미국과 동남아로 흩어졌으며 남아 있는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요리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화교들은 중공(중화인민공화국)과 자유중국의 틈바구니에서 갈팡질팡하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가 대만(자유중국)과 외교관계를 끊고 이어 중공과 국교를 정상화하자 화교들의 입지는 더욱 난처해 졌고 아직도 마음들을 어떻게 정리했는지 확실치 않다. 오히려 '아무려면 어떠냐? 하나의 중국인데!'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 아무튼 그리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경극의 가면들로 장식한 차이나타운의 거리

중화기독교회 인천교회

차이나타운 거리. 토요일이면 차없는 거리가 된다.

중국 음식점인줄 알았다. 북성동 주민센터(동사무소)라고 한다. 최근에 중국식으로 리모델링하였다고 한다. 쌍룡이 아니라 단룡인 것이 흥미롭다. 동사무소 마당에 들어서면 용 한마리 앞에서 사진을 찍을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놓기도 했다.

 차이나타운 거리의 어떤 벽에 사람들이 벽화를 그리고 있다.

벌써 완성된 벽화의 일부분. 결혼식을 위해 신부를 가마에 싣고 가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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