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강화-인천

한국의 은인 맥아더장군

정준극 2009. 4. 28. 22:55

한국의 은인 맥아더장군의 동상

 

우리는 맥아더라고 쓰고 읽는 매카서 장군 기념상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에 결행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7년후인 1957년 9월 15일 맥아더장군 동상건립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해 10월 3일, 개천절을 맞이하여 위대한 맥아더장군의 동상이 종전에 만국공원이라고 불리던 곳에서 제막되었다. 동상의 하단에 있는 건립문을 소개함으로서 맥아더장군 동상에 대한 설명을 대신한다.


“정의에는 국경이 없고 투쟁에는 산도 물도 거침이 없다. 이러한 정의로써, 이러한 투쟁을 감행하여 자유세계의 노선 위에 승리를 가져오고 그리하여 만인의 감격과 탄앙을 한 몸에 두른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여기 이동상의 주인공 다그라스 맥아더장군이다. 그는 1880년 1월 26일 아-더 맥아더장군의 둘째 아들로 미국에 태어나서 소위로 출발하여 오성장군의 칭호를 받음에 이르기까지 무릇 반세기에 걸쳐 가지가지 혁혁한 무공을 세운이로서 일본의 항복을 받음과 동시에 점령군 총사령관으로 패전 일본에 주재케 되었었다. 일본이 이같이 항복함으로써 한국은 해방되었으나 불행히 국토가 양단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950년 6월 25일 공산도배가 북으로부터 민국을 침입하였을 때 즉시 미국정부는 한국 구원을 결정하고 맥아더장군에게 공산침략 항전에 참가한 모든 군대를 지휘하도록 명령하였다.


그의 탁원한 천재가 발휘된 것은 바로 이곳 인천에서였다. 그 호매한 식견으로 안출된 거의 기적적인 상륙작전을 1950년 9월 15일에 장군의 진두지휘 하에 결행하여 그 결과로 전세가 일전하여 자유의 승리와 민국의 구원을 가져왔으니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일이며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감격에 넘치는 우리 국민의 명의와 의연으로 각계각층 대표를 망라한 맥아더장군동상건립위원회가 김경승교수의 손에 의하여 비쳐진 장군의 용자가 영겁을 통하여 이 거룩한 지역을 부감하도록 이동상을 세운 것이다. 장군과 그 휘하 용감한 유엔군 장병들이 우리와 자유를 위하여 이곳에서 취한 행동을 우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유독한 침투에 대한 최후 투쟁에 승리를 거둘 때까지 전쟁에는 승리에 대신할 것은 없다고 말한 분이 역시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957년 9월 15일 맥아더장군동상건립위원회”


과연! 좌파친북의 추종자들이 껄끄럽게 생각할 내용의 명문이다. 예를 들어 ‘공산도배가 민국을 침입하였을 때’ ‘공산주의의 유독한 침투에 대한 최후 투쟁에 승리를 거둘 때까지’ 등의 문장은 좌파친북주의자들이 싫어할 문장일 것이다. 그래서 동상을 허물자고 그 난리를 쳤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 아니지 않는가? 역사적 사실마저 부정하는 저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백성들이란 말인가? 한편, 건립문이 명문임에는 틀림없으나 요즘 어린 학생들로서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것 같아 조심스럽게 걱정이 된다. 예를 들면 ‘호매한 식견’, ‘탁월한 천재’, ‘장군의 용자’, ‘지역을 부감하도록’, ‘유독한 침투’ 등이다. 아마 豪邁, 天才, 勇姿, 浮龕, 有獨을 말하는 것이리라. ‘다그라스’라고 적은 것도 어색하다. ‘더글러스’라고 적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건립문의 문장이나 단어를 채근코자하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오로지 맥아더장군의 용기 있는 자유정신에 면면히 감격할 뿐이다. 맥아더장군은 이 나라와 이 백성들의 은인이다. 은혜를 망각하는 자는 짐승만도 못한 법이다.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이 나라, 이 민족은 어찌 되었겠는가?


맥아더장군 동상의 뒤편으로 조금 언덕을 내려오다 보면 웬 커다란 담배 파이프 조각이 있다. 아마 맥아더장군이 평소 파이프 담배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여 파이프 조각을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하지만 맥아더장군께서 애용하던 파이프는 콘 파이프(Corn Pipe)라고 하여 옥수수자루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공원의 한쪽을 장식하고 있는 파이프와는 모양이 틀리다. 

 

맥아더 장군의 동상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인천학도의용대호국기념비가 있다. 북한공산군이 평화를 깨고 침범하자 인천에 있던 학도들이 분연히 궐기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며 전투에 참여하였다. 더 이상 말해야 무엇하랴? 수많은 애국학도들이 귀중한 청춘을 불사르고 목숨을 버렸다. 후배학도들은 이런 사실을 망각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부조 

 어느 미군 공군 조종사의 이야기를 담은 부조

 맥아더 장군 동상 아래쪽에 있는 거대 파이프

 

인천 학도의용대 호국 기념비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비 앞을 지나가는 백발이 성성한 어떤 노인. 그분도 실은 학도의용군으로 나갔었다고 한다. 이제는 50여년전의 일. 자꾸만 잊혀져 가는 6.25 공산침략이 안타깝게 생각된다고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