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바벤버그-3공화국

오스트리아의 군주들: 근대 초기

정준극 2009. 5. 14. 05:57

 

근대 초기의 군주들

 

오스트리아 영토는 1493년 재통합되어 하나의 군주가 통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간이 약 70년간 지속되었다.


-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오스트리아 대공: 1493-1519. 독일왕과 차기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되지 못했다.

- 샤를르 1세(Cahrles I) 오스트리아 대공: 1519-1521. 독일왕, 신성로마제국 황제(샤를르 5세: 샬레마뉴 대제로서), 스페인국왕(샤를르 1세로서) 재임하였다.

-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오스트리아 대공: 1521-1564. 독일왕, 신성로마제국 선출황제, 보헤미아 및 헝가리 왕을 겸하였다.

 

페르디난트 1세

 

- 페르디난트 1세가 세상을 떠나자 오스트리아의 영토는 그의 아들들에게 다시 분할되었다. 즉, 남부오스트리아(정통 오스트리아: Austria proper), 북부오스트리아(티롤, 기타 오스트리아), 인네레 오스트리아(슈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로 분할되었다.


- 남부오스트리아(정통 오스트리아)는 페르디난트 1세의 장자인 막시밀리안 2세에게 주어졌다. 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II) 대공은 1564-1576년간 남부오스트리아를 통치했다. 그는 독일왕, 신성로마제국 선출황제, 보헤미아 및 헝가리 왕을 겸했다.

- 막시밀리안 2세 대공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루돌프 5세(Rudolph V)가 대공의 위에 올라 1576-1608년간 남부오스트리아를 통치했다. 그 역시 독일왕, 신성로마제국 선출황제, 보헤미아 및 헝가리 왕을 겸했다.

- 루돌프 5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막시밀리안 2세의 차남인 마티아스(Matthias)가 오스트리아 대공의 위에 올라 1608-1619년간 남부오스트리아를 통치했다. 그러나 마티아스 역시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할수 없이 남부오스트리아의 대공은 페르디난트 1세의 셋째 아들인 샤를르(Charles)에게 넘겨졌다.


- 한편, 페르디난트 1세의 둘째 아들인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는 북부오스트리아(티롤, 기타 오스트리아 영토)를 상속받았다. 페르디난트 2세는 1564-1595년간 북부오스트리아를 통치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가 적자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상부오스트리아 영토는 그의 형인 막시밀리안의 자손들에게 인계되었다. 즉, 막시밀리안 2세의 둘째 아들인 마티아스(Matthias)가 1595-1619년 통치했다.

- 그러나 마티아스도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의 영토는 페르디난트 1세의 셋째 아들로서 인네 오스트리아를 상속받은 샤를르 대공에게 넘겨졌다. 막시밀리안 2세에게는 셋째 아들 막시밀리안 3세가 있었다. 그는 형인 마티아스를 도와 1612년부터 북부오스트리아의 총독으로 재임하였으나 6년후인 1618년 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막시밀리안 3세는 독일기사단(Teutonic Order)의 그랜드 마스터를 역임하기도 했다.


- 마지막으로 인네레 오스트리아(스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는 페르디난트 1세의 셋째 아들인 샤를르(Carles II)에게 넘겨졌다. 그는 1564-1590년간 인네레 오스트리아를 통치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 대공이 1590-1637년간 인네레 오스트리아의 군주가 되었다. 그러다가 세 공국으로 분리되었던 오스트리아 공국은 다시 통합되었다.


군주들의 이름이 서로 비슷한 것이 많기 때문에 독일어 자료에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름 뒤에 반드시 영토를 적었다. 예를 들어 인네레 오스트리아의 샤를르 2세 같으면 Karl der II. von Inner Osterreich(Charles II of Innere Austria)라고 적었다.


(통합과 분열의 반복)

인네레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던 프레데릭 3세는 1619년 남부와 북부 오스트리아 등을 모두 상속받아 마침내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저 유명한 30년 전쟁이 일어났다. 프레데릭 3세는 30년 전쟁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30년 전쟁이 5년째 들어가던 해인 1623년, 프레데릭 3세는 전체 오스트리아를 총괄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통합되었던 오스트리아는 다시 나누었다. 프레데릭 3세는 자기의 동생인 레오폴드에게 북부오스트리아(Upper Austria)의 영토를 나누어 주고 통치토록 했다. 실상 레오폴드는 북부오스트리아의 총독을 지냈었다.


남부오스트리아(Lower Austria)와 인네레 오스트리아는 페르디난트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라인에 남도록 했다. 그리하여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 독일국왕 및 페르디난트 2세로서 차기 신성로마제국황제 겸 보헤미아 및 헝가리 왕)가 1619년부터 1637년까지 남부오스트리아 및 인네레 오스트리아를 통치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페르디난트 4세(Ferdinand IV: 독일국왕 및 페르디난트 3세로서 차지 신성로마제국황제 겸 보헤미아 및 헝가리 왕)가 1637-1657년간 통치했고 이어 레오폴드 6세(Leopold VI: 독일국왕 및 레오폴드 1세로서 차기 신성로마제국황제 겸 보헤미아 및 헝가리 왕)가 1657-1705년 통치했다.


한편, 북부오스트리아 공국은 티롤 가계로 영토를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레오폴드 5세(Leopold V)가 북부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 1623-1632년간 통치했고 이어 페르디난트 샤를르(Ferdinand Charles) 대공이 1632-1662년간 통치했다. 페르디난트 샤를르가 대공으로서 통치할 때에는 이탈리아의 클라우디아 데 메디치(Claudia de Medici)가 1632-1646년간 섭정의 역할을 했다. 페르디난트 샤를르 대공의 뒤를 이어서는 지기스문트 프란시스(Sigismund Francis)가 1662-1665년간 북부오스트리아 공국의 대공이 되었다. 지기스문트 프란시스 대공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북부오스트리아의 영토는 장자의 라인으로 옮겨졌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의 영토는 결국 1665년 다시 통합되었다. 즉, 남부오스트리아 공국의 레오폴드 6세가 북부오스트리아 공국까지 총괄하게 되었다.


1657년에 남부오스트리아 공국의 대공이 된 레오폴드 6세는 1665년 통합된 오스트리아 공국의 군주가 되어 1705년까지 통치했다. 레오폴드 5세는 사실상 1657년부터 독일국왕 및 차기신성로마제국황제 겸 보헤미아 및 헝가리 왕을 겸하였다. 레오폴드 6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요셉 1세(Josepf I)가 1705-1711년 오스트리아 공국을 통치했다. 요셉 1세 역시 독일국왕 및 차기 신성로마제국황제 겸 보헤미아 및 헝가리 왕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요셉 1세의 뒤를 이은 인물이 샤를르 3세(Charles III)였다. 재임기간은 1711-1740년이었다. 샤를르 3세 역시 독일국왕 및 샤를르 6세(Charles VI)로서 차기 신성로마제국황제였으며 아울러 보헤미아 및 헝가리의 왕의 신분을 가졌다. 샤를르 3세(샤를르 6세 신성로마제국황제)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남자 군주로서는 마지막 이었다. 그에게는 후사로서 딸 하나 밖에 없었다. 유명한 마리아 테라지아(Maria Theresia)였다. 샤를르 3세(샤를르 6세 신성로마제국황제)는 자기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오스트리아 공국의 군주로 삼고자 했다. 그리하여 야기된 사건이 저 유명한 국사조칙(國事詔勅: Pragmatic Sanction)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후들의 반대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로레인의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함으로서 합스부르크-로레인 왕조로 이어졌다.

 

샤를르(칼) 6세. 젊은 시절


(국사조칙: 國事詔勅: Pragmatische Sanction)

샤를르 3세(샤를르 6세 신성로마제국황제)는 자기가 세상을 떠난 후에 자기의 딸과 그 딸이 낳은 자식들이 합스부르크의 영토를 통치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 이른바 ‘국사조칙’을 남겼다. 국사조칙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국토의 상속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샤를르 3세(샤를르 6세)는 마지막 남자 군주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 딸이 낳은 아들이 모든 것을 승계한다는 내용으로 바꾸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남자 군주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 딸이 승계한다는 내용도 포함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염두에 둔 조치였다. 그리하여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의 대공녀로서(Archduchess) 샤를르3세(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난 1740년부터 1780년까지 오스트리아 공국을 통치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 및 헝가리의 여왕이라는 신분을 가지기도 했다. 대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로레인의 프란츠 슈테판(프란시스 스테판)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맡도록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통 여제(Empress)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실제로 여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스트리아의 관습에 따라 부인은 남편의 타이틀을 사용할수 있기 때문에 여제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에서는 남편이 교수이면 그 부인은 Frau Professor라고 부른다. 이를 여교수라고 번역하면 곤란하다. 교수부인일 뿐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마리아 테레자)는 ‘오스트리아/유럽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그만큼 오스트리아 공국에서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 왕비인 마리 앙뚜아네트의 어머니였다. 역사학자들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통치로부터 근대 유럽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로레인의 프란시스(Franz-Stephan von Lothringen)와 결혼하였다. 프란시스는 프란시스 1세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일 뿐, 부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의 정사을 관장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무려 16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두 명은 나중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며 딸 하나는 왕비가 되었다. 요셉 2세(Joseph II)와 레오폴드 2세(Leopold II)와 마리아 안토니아(마리 앙뚜아네트)이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합스부르크 왕조를 승계해 나간 인물들은 모두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스테판의 후손들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가족. 프란시스 황제와의 사이에서 15자녀를 두었다. 가운데의 청년이 나중에 요셉1세 황제가 된 사람이며 오른쪽 끝의 소년이 요셉1세 황제의 뒤를 이은 레오폴드 황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