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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혁명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정준극 2009. 5. 14. 06:16

1848년 혁명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1848년 3월 초에 비엔나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노동자와 학생들이 중심이 된 그 혁명으로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재상이 수도 비엔나에서 어디론가 도망갔다. 3월 중순에는 헝가리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3월 15일이다. 시저가 죽은 바로 그 날이다. 헝가리에서는 급진주의자들과 학생들이 부다 요새를 장악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했다. 그 다음날 의회에서 하원은 정부에게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의회를 다시 선출토록 요구했다. 헝가리 의회는 자유주의자들이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3월 22일에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었고 내각의 수반으로는 루이스 바티야니 백작(Count Couis Batthyani)이 선출되었다. 당시 의회의 상원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연금상태에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상원에게 요구해서 대대적인 헝가리 개혁 패키지를 승인토록했다. 이로써 헝가리는 경제, 사회, 정치의 모든 분야에서 모처럼 개혁의 불길이 솟아오르게 되었다. 의회에서 내놓은 개혁안을 이른바 '4월 법'이라고 불렀다. 이 법에 따라 헝가리에는 오스트리아 정부와는 별개의 독자적인 재무성과 국방성이 설치되었다. 새로운 정부는 오스트리아 화폐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헝가리국립은행으로 하여금 새로운 헝가리 지폐를 발행하도록 조치했다. 아울러 농업이 국가의 기반이 되는 헝가리에서 봉건시대의 강제부역도 폐지되었다. 많은 소작인들이 소작으로 농사를 짓던 토지를 실제로 소유할수 있게 되었다. 언론의 자유가 생기고 의회정치가 시도되었다. 헝가리 국방군도 창설되었다. 트란실바니아는 헝가리의 통치 아래에 들어오게 되었다.

 

라요스 코수트(Lajos Kossuth)가 헝가리 백성들에게 오스트리아제국에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키자고 역설하고 있다. 1848년 9월.

 

헝가리의 국민들은 상당수가 마쟈르족이다. 하지만 마쟈르족이 아닌 민족들도 다수가 살고 있다. 헝가리의 비마쟈르인들은 헝가리 정부가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트란실바니아의 독일인들과 루마니아는 트란실바니아가 헝가리에 합병되는 것을 반대했다. 한편, 비엔나의 제국정부는 눈의 가시처럼 생각되는 헝가리의 새로운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첫번째 시도로서 주로 헝가리의 소수민족들을 군대로 징집하여 기존의 제국군대에 편입시켰다. 크로아티아에서는 반헝가리주의자가 총독에 임명되었다. 요시프 옐라치크라는 사람이었다. 그러던중 4월에 접어들자 부다페스트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는 즉각 헝가리 의회에 해산을 명령했다. 헝가리 의회는 비엔나의 명령을 거부했다. 갈데까지 가보자는 생각이었다. 9월에는 크로아티아의 반헝가리 세력을 이끌고 있는 옐라치크가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를 공략하였다. 이들은 말이 군대이지 폭도들이나 다름 없었다. 크로아티아의 폭도들 중 일부는 헝가리내의 반헝가리 분자들과 합세하여 페스트에 있는 제국군대 사령관들을 잡아서 가혹한 린치를 가했다. 크로아티아 폭도들이 부다페스트에서 물러난후 헝가리는 국방위원회를 설치하고 군대를 보강하였으며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화폐를 발행하였다. 10월에는 비엔나에서 제국에 반대하는 대규모 봉기가 있었다. 비엔나는 헝가리에 있는 제국군대에게 요청하여 반란세력을 진압토록 했다. 헝가리의 제국군대는 비엔나로 진군하여 노동자 봉기를 진압했다. 제국군대의 활약으로 오스트리아 각지에서의 노동자 혁명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러나 헝가리 내부에서의 반오스트리아 봉기는 어찌하지 못했다. 12월에 오스트리아제국의 페르디난트 황제가 사임을 하고 대신 젊은 프란츠 요제프가 황제로 취임하였다. 프란츠 요제프는 페르디난트보다 헝가리 백성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약속했다. 그러나 '4월 법'을 존중할 의사는 없다고 밝혔다. 그러자 마쟈르인들은 프란츠 요제프를 황제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헝가리에서 헝가리인들이 지지하는 대관식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

 

이듬해가 되자 제국군대의 활동은 더 활발해졌다. 제국군대는 1849년 초에 페스트를 헝가리 혁명분자들의 수중으로부터 탈환하였다. 헝거리 혁명정부는 페스트를 떠나 데브레첸(Debrecen)으로 자리를 옮겼다. 4월에 헝가리 의회의 잔당들은 헝가리에서 합스부르크 왕조를 폐위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헝가리를 공화국으로 선포했다.이들은 라요스 코수트(Lajos Kossuth: 1862-1894)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상당한 재량권을 주었다. 말하자면 독재를 해도 모두 나라를 위한 것이므로 관찮다고 한 것이다. 코수트는 헝가리로 보면 민족주의 애국자이지만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보면 반역자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헝가리에 증원군을 파견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토록 했다. 그리고 러시아에 요청해서 러시아군대가 헝가리의 동쪽으로부터 공격토록 했다. 러시아군대는 헝가리 방위군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밀어냈다. 마침내 헝가리군은 8월 13일에 항복을 했고 수장인 코스트는 오토만 제국으로 도망갔다. 그로부터 헝가리에 대한 압정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루이스 바탸니를 비롯해서 약 100명의 헝가리 지도층들이 처형되었다. 어떤 상류층 부인네들은 길거리에서 공공연히 채찍을 맞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정부는 백성들의 야외집회를 무조건 금지했고 심지어 극장 공연까지도 금지했다. 뿐만 아니라 헝가리 국기를 게양하는 것도 금지했고 헝가리 민속의상을 입는 것 조차도 제약을 받았다. 그리고 코스트 스타일의 수염을 기르는 것도 금지했다.

 

헝가리 민족주의 애국자 라요스 코수트(1862-1894)

 

헝가리 혁명이 무위로 돌아간 후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헝가리 헌법을 폐지하고 절대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프란츠 요제프는 헝가리를 네 구역으로 분할하였다.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보이보디나(Vojvodina)였다. 독일과 보헤미아에서 사람들을 데려와서 헝가리 정부의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헝가리 사람들이 고위 공무원이 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헝가리어는 공식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대신 독일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고등교육기관에서는 모든 교육을 독일어로 시행하였다. 헝가리에서 마쟈르인들은 박대를 받았지만 비마쟈르인들은 그나마 무시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헝가리에 속한 크로아티아인들은 '우리는 그나마 제국으로부터 보상을 받았지만 마쟈르인들은 처벌만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헝가리의 국민여론은 둘로 갈라졌다. 무조건 헝가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나마 외세로부터 국토를 보전하려면 오스트리아 제국의 도움을 받지 않을수 없으니 참자라는 주장이었다. 참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합스부르크에 의존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다만, 합스부르크가 헝가리의 헌법을 인정하고 헝가리 자체의 법을 존중한다면 제국 안에 머물러 있을수 있다는 견해였다. 페렌츠 데크(Ferenc Deak: 1803-1876)라는 사람은 합스부르크와의 연합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데크는 4월 법이 효력을 가지자면 현실에 맞게 수정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비엔나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헝가리 의회가 그의 주장을 인정했다. 데크는 그러면서 헝가리가 얻을수 있는 자유는 모두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페렌츠 데크

 

프란츠 요제프의 신전제주의가 처음으로 균열을 맞이한 것은 1859년 사르디니아와 프랑스 연합군이 솔페르노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부터였다. 프란츠 요제프는 제국의 모든 지역을 통치하기에는 비엔나 단독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헝가리에 대하여 양보할 것은 양보해야 서로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한 제국, 두 나라의 형태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던중 1866년에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크게 패배시켰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헝가리 지도자들간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우스글라이히(Ausgleich: 대타협)를 이루게 되었다. 그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오스트리아제국과 헝가리왕국의 대타협(Österreichisch-Ungarischen Ausgleich)으로 새로운 '오스트리아-헝가리왕국'이 태어났고 이에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비가 헝가리왕국의 왕과 왕비로서 별도의 대관식을 가졌다.

1866년. 부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