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바벤버그-3공화국

1848년 3월 혁명

정준극 2014. 7. 16. 09:05

1848년 3월 혁명

7백년 제국의 몰락을 암시

 

비엔나의 번화가인 케른트너슈트라쎄. 번화한 캐른트너슈트라쎄도 1848년 3월 혁명에 시달려야 했다.

 

오스트리아제국에서 일어난 1848년 3월 혁명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이곳저곳에서 간헐적으로 언급되어 있으나 아무래도 종합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 특별점검해 본다. 1848년 3월 혁명은 비엔나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의 여러 곳에서 노동자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제국에 항거하여 일으킨 혁명을 말한다. 혁명의 요구사항은 크게 세가지였다. 첫째는 민족주의에 입각한 제국 내 개별 국가 수립, 둘째는 민주주의 정치의 확립, 셋째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정착이다. 3월 혁명은 비단 1848년 3월 한 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1848년 3월부터 이듬해인 1849년 11월까지, 무려 1년 7개월여 동안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요동을 쳤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수백년 영광의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제국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위협을 받고 고통을 당해야 했다. 아무튼 1848년 3월 혁명으로 메테르니히 수상이 물러나고 제헌의회가 소집되었으며 농민의 부역제도가 폐지되었다. 헝가리는 이 틈을 타서 마쟈르 민족이 중심이 되는 민족국가를 수립코자 했으나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사적 억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비엔나의 민주화 혁명운동도 제국 군대가 비엔나를 다시 장악하면서 맥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혁명이 일어난지 1년 후인 1849년 3월, 오스트리아 제헌의회가 강제 해산되고 절대군주에 의한 체제가 다시 들어섰다. 프란츠 요셉 1세 치하에서였다.

 

1848년 비엔나혁명

 

1848년 3월의 혁명은 제국내의 다양한 민족들에게는 민족자결주의적 성격을 띄는 것이었다. 비엔나가 통치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에는 독일계 오스트리아인(Deutschstammige 또는 Volksdeutsche), 헝가리인, 슬로베니아인, 폴란드인, 체코인(보헤미아인), 슬로박인, 루테니아인(우크라이나),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이탈리아인, 세르비아인 등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들 각 민족은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한 독립을 위해 혁명이라는 기치 아래에 각각의 주장을 내세웠다. 개중에는 제국 내에서 다른 어느 민족 보다도 자기 민족이 헤게모니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뭐가 뛰니까 뭐도 뛴다는 식으로 혁명의 와중에 뛰어든 민족도 있었다. 어쨋든 이들 각 민족은 문화와 언어가 다르므로 사실상 한 지붕 아래에서 오손도손 살기는 어려웠다. 그보다 앞서서 오늘날의 독일에서는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던 국가들이 독일 통일이라는 명분 아래에 통일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또한 독일에서는 비록 독일 영토에 살지 않고 있다고 해도 독일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주민의 대부분을 이루어 살고 있는 지역이라면 그 지역도 독일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치솟고 있었다. 예를 들어 보헤미아-모라비아의 주데텐란트(Sudetenland: Sudeten-deutsche)에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지역은 당연히 독일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독일이 이런 주장을 내세우자 다른 민족들은 더 거세게 자체적인 민족주의를 외치며 각자의 독립운동에 불을 붙였다. 1848년의 3월 혁명은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 이외에도 자유주의, 진보주의, 심지어는 사회주의가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의 오랜 전통인 보수주의에 저항하고 나선 일대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늘날의 체코공화국인 주데텐란트에서는 19세기 말에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계 주민들을 강제로 추방하는 사례가 있었다. 히틀러는 1938년에 주데텐란트를 독일 제3제국에 강제로 통합하고 독일어 주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독일로 편입한다고 주장했다.

 

[초기의 불만 표출] 1848년의 사건은 당장 일어난 것이 아니다. 나폴레옹 후의 문제를 다룬 1815년 비엔나 회의(Congress of Vienna) 이후 줄곧 누적되었던 사회정치적 긴장의 산물이었다. 3월 혁명 이전에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계몽시대'(Age of Enlightenment)를 열고 새로운 사회정치적 질서를 확보코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제국은 구태적인 보수에 중점을 두고 언론자유를 제한하는가 하면 대학에서의 학생 활동을 제약하였으며 일반 단체의 활동까지도 사상이 수상하다고 생각되면 즉시로 제재조치를 취하였다. 이로써 사회정치적인 불만과 분란은 더욱 싸여만 갔다. 여기에 가진자와 없는자, 특히 농업생산에 있어서 지주와 소작인간의 갈등은 날로 심각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특히 농업국가인 헝가리에서는 농지사용권에 따른 분규가 노골적으로 분출되어 간혹 폭력적인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런가하면 1848년 이전의 시기에 유럽에서는 각 종교집단간의 분규가 일반사회에 의외로 심각한 영향을 던져 주었다. 가톨릭 내부에서도 분규가 일어났지만 각기 다른 종단에서도 분규가 일어났다. 이러한 분규는 간혹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혁명을 주창하는 사람들에게는 농업에 대한 문제보다도 국가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제가 보다 좋은 소재가 되었다. 국가적인 문제라는 것은 징병문제, 세금문제 같은 것이다. 그러는 중에 1848년이 시작되자 혁명기운은 제국에 압박을 가하여 결국 메테르니히 재상의 '유럽 콘서트'(Concert of Europe)를 와해시켰으며 이와 함께 결국 국가의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고 그럴수록 제국은 보다 많은 군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더욱 많은 군대가 필요하다보니 징집에 있어서 큰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다. 농부들은 봉건제도 아래에서 농사를 지어 영주에게 바쳐야 하는 의무를 다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제국의 요구에 의해 군대에도 가야 하므로 문제가 컸다.

 

1815년의 비엔나회의

 

언론이 통제되고 결사의 자유가 제한되는 사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각 구석에서는 독일적인 자유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비엔나에서는 특히 요제피움 학교 또는 독일 대학교들을 주축으로 그런 사상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팜플렛이나 신문들을 발간하여 교육문제, 언어문제 등에 대한 논난을 벌였고 아울러 국민들의 자유사상을 고취하였다. 이같은 사조는 주로 중류층 사회에서 열심이었다. 이들은 봉건제도 아래에서의 강제 노동이란 것이 효과적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제국은 임금노동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커피하우스에 모이거나 살롱에 모여서, 그리고 심지어는 연극 무대에서조차 메테르니히 정부를 비난하는 일에 시간을 쏟았다. 그러나 1848년 이전에는 일반 대중들의 그런 요구가 행정이나 정책에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다. 입헌주의 또는 집회의 자유 등은 구호에만 그쳤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저 검열의 완화, 종교의 자유, 경제적 자유, 그리고 정부 행정의 효율화를 외쳤을 뿐이었다. 그런데  일반 대중의 일각에는 가난한 인텔리겐챠들이 중심이 된 급진주의자들이 있었다. 1840년대의 오스트리아에서는 고등 교욱을 받은 자들이라고 해도 일자리가 없었다. 그러니 사회적으로 불만요소가 더 커지지 않을수 없었다.

 

[폭력사태의 직접적인 이유] 1846년에 갈리시아에서 폴란드 귀족들의 봉기가 있었다. 그러자 농부들이 나서면서 '우리는 귀족들 때문에 못살겠는데 귀족들이 못살겠다고 봉기를 하면 우리는 무어냐'면서 봉기를 일으켰다. 당국은 귀족들의 봉기에는 속수무책으로 있다가 농민들까지 봉기를 하자 그제서야 대응에 나섰다. 마침 1845년부터 47년까지 유럽 전역에서는 경제침체와 식량부족으로 사회가 말이 아니었고 일반 백성들의 고통은 컸었다. 그러한 때에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갈리시아에서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일단 유럽의 한 구석인 갈리시아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그동안 지하에서 움추려 있던 혁명세력들이 고개를 들고 '우리도 사실은 혁명을 일으켜서 세상을 바꾸어 보자는 생각을 했다' 나섰다. 그 선봉이 프랑스 파리였다. 1848년 2월말에 파리에서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1789년의 봉기와 양상이 비슷했다. '배고파서 못살겠으니 빵을 달라'는 구호가 나왔다. 혁명세력은 정권을 장악하였고 결국 루이 필립이 폐위되었다. 시민들의 자유가 상당히 보장되었다. 파리에서의 봉기는 유럽 전역으로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파리에서 아침에 기침을 하면 비엔나에서는 오후에 감기가 걸린다는데 비엔나에서 파리의 봉기를 보고 가만히 있을수 없었다. 그래서 3월 혁명이 터졌던 것이다.

 

1789년 7월의 파리 혁명. 바스티유를 공격하는 시민들

 

[오스트리아 영토에서의 혁명] 그러던차에 1848년 3월 초, 니더외스터라이히 의회는 메테르니히 수상의 사임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메테르니히는 보수정부의 수상이면서 외상이었다. 비엔나 학생들의 단체인 '아카데믹 레지온'(Academic Legion)도 메테르니히 정부를 전복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거리에서 시위대들이 '사임! 사임!'을 소리치고 밤낮으로 돌아다니자 견디다 못한 메테르니히는 1848년 3월 13일에 사임하였다. 나는 새도 떨어트릴수 있다는 막강권력의 메테르니히가 학생들과 일부 시민들의 요구로 어쩔수 없이 사퇴하게 되었는데도 그를 옹호하는 어떠한 집회도 없었다. 평소에는 메테르니히 근처에서 눈도장이라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었는데 일단 사퇴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런 사람들은 게눈 감추듯이 사라졌다. 좀 무능하다는 평판이 있는 페르디난트 1세 황제도 수상 겸 외상이 사임하였는데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메테르니히는 런던으로 도피행각을 떠났다. 그제서야 페르디난트 황제는 새로운 내각의 각료들을 주로 진보진영의 사람들로 임명하였다. 그후 오스트리아 정부는 11월까지 불과 7개월만에 다섯번이나 내각이 바뀌는 한심한 상황 속에서 지내야 했다. 콜로브라트 백작(3둴 17일-4월 4일), 피켈몬트 백작(4월 4일-5월 3일), 필러스도르프 백작(5월 3일-7월 8일), 도블호프 디에르 남작(7월 8일-7월 18일), 베센버그 남작(7월 19일-11월 20일)이 내각을 책임 맡았다가 곧이어 바뀌는 수난을 겪었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기존의 질서가 확립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틈새를 이용해서 제국의 우산 아래에 있는 지역들이 노골적인 항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군대가 약하다보니 막을 방도가 없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북부 이탈리아에서 밀라노 공국이 오스트리아 제국에 반기를 들고 전쟁을 벌였을 때였다. 제국의 육군 대원수인 요제프 라데츠키 백작은 밀라노에 지원군을 보낼수 없었으며 현지에 있는 군대도 철수하라고 명령할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밀라노 공국은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1848년 비엔나 아카데미 레지온. 비엔나의 대학생들이 거리를 점거하고 정부군과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이렇듯 정치사회적으로 변화가 물밀듯이 몰려오고 종교단체들에서도 서로간의 분쟁이 진정되기 시작하자 자유사상의 진보주의자들의 승리가 도처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그러했다. 새로운 정치단체들이 세력을 잡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정부참여가 확산되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들은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세우지를 못했다. 베니스와 밀라노의 임시 정부는 통일 이탈리아에 속하겠다고 선언했다. 페스트에 있는 헝가리 정부는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헝가리는 일단 페르디난트 황제를 형식적이나마 자기들의 왕으로 선출할 의사가 있었다. 갈리시아와 로도메리아는 별도의 왕국을 선언했다. 폴란드의 국가위원회도 갈리시아와 로도메이아의 경우를 따른다고 발표했다.

 

['민중의 봄' 이후에도 계속된 사회정치적 긴장] 자유주의 사상의 진보주의자들이 어쨋거나 정치적인 권력을 잡게 되자 서민층 민중들도 이 기회를 자기들의 분노와 에너지를 표출하는 것으로 삼았다. 민중들은 세금이 가혹하다고 주장하며 세금 내는 것을 보이콧했다. 비엔나에서는 일단의 성난 시민들이 세무서로 몰려가서 세금징수관들을 무참히 살해한 일도 일어났다. 군인들을 경멸하고 사람 취급을 안하는 것은 공공연한 일이었다. 제국의 군인이라고 하면 술집에서도 포도주 한잔 정도는 공짜로 마시던 터였는데 그동안에 그런 아니꼽던 일들이 모두 싸이고 싸였다가 마침내 증오와 경멸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라데츠키 휘하의 군대가 밀라노에서 퇴각하여 돌아오자 이들에 대한 싸늘한 눈길은 대단했었다. 민중들은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도 공공연한 비난을 서슴치 않았다. 그 여파때문인지 비엔나 대주교는 거의 강제로 어디론가 도망가야 했다. 예수회에 대한 반감도 컸다. 그라츠에서는 예수회 수도원이 크게 파손되는 소요가 있었다.

 

슈투벤링의 구전쟁성(현정부종합청사)와 라데츠키 장군 기마상

 

1848년 오스트리아에서의 혁명의 여파로 민족주의가 거센 주장을 내세우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첫 시도는 이탈리아 북부 피에드몽-사보이의 왕인 샤를르 알베르가 3월 말에 '우린 이제 더 이상 오스트리아인지 뭔지의 통치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민족주의 전쟁을 일으켰다. 결론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더 이상 피에드몽-사보이와 전쟁을 치룰 여력이 없어서 일단 두고 보겠다는 식으로 방관할수 밖에 없었다. 이같은 피에드몽-사보이의 민족주의적 독립선언은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나라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쳐서 결국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도 독일어를 쓰는 나라이며 민족도 독일과 같은 민족이니 오스트리아를 통일 독일에 포함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이 문제 때문에 프랑크푸르트 국가의회는 양분되어 논란을 거듭했다. 비엔나의 진보적인 각료들은 독일국가의회를 위한 선거를 허용할 생각이 있었다.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는 영토 중에서 어떤 지역이 독일로 편입되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토록 하자는 발상이었다. 헝가리와 갈리시아는 분명히 독일과 관련이 없다. 그러나 보헤미아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올드 크라운 랜드(Old Crown Lands), 즉 보헤미아, 모라비아, 체크 실레지아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주민들도 있기 때문에 독일에 편입해도 무관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세 지역의 주민들 대부분은 슬라브어의 일파인 체코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세 지역은 오늘날의 체코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지역들이다. 올드 크라운 랜드는 사실상 보헤미아왕국을 말한다. 보헤미아왕국은 14세기에 샤를르 황제가 설립한 국가이다. 실레지아는 나중에 오스트리아 실레지아라는 명칭이 되었다. 오스트리아가 쟁취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실레지아의 주민들 중에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체코어를 사용하는 주민들도 상당히 있었다. 아무튼 올드 크라운 랜드라고 하는 이 세 지역을 독일로 편입시키는 문제가 프랑크푸르트 의회에서 논난이 된다고 하자 체코 민족주의자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면서 프랑크푸르트 의회에 참석하는 것 조차도 보이콧했다. 따라서 프라하에서는 1848년 4월과 5월에 독일 민족주의자들과 체코 민족주의자들 간의 긴장이 급격히 고조되었다.

 

비엔나에서는 초여름에 접어 들기 시작한 때에 보수정권이 전복되고 새로운 체제가 도입되었다. 자유를 허용하는 체제였다. 이로써 언론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가 전에 비하여 대폭 보장되었다. 때를 같이하여 각 민족들도 자기들의 주장을 나름대로 소리 높이 외치기 시작했다. 새로 구성된 의회는 선거를 통해 새로운 의원들을 선출해서 새로운 헌법을 기초하도록 했다. 그런데 선거권을 확대하여 선거를 치루도록 했다. 하기야 선거권 확대는 오랜 숙원이었고 당연한 조치였다. 그런데 상당수 주민들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확실히 모르는 입장에서 선거에 참여했다. 그러다보니 급격한 변화를 바라지 않는 입장에서 보수인사들에게 표를 주었고 부득이 보수주의자들이 아니더라도 진보주의자들 중에 온건파들을 선출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역별로 지명도가 높은 사람, 또는 재산이 많아서 사회발전을 위해 돈을 쓸것 같은 사람을 뽑았다. 선거권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그렇게 만든 급진적 진보주의자들은 뜻밖의 선거 결과에 오히려 당황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구성된 의회는 대중들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 수용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불가능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 헌법의회는 독일 계파, 체코 계파, 폴란드 계파로 나뉘어져서 서로 의견을 달리했다. 여기에 각 계파는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 있어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의사당(팔라멘트)에서는 의회가 열리고 있지만 아무런 성과도 만들어내지 못하였고 의사당 밖에서는 허구헌날 데모가 끊이지 않았고 신문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기에 바뻣다. 아무튼 의사당 안팎에서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런 소란을 틈타서 체코가 제 딴에는 선수를 쳐서 프라하에서 범슬라브회의(Pan-Slavic Congress)를 개최하고 합스부르크의 통치를 받고 있는 슬라브 민족들은 단결해서 합스부르크로부터 독립하자는 주장을 내세웠다. 하지만 범슬라브회의의 구성원들이란 사람들이 대체로 농민대표와 서민층 대표여서 독일인이 주축을 이룬 중산층과는 게임이 되지 못했다. 결국 범슬라브회의는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모이기만 했다.

 

[반혁명활동] 아무리 혁명이니 뭐니 해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는 왕정에 대한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며 과거 신성로마제국의 영화를 잊지 못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간단히 말해서 카이저(Kaiser)라는 말이 나오기만 해도 기분이 우쭐해지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진보주의자들이 혁명이나 뭐니 해서 소란을 떠는 것이 보기 싫어서 어서 황제의 군대가 저런 녀석들을 쓸어버리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던중 거리에서 대규모 데모가 벌어지자 라데츠키 장군이 지휘하는 페르디난트 황제의 군대가 재빨리 등장해서 폭도와 같은 데모대를 분쇄했다. 그러자 내각의 진보주의적인 각료들이 당국의 무력진압을 항의하는 의미에서 사표들을 내던졌다. 비엔나에서 권력을 되찾은 페르디난트 황제는 '그래? 사표들을 던졌다고? 잘되었군'이라면서 즉시 보수주의적인 인사들로 공석 각료직들을 임명했다. 페르디난트의 이런 조치는 혁명주의자들을 당황케 만드는 것이었다. 혁명주의자들은 타격을 받지 않을수 없었다. 페르디난트 황제는 합스부르크에 반기를 들었던 북부 이탈리아에 대해서도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8월에 라데츠키 장군을 사령관으로 해서 군대를 파견해 북부 이탈리아를 평정한 것이다. 라데츠키 장군의 승전을 축하해서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라데츠키 행진곡'을 작곡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보헤미아와 북부 이탈리아 문제가 진정국면에 들어가자 관심은 헝가리로 쏠렸다. 헝가리의 봉기는 제국의 통치에 위협을 주는 것이었다. 페르디난트 황제는 상당수 각료들을 이끌고 비엔나를 떠나 잠시 피신해 있어야 했다. 비엔나의 급진주의자들은 헝가리군이 비엔나에 입성하자 크게 환영을 하며 이들이야말로 제국의 황실과 내각에 맞설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헝가리군이 비엔나에 입성하고 황제와 상당수 각료들이 비엔나를 떠나 피신하자 급진주의자들이 비엔나를 장악했다. 그러나 며칠 가지 못했다. 빈디슈 그래츠(Windisch-Gratz) 장군이 프러시아로부터 군대를 이끌고 와서 비엔나의 반도들을 물리쳤기 때문이다. 비엔나에서는 다시금 제국의 권위가 회복되었다. 비엔나 재정복은 독일 민족주의를 패배시킨 것으로 보였다. 페르디난트 황제는 펠릭스 추 슈봐르첸버그 공자(Prince Felix zu Schwarzenberg)를 내각수반으로 임명하였다. 경륜이 많은 정치가인 슈봐르첸버그는 원래 마음이 약해서 우유부단해 왔던 페르디난트 황제를 설득해서 조카인 18세의 프란츠 요셉에게 황위를 이양토록 했다. 이후 체코와 이탈리아에서의 반혁명은 합스부르크에 의해 다시는 일어나기 어렵게 분쇄되었다.

 

[헝가리 혁명]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하여 있지만 별도의 의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1840년대에 들어서서 헝가리 의회에는 진보적인 자유당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자유당은 빈곤한 농민층을 위한 대책들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는 중에 1848년을 맞이했다. 년초부터 프랑스에서의 혁명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식에 힘을 얻는 자유당 주도의 의회는 여러가지 개혁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이를 '4월 법'이라고 부른다. '4월 법'은 헝가리의 경제, 사회, 정치의 모든 분야에서 거의 모든 것을 개혁하는 내용이었다. 개혁의 내용 중에 어떤 것들은 자체적으로 집행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어떤 사항은 비엔나에 요청해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들이었다. 주요한 개혁은 다음과 같다.

 

- 의회는 마쟈르 귀족회의, 그리고 의회의 하원에 해당하는 기구에게 헝가리의 군사, 예산, 대외정책 등에 대한 권한을 준다.

- 기본적으로 합스부르크 황제를 헝가리의 왕으로 삼지만 헝가리는 자치적인 왕국으로서 운영한다.

- 헝가리 정부가 헝가리에서 징수한 모든 세금을 사용할 권한을 가진다. 군대 문제에 있어서도 제국군에 편성되어 있는 헝가리 연대는 헝가리가 지휘할수 있도록 한다.

- 트란실바니아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의 특별 지위를 끝내기로 한다.

 

이러한 요구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으로서 받아들이기 곤란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워낙 허약해진 제국이어서 달리 도리가 없었다. 헝가리 의회가 행한 개혁 중에서 첫번째는 농노제도를 타파하는 것이었다. 헝가리 의회는 이 문제만큼은 다른 어느 것보다 우선으로 처리하였다. 아무튼 기세가 올랐다고 생각한 헝가리 정부는 이웃 크로아티아와 루마니아의 민족운동과 관련한 정치활동에 '이러면 곤란하다, 저러면 곤란하다'하면서 제한코자 했다. 크로아티아와 루마니아는 당연히 자기들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통치를 바랐던 것이며 또 하나의 중앙정부가 있는 것을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헝가리 군대와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군대와의 전투가 국경을 사이에 두고 빈번하게 일어나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슬로박이 헝가리와 또 다른 국경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같은 일련의 사태는 결국 몇년전부터 키워져 온 긴장의 연속이었으며 특히 크로아티아로서는 1845년 7월 희생(July Viictims)의 계속이었다. 결국, 크로아티아의 합스부르크 왕국과 슬라보니아 왕국은 페스트에 있는 새로운 헝가리 정부와 관계를 끊고 오히려 합스부르크 제국에 보다 헌신하게 되었다. 한편, 헝가리에서는 제국 황실이 보수적인 수상을 임명하였으나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헝가리 정부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다보니 보수적인 수상이 헝가리 군주의 이름으로서 해임을 거부하였다. 그렇게 해서 헝가리에는 두 정부가 양립하게 되었고 서로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의 이름으로 상반되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 아무튼 1848년 중반에 이르러 세르비아,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그리고 헝가리가 서로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전투를 벌이는 사태가 수시로 일어났으니 난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윽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전쟁이 공식적으로 개시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전쟁은 비엔나에서 '10월 위기'(October Crisis)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폭도와 같은 데모대들이 제국수비대를 습격하였다. 수비대는 크로아티아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행군하려는 때였다. 잠시동안이지만 비엔나의 치안은 폭도들의 손에 들어 있었다. 제국군대가 동원되어 폭도들을 제압하고 비엔나를 재탈환하였다. 이어 빈디슈그래츠 장군이 이끄는 7만 병력이 헝가리 혁명군을 타도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제국군대가 헝가리로 진군하자 헝가리 혁명군은 겁이 나서 페스트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1849년 3월부터 5월까지의 전투에서 헝가리 측이 참으로 완강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제국 군대는 오히려 철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헝가리군은 철수하는 제국 군대를 뒤쫓지 않고 부다 요새를 점거하여 앞으로 있을 전투에서 방어태세를 완비코자 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6월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이 헝가리로 다시 진격하였고 헝가리 측은 숫자의 열세로 말미암아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후에도 몇 차례의 전투가 있었으나 헝가리는 러시아의 무자비한 병사들 때문에 패배에 늪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8월 13일, 헝가리는 빌라고스에서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빌라고스는 현재의 루마니아 시리아(Siria)이다.

 

[슬로박 봉기] 슬로박 봉기는 슬로박이 마쟈르(즉 헝가리)에 항거의 횃불을 든 사건이다. 당시 헝가리 북부지역인 상부헝가리(Upper Hungary)에는 마쟈르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상부헝가리는 오늘날 슬로바키아에 속한 지역이다. 이 봉기는 1848/49년 합스부르크에서의 혁명기간 중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 여파가 컸다. 슬로박 봉기는 1848년 9월부터 시작하여 1849년 11월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중에 슬로박 애국주의자들은 슬로박국가위원회를 설치하여 슬로박인들의 권익을 대표토록 했고 또한 슬로박민병대를 구성하여 군사력을 키웠다. 슬로박 독립 운동의 정치, 사회, 민족적 요구사항은 1848년 4월의 '슬로박 국가의 요구사항'에 잘 표현되어 있다.

 

[혁명의 2차적 파장] 1849년의 혁명운동은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공동의 적을 무찌르기 위해 공동전선을 펼치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합스부르크가 제국내의 각개 혁명정부들을 정복하기 위해 각개 전투를 펼쳤지만 1848년 봄부터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와 베네치아에서 새로운 민주적 자주를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자 제국으로서는 제국내 여러 역량을 결집하여 이탈리아에 대항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비엔나에서 1848년 3월 혁명이 일어난지 1주년이 되는 시기에 독일과 보헤미아의 체코의 민주주의자들은 잠시 상호 적대감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혁명 계획에 대한 공동전선을 펼치기로 했다. 헝가리는 그 전해에 너무나 심각한 타격을 받아서 다른 일에 신경 쓸 형편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의 대결이 있은지 3일 후에 피에드몽-사보이의 카를로 알베르토 왕이 전격 퇴위하였다. 이로써 피에드몽의 전쟁 참여는 아무런 효력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한 걱정 놓았더니 이번에는 독일에서 문제가 생겨났다.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커다란 독일'을 바라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프러시아가 주도하는 '작은 독일'을 지향할 것인가에 대한 논난이 극심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작은 독일은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주도하는 사상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 사람들의 지역들을 통합하자는 주장이었다. 반면에 합스부르크의 주장은 비록 민족은 다르고 언어가 다르더라도 제국의 기치아래 통일된 국가가 바람직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이 의회가 기초한 새로운 헌법을 거부함으로서 작은 독일 주장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오스트리아는 헝가리가 자꾸 따로 행동하려고 하는 것을 봉쇄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슈봐르첸버그는 1849년에 헝가리 의회를 해산하였다. 슈봐르첸버그는 헝가리에 자기가 만든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라고 강요했다. 슈봐르첸버그의 새헌법은 도무지 진보운동이라고는 하기가 어렵게 제한하는 것이었다. 한편 제국 정부는 알렉산더 바흐(Alexander Bach)를 내무장관으로 기용하였다. 바흐는 '바흐 시스템'이라는 특별한 감찰 시스템으로서 오스트리아에서 정치적 반대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의 활동을 억압하였다. 아무튼 그 덕분에 오스트리아는 오랜만에 정상(?)적인 상황으로 돌아왔다. 헝가리에서는 제국이 헝가리 민족주의자인 라요스 코수트(Lajos Kossuth)를 추방하자 당장 이를 항의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스 1세에게 러시아군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러시아군은 헝가리 봉기를 순식간에 분쇄하였다. 슈봐르첸버그는 오스트리아가 안정될수 있도록 만든 1등 공신이었다. 그러는 중에 1852년에 슈봐르첸버그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급작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들은 슈봐르첸버그가 성공적으로 유지했던 콘트롤을 계속 이어받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후에 1차 대전이 일어났다.

 

슈봐르첸버거플라츠의 슈봐르첸버그 장군 기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