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바벤버그-3공화국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출범

정준극 2014. 7. 28. 21:41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출범 


1차 대전의 종식과 함께 오스트리아에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독토르 칼 렌너(Dr Karl Renner)가 공화국 수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부르크링(Burgring)의 독토르 칼 렌너 링(Dr Karl-Renner Ring)은 그를 기념하기 위한 거리 이름이다. 신생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1938년까지 지속되었다. 1934년부터 1938년 히틀러에 의한 합병(Anschluss)까지의 시기를 통상 오스트로파치슴(Austrofascism)의 시기라고 부른다. 이 기간은 로마 가톨릭의 국수주의가 사회민주당, 공산당, 그리고 나치당과 투쟁을 벌인 기간이다. 그래서 간혹 ‘내전(Civil War)의 시기’라고 부른다.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이 되는 것과 함께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은 자연히 갈라지게 되었다. 과거 제국에 속하여 있던 작은 영토들도 모두 분리하여 떨어져 나갔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체코)의 산업자원과 헝가리의 농업자원을 모두 잃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에는 실업, 인플레이션, 기아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국민들은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했고 추운 겨울에 땔감을 걱정해야 했다. 국민들은 이 모든 것이 정치를 잘못 해서 생긴 일이라고 믿었다.


1938년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을 선포한후 비엔나의 헬덴플라츠(영웅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히틀러

 

그러한 때에 히틀러가 합병을 내세우고 등장하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은 나치의 교묘한 사전 작업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오스트리아는 나치 제3제국의 한 구역으로서 나치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오스트리아공화국이라는 명칭도 당연히 사라졌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오스트리아는 비로소 명실상부한 제1공화국으로서 명색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부터 10년 동안 오스트리아는 연합국(미, 영, 불)과 소련의 지배 아래에 있어야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연합군과 소련군이 떠난 것은 1955년이었다. 1955년 오스트리아 정부와 연합국 및 소련은 이른바 ‘오스트리아 독립조약’(Staatsvertrag)에 서명하고 영세중립국이 되었다. 독립조약의 내용은 오스트리아를 주권국가로서 재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서명식은 1955년 5월 15일(와, 그러고 보니 5가 넷이네) 벨베데레 궁전에서 있었다. 서명식이 끝난후 오스트리아 수상인 레오폴드 휘글(Leopold Figl)은 벨베데레 궁전의 마당을 꽉 메운 군중들 앞에 나타나 조약서를 손에 들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오스트리아는 자유로워 졌다”(Osterreich ist frei). 국민들은 환호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918-1938년의 공화국을 제1공화국이라고 부르며 1945년에 수립된 공화국을 제2공화국이라고 부른다.

 

레오폴드 휘글 수상이 벨베데레 궁전의 베란다에서 조약을 보이며 '오스트리아는 자유로워졌다'고 소리쳤다.


1차 대전 이후부터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다음은 노시내씨가 쓴 도서출판 마티의 '빈을 소개합니다'에서 발췌한 것이다. 필자가 정리해서 설명하는 것보다 노시내씨가 책에 적어 놓은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차 대전이 끝나고 패전국이 된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은 엄청한 혼란 속에 놓인다. 그리고 마침내 1918년 10월 헝가리가 제국에서의 분리를 선언한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1월에 군주제가 붕괴된다. 합스부르크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는 오스트리아 영토에서 축출되어 망명의 길을 떠난다. 오스트리아는 도이치외스터라이히(Deutschosterreich), 즉 '독일계 오스트리아' 또는 '독일민족의 오스트리아'라는 공식명칭으로 공화국이 된다. 제국에서 헝가리가 빠져나간 나머지 영토가 독일어 문화권과 독일 민족 중심이 된다는 것을 선언하는 국가명칭이었다. 승전국인 연합국 측은 독일과 베르사이유 조약을 맺었듯 도이치외스터라이히 공화국과 1919년 9월 생제르맹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 의해 과거 합스부르크 제국의 백성이었던 여러 민족이 독립국을 만들어 떨어져나가거나 인근 나라와 합친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수립되고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승전국인 세르비아에 할양되어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된다. 이탈리아에는 이탈리아 문화권인 트렌티노 지역뿐만 아니라 분명히 독일문화권이던 남티롤까지 포상으로 주어진다.

 

독일문화권의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스스로를 독일민족으로 인식해 왔다. 그러다가 1차 대전 이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작아진 신생 공화국의 국민이라는 낯선 정체성에 직면한다. 그런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이 기외에 아예 옆 나라인 독일과 합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승전국들은 패전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생제르맹 조약을 통해 두 나라가 서로 합치는 것을 금지해 놓았다. 더구나 생제르맹 조약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심리적으로 분리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국명에서 도이치라는 접두어를 떼어내도록 했다.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그렇게 패전국의 처지에서 출범했다. 독일과 합칠 길이 막힌 오스트리아는 별 도리 없이 독립국의 길을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억눌렸던 합병의 열망은 그로부터 20년 후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채워진다.

 

1918년에서 1919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영토 축소로 야기된 문제점들이 사람들의 피부에 와 닿기 시작한다. 특히 오랜 세월 헝가리에서 공급받던 식료품과 보헤미아에서 충당되던 석탄 조달이 끊어지자 식량부족, 연료부족으로 난리가 났고 비엔나 시민들은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로 고통을 받는다. 비엔나 시민들은 비엔나 숲에서 긁어온 나무로 불을 때고 연합국이 보내주는 구호식량으로 연명한다. 이같은 국가적인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좌우 정당은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서로 협조하는 길을 택한다. 1919년 2월 총선에서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사민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 주었고 사민당은 제1 야당인 기독사회당(기사당: 현 오스트리아국민당의 전신)과 협력하여 노동자들의 권리를 신장하는 여러 진보적인 법안들을 통과시킨다. 이 선거에서 오스트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투표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1920년 10월 총선에서는 보수층과 가톨릭 교회 세력의 지지를 받는 기사당이 집권여당이 된다. 그 배경에는 어려운 정국 속에서 움츠러들었던 보수 세력이 다시 힘을 키웠고 헝가리에서 일어난 1919년 공산혁명에 국민들이 긴장했기 때문이다.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정권을 빼앗긴 사민당은 어떻게 하면 정권을 다시 잡을까라는 생각에 넘쳐 있다. 사민당은 새로 제정된 헌법에 따라 연방제가 채택되면서 비엔나가 다른 주와 동등한 자치권을 갖게 되자 보수성향의 시골보다는 진보성향의 비엔나로 눈을 돌린다. 보수적이고 교회의 영향력이 큰 지방에 비해 비엔나 일대에 거주하는 노동자들과 시민계급은 사민당을 지지했다.

 

비엔나의 부유한 상인과 자본가들 가운데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유태인들도 기사당이 공공연한 반유태주의로서 세몰이를 하자 반차별정책을 펼치던 사민당을 지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실제로 당시 사민당 최고지도자들과 이론가들 중에는 유태인이 꽤 많아서 나중에 나치가 좌익과 유태인을 동일시하며 몰아서 핍박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아무튼 사민당은 적어도 비엔나에서 확실하게 주도권을 행사할수 있게 된다. 비엔나는 말하자면 보수의 바다에 둘러싸인 한 점의 붉은 섬이 되었다. 이로써 비엔나는 사회주의자들이 민주적으로 시 의회와 행정을 장악한 세계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공화국 초대대통령으로서 짧았던 임기를 마치고 비엔나 시장으로 옷을 갈아 입은 카를 차이츠와 그 외의 사민당 최고 지도자들은 비엔나를 실험실로 삼아서 사회주의에 기초한 다양한 공공정책을 지체없이 입안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공중위생시설을 확충하고 공공보건시스템을 확립하는 한편, 교육체계를 더욱 평등하게 개혁하고 강제적인 종교교육을 폐지하며 노동자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공중목욕탕과 체육시설을 확장하고 탁아소와 유치원을 설치해 여성노동자들이 마음 놓고 일할수 있게 한다. 이른바 '붉은 빈'(Rotes Wien)으로 불리는 사민정권시대(1919-1934)가 열린 것이다.

 

비엔나 근교에는 집단거주지(보눙)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비엔나 시 당국이 다른 무엇보다도 심혈을 기울였던 분야는 주택정책이었다. 비엔나는 19세기 말부터 외부 인그가 빠른 속도로 유입되어 급속한 인구증가를 겪었다. 주택난에 집주인들의 횡포가 극심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집 없이 쉼터에서 간신히 몸을 뉘거나 길거리에 나앉았고 여러 사람들이 비좁은 방 하나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질병의 위험에 노출된 상태였다. 시 당국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저소득층에게 저렴한 공공임대주택을 대대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방안 모색에 착수했다. 문제는 재정이었다. 예산을 확보해야 했다. 새로 마련된 지방자치권에 따라 각 주와 비엔나는 조세자치권을 가지게 되었다. 비엔나 시 당국은 자신들이 수립한 정책을 문제 없이 실행하기 위해 세수확보에 나섰다. 시 당국이 특히 시립공동주택 건설을 위해 확보한 세원은 사치세와 주택세였다. 말이나 자동차를 소유하거나 경마장, 오페라극장, 나이트클럽, 호텔 등을 이용하는 경우, 그리고 샴페인을 소비하거나 집에 하인을 두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생필품이 아닌 것을 구매하거나 사용하는 행위에는 일제히 사치세를 매겼다. 한편, 임대수입 등에 매기는 주택세에는 누진세제를 새로이 적용했다. 상위 0.5 %에 해당하는 고급 주택이 주택세 세수의 45%를 차지할 정도로 급진적인 내용이었다.

 

이같은 조세개혁을 주도한 재정담당관은 휴고 브라이트너였다. 그가 말한 당시위 상황은 다음과 같다. '비엔나의 4대 제과점에서 걷은 세금으로 학교에 부설된 치과들의 운영비를 조달한다. 자허호텔에서 쓰는 식료품에 부과하는 세금으로 학교 부설 의료원 운영비를 충당한다. 마찬가지로 그랜도, 브리스톨, 임페리얼 호텔의 식료품세를 합하면 어린이 전용 수영장 운영비가 나온다. 시간당으로 요금을 받는 호텔에 매긴 세금으로 시립조산원이 세워졌고 그 운영비는 승마클럽에 부과하는 경마세로 충당된다'. 사치세와 주택세를 아우르는 이른바 '브라이트너 세금'은 당시 비엔나 시 세수 총액의 36%에 달했다. 이것이 비엔나의 공공주택 건립에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결과는 인상적이었다. 1923-1034년에 비엔나 시는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아파트 약 380개 단지를 지어 새로 6만 가구를 공급했다. 비엔나의 인구 22만명이 혜택을 받았다. 참고로 유태인이던 브라이트너는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잡은 1934년에 체포되었으나 풀려난 뒤 미국으로 피신해서 1946년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비엔나 시가 건설한 수많은 공공주택단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하일리겐슈타트에 있는 카를 마르크스 호프(Karl-Marx-Hof)이다. '붉은 비엔나'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사민당의 교육개혁가로 널리 알려진 오토 글뢰켈은 1930년 가을 카를 마르크스 호프의 완공 기념식에서 '과거에는 인민의 압제자인 귀족과 기사들이 성과 요새를 지었다. 그러나 오늘, 인민의 요새가 세워졌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표상이자 각성의 표상이다'라고 선언했다. 카를 마르크스를 마치 수호성인처럼 여기는 '인민의 요새' 카를 마르크스 호프가 보수세력에게 눈엣가시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보수당 눈에는 새로 건설된 수많은 공동주택단지들이 모두 사민당 표밭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연방정부의 영향을 차단한 채 자기들만의 정치를 마음껏 펼쳐가는 공산주의자들의 모습이 얼마나 얄미웠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좌와 우, 보수와 진보, 교회와 세속주의는 점점더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고 거의 이념전쟁의 양상마저 보였다. 이것은 다가올 내전을 예고한 것으로 그 중심에 카를 마르크스 호프가 있었다.

 

칼 맑스 호프

 

생제르맹 조약 119조는 오스트리아에서 징병제를 금하고 지원병제만을 허락했으며 120조는 오스트리아 군대의 규모가 3만명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헌법과 공화국을 수호할 의무를 띤 소수정예의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 연방군이 새로 창설되었지만 이들 연방군은 기사당의 연방정부 장기집권 체제하에서 우경화하면서 헌법과 공화국보다 권력자에 대한 충성을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전국 각지에서 극우 무장단체인 일명 '향토방위대'(Heimwehr)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향토방위대'는 생제르맹 조약에 의해 감축된 정규군의 빈자리를 메운다는 명분이었다. 향토방위대는 원래 1차 대전 참전군인들을 중심으로 국경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국수주의 민병대였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기사당의 지도와 자본가들의 돈 줄 아래에 파치슴 지지와 반좌익을 목표로 정치적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사민당은 그들대로 1923년 무장단체인 '공화경비대'(Republikanische Schutzbund)를 창설했다.

 

하임베르(향토방위대)의 시가행진. 링슈트라세

                       

오스트리아 사회 전반에 걸쳐 정치, 이념 갈등이 깊어가는 중에 1927년 한 사건이 터졌다. 부르겐란트주 샤텐도르프라는 마을에서 향토방위대와 공화경비대가 티격태격하다가 그 와중에 남자 한 명과 어린이 한 명이 향토방위대원들이 쏜 총탄에 맞아 죽는 일이 벌어졌다. 해당 향토방위대원들은 살인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배심판결에 의해 무죄로 풀려났다. 이에 분노한 비엔나 시민들과 노동자들이 7월 15일 법원 건물 앞에서 항의 데모를 가졌다. 그러나 경찰과 군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시위자 89명이 목숨을 잃고 약 6백 명이 부상을 입는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사민당의 대처는 무기력했다. 향토방위대는 정국이 자기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이 무렵 오스트리아는 여러모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경제를 재건하려는 노력에 타격이 왔고 특히 1931년 오스트리아 최대의 은행인 크레디트안슈탈트가 파산하면서 그 여파가 오스트리아 국내뿐 아니라 독일을 비롯한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1920년대 중반까지 20만 이하로 유지되던 오스트리아의 실업자 수는 급등해서 1931년에 33만명, 1933년에는 55만명를 넘겼다. 그리하여 실업자로 집계되지 않는 비경제활동인구까지 합하면 실질적인 실업율은 거의 40%에 이르렀다.

 

크레디트안슈탈트 은행 건물. 오스트리아의 첫 대형은행이었다. 크레디트안슈탈트의 파산으로 대경제난국이 되었다.

                

경제가 무너지자 양대 정당인 기사당과 사민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높아만 갔다. 고삐 풀린 향토방위대는 점점 더 방자해졌고 새로 부상한 나치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의 전통적 독일민족주의자들을 제치고 전국 각지에서 기반을 넓혀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향토방위대와 공화경비대, 나치 민병과 그외 온갖 무장 단체들이 툭하며 거리에서 총질을 해대며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우선 집권당인 기사당이 무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기사당은 오스트리아 나치들이 독일 나치당의 성공에 힘입어서 놀라운 속도로 세력을 불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자칫 잘못하다가는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게 될것 같아서 크게 걱정을 했다. 그러다가 1931년 1월에 히틀러가 독일에서 총리로 임명되고 나치당이 독일의회의 다수석을 점거하자 당시 오스트리아의 수상이던 엥겔베르트 돌푸스는 오스트리아도 같은 꼴이 되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결국 의회를 강제 해산하고 로마 가톨릭에 바탕을 둔 기사당 일당 독재에 들어가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타임지 커버에 게재된 엥겔베르트 돌푸스 수상


이와함께 돌푸스 내각은 어쩔수 없는 조치이겠지만 시민의 자유권과 참정권을 상당히 박탈하였다. 모든 선거를 무기연기한 것도 그같은 조치의 하나였다. 다 잘하자고 하는 일이겠지만 결국 오스트리아에 이탈리아와 흡사한 파치스트 독재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돌푸스 수상은 무솔리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서 오스트리아에 대한 나치 독일의 침략을 막아달라고 요청하려는 계산도 했다. 오스트리아는 언어는 독일어를 쓰지만 기본적으로는 로마 가톨릭 국가여서 이탈리아와 더 가깝다는 설명도 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히틀러와 동맹을 맺고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에 손을 들어 주었다. 돌푸스로서는 완전한 계산착오였다. 아무튼 기사당은 독일에서 나치가 부상하는 모습을 보며 나치를 막겠다는 명목으로 민주주의를 헌신짝 처럼 내동이쳤지만 하는 일이라고는 정작 사민당 때려잡기에 열을 올린 것이었다. 이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파치스트 정부와 한 판 싸움을 벌어야할 운명이었다.

 

엥겔베르트 돌푸스 수상이 자기 집무실에서 나치주의자들에게 잔혹하게 살해 당한 모습

 

1934년 2월 12일, 린츠의 사민당 소유 건물에 향토방위대가 진입하여 불법무기수색을 벌였다. 그러자 린츠지역 공화경비대가 들고 일어났다. 서로 무력 충돌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공화경비대는 정부에 의해 불법단체로 규정되고 무기도 일부 몰수 당했지만 여전히 세력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린츠에서의 접전이 알려지자 전국 여러 곳에서 좌우 무장단체 간에 충돌이 빚어졌다. 비엔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엔나의 공화경비대원들은 '붉은 비엔나' 시대의 결실이자 자신들의 생활 터전인 공공주택단지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전투를 치룰 준비를 했다. 가장 치열한 교전은 카를 마르크스 호프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공화경비대는 연방군과 향토방위대의 위세를 당해낼수가 없어서 며칠 가지 못해 항복했다. 2월 15일까지 이어진 이 접전으로 비엔나에서만 1천명이 넘는 공화경비대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민당 고위 간부들은 망명 길에 올랐고 카를 마르크스 호프는 하일리겐슈테터호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붉은 비엔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국회의사당(팔라멘트) 앞에서 반정부 시위후의 어수선한 모습 (2009. 5. 사진: JK Lee)

               

그후 오스트리아에 남은 것은 내리막길뿐이었다. 돌푸스는 내전이 있던 그 해 7월 나치들에게 살해되었고 이어 총리에 오른 쿠르트 슈슈니크는 1938년 히틀러에게 오스트리아를 내주고 사임했다. 오늘날 파치스트 쿠테타의 주역이었던 엥겔베르크 돌푸스는 기사당의 후예인 국민당 소속 정치가와 지지자들 사이에서 오스트리아를 나치의 손에서 구하려다가 순교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기는 하다. 팔라멘트 내의 국민당 사무실에 돌프스의 초상화까지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알수 있다. 카를 마르크스 호프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에야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카를 마르크스 호프의 중앙광장에 '2월 12일 광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1934년 2월에 이곳에서 파치슴에 저항하다가 죽어간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파치슴과 나치즘 때문에 10년간 끊겼던 사민주의 전통은 2차 대전이 끝남과 함께 강력히 부활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1945년부터 지금까지 사민당이 비엔나 시장 자리를 다른 정당에게 내준 일이 없을 정도였다.


엥겔베르트 돌푸스 수상 장례식

 

현대의 오스트리아 정부


국가수반은 연방대통령(Bundesprasident)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연방수상(분데스칸츨러: Bundeskanzler)에게 모든 실권이 있다. 수상은 내각을 구성하여 연방대통령의 재가를 받는다. 오스트리아의 의회는 Nationalrat(나치오날라트)와 Bundesrat(분데스라트)로 구성된다. 나치오날라트는 입법기관이며 분데스라트는 어찌 보면 조정기관이다.

 

1955년 5월 오스트리아조약이 체결된 벨베데레 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