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거장 건축가

Heinrich von Ferstel(하인리히 폰 훼르스텔)

정준극 2009. 5. 19. 04:51

Heinrich von Ferstel(하인리히 폰 훼르스텔)

보티프교회, 비엔나대학교

 


하인리히 프라이헤르 폰 훼르스텔(Heinrich Freiherr von Ferstel)은 1828년 비엔나에서 태어나 1883년 비엔나 근교의 그린칭에서 세상을 떠난 19세기 후반 비엔나의 모습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건축가이다. 그의 아버지는 은행원이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은행원이 되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관심은 누를수가 없었다. 어떤 예술분야를 택할 것인가를 두고 망설이다가 결국 건축을 택하였다. 비엔나예술아카데미에 들어간 그는 에두아르트 반 데어 뉠(Eduard van der Nüll: 나중에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을 설계한 건축가) 등에게서 사사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했으나 마땅한 자리를 얻지 못했다. 1848년 혁명에 잠시 가담했었기 때문에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조각가인 삼촌의 아틀리에에서 겨우 일할수 있었다. 삼촌은 성슈테판성당 바바리아 채플의 제단을 제작하고 있었다. 폰 훼르스텔은 삼촌을 도와 제단 만드는 일을 했다. 작은 일이었지만 성당 일을 맡았던 것이 나중에 폰 훼르스텔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전기가 되었다.

 

보티프키르헤 


당시 오스트리아를 비롯하여 독일, 벨기에, 홀란드, 영국, 그리고 보헤미아에서는 낡은 궁전들을 복원하고 재건하는 일이 마치 붐과 같이 일어났다. 식민지로부터 상당한 부가 들어왔기 때문에 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인해 파괴된 궁전이나 저택을 복구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폰 훼르스텔는 각지를 다니면서 궁전이나 저택의 복구 작업을 맡아하면서 경험과 능력을 배양했다. 1854년 그는 장학생으로 이탈리아에 가서 공부할수 있었다. 이때 그는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에 매료하였으며 특히 고대 건축물의 벽에 그려있는 글자나 그림과 같은 낙서문양과 테라코타 방법으로 다채색(多彩色)을 사용하는 건축기법을 시작하였다. 이같은 방법은 나중에 오스트리아의 박물관 건축에 이용하였다. 


1855년 그는 아직도 이탈리아에 있을 때 프란츠 요셉 황제에 대한 암살 미수가 수포로 돌아간 사건을 감사하는 교회건설의 설계공모에 응하여 전체 74명의 경쟁을 이기고 당당히 선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비엔나의 쇼텐링에 있는 보티프키르헤(Votivkirche)는 1856-79년에 완성되었다. 보티프키르헤의 건설이 23년이나 걸린 것은 재원의 조달이 용이하지 않아서 였다. 폰 훼르스텔은 보티프키르헤가 완성된지 4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후 영국에서는 보티프키르헤를 모델로 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짓자는 제안이 있었다. 현재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폰 훼르스텔의 보티프키르헤를 모델로 삼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편, 비엔나 도심지과 확장되는 것과 함께 링슈트라쎄에 수많은 예술적 건축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폰 훼르스텔은 동료인 루돌프 아이텔버거(Rudolf Eitelberger)와 함께 합스부르크의 링슈트라쎄 확장공사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예를 들면 비엔나시장 공관, 증권거래서(뵈르제) 등이다.

 

비엔나대학교 본관 (앞의 황금기념상은 비엔나 시장을 지낸 리벤베르크 기념상) 


그의 작품 생활중 후반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그가 완성한 작품들은 비엔나 근교의 몇개 교회들은 제외하더라도 루드비히 빅토르(Ludwig Victor) 대공의 궁전, 비엔나 근교의 로싸우(Rossau)에 있는 요한 리히텐슈타인(Johann Liechtenstein) 공자의 궁전, 트리에스테에 있는 오스트로-헝가리 총독궁 등이며 그보다도 가장 중요한 작품은 슈투벤링(Stubenring)에 있는 응용예술박물관(MAK), 그리고 쇼텐링의 비엔나대학교이다. 응용예술박물관은 내부의 장엄한 아케이드로 유명하다. 비엔나대학교는 1871-84년의 13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폰 훼르스텔의 또 하나 업적은 1구에 있는 훼르스텔 궁전이다. 현재 카페 센트럴이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이다. 1866년 폰 훼르스텔은 폴리테크닉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871년에는 공공건물 총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871년 그는 남작(Freiherr)의 신분으로 격상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귀족의 호칭을 기술하는 관습은 다른 나라와는 약간 다르다. 예를 들어 Heinrich Ferstel이 귀족인 Freiherr의 작위를 받았다면 Heinrich Freiherr von Ferstel이라고 기술한다. 이처럼 이름에 v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할수 있으며 작위인 Freiherr는 이름 뒤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