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거장 건축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써(Friedensreich Hundertwasser)

정준극 2009. 5. 19. 05:02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써(Friedensreich Hundertwasser)

훈데르트바써하우스, 비엔나지역난방공장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써 

 

훈데르트바써는 오스트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현대 예술가이다. 그는 건축가이며 화가이고 조각가이며 행위예술가였다. 우리는 보통 그를 훈데르트바써라고 부르지만 그의 이름은 상당히 길다. 프리덴스라이히 레겐타크 둥켈분트 훈데르트바써(Friedensreich Regentag Dunkelbunt Hundertwasser)이다. 이것은 예명이고 본래 이름은 프리드리히 스토바써(Friedrich Stowasser)였다. 스토바써에서 스토(Sto)는 체코어로 1백을 말하며 바써는 그대로 물을 말한다. 그래서 체코 이름인 스토바써를 독일어 식으로 훈데르트바써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프리덴스라이히(Friedensreich)는 프리드리히를 변형한 이름이다. 평화의 왕국, 또는 평화스러움 그 자체를 뜻하는 말이다. 레겐타크(Regentag)는 글자그대로 ‘비오는 날’이며 둥겔분트(Dunkelbunt)는 어두운 여러 가지 색깔을 말한다.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써는 1928년 비엔나에서 태어나서 2000년에 향년 71세로 퀸 엘리자베스 2세 여객선을 타고 있다가 해상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뉴질랜드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뉴질랜드에 안장되었다.

 

훈데르트바써는 바로 이 배에서 2000년 2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뉴질랜드로 귀화했기 때문에 뉴질랜드 국민으로서 뉴질랜드에 안장되었다.

                                                            

1928년 12월 15일 비엔나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에곤 쉴레(Egon Schiele)의 영향을 받았으며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의 작품과 흡사한 유형을 보여주어 관심을 끌었다. 한편, 말년의 그의 작품은 스페인의 거장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의 작품과 비견된다는 평을 받았다. 훈데르트바써 작품의 특성은 직선을 거부한 것이다. 그는 직선을 ‘악마의 도구’라고 불렀다. 나선형을 선호했다. 그는 어두우면서도 화려하게 밝은 색을 선택하였으며 유기적(有機的) 형태의 디자인을 즐겨 사용했다. 그는 유기적 형태의 디자인을 인간과 자연의 화해, 또는 조화라고 불렀으며 강력한 개인주의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작품이든지 예술가의 견해보다는 관람자의 견해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주로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볼수 있는 무의식에 의한 자동기술법(Automatism)을  예술이론으로 삼았다.

  

 

비엔나의 훈데르트바써 하우스

                      

대담한 색깔로 그린 그의 초기 작품은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는 혁신적인 건축 디자인으로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건축에 자연적인 요소를 통합한 디자인을 하였으며 불규칙적인 형태를 추구하였다. 예를 들어 비엔나의 훈데르트바써하우스를 보면 알수 있다. 건물의 마루바닥은 평평한 것이 아니라 물결처럼 구불구불한 양상이다. 그는 ‘굴곡이 있는 마루바닥은 발에게는 멜로디’라고 말했다. 훈데르트바써하우스의 옥상에는 보통 땅처럼 흙을 깔았으며 더러는 잔디밭으로 만들었다. 집안에는 상당히 큰 나무 한그루가 벽을 뚫고 자라고 있으며 나무 가지는 창문을 통해 방안까지 뻗어 있다. 그래서 훈데르트바써하우스를 '인간과 자연과의 하모니로 만들어진 집'이라고 불렀다. 훈데르트바써는 비엔나의 훈데르트바써하우스를 설계할 때에 설계비를 한푼도 받지 않았다. 그는 당연히 할 일이었다고 말하며 보기 흉한 모습을 방지하는 일이어서 보람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슈피텔라우의 비엔나지역난방공장(쓰레기소각장)

                            

[훈데르트바써하우스](Hundertwasserhaus)

비엔나에는 볼 것이 너무 많지만 훈데르트바써하우스는 필견이다. 비에나에 가서 훈데르트바써하우스 또는 쿤스트하우스빈(KunstHausWien)을 보지 않고 간다면 후회한다. 비엔나에 훈데르트바써하우스가 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어쩌다보니 찾아가지 못했던 것은 아마 그 건물이 시내에서도 약간 외진 곳에 있기 때문에 다른 볼 것들에 정신을 팔다보니 깜빡했을 것이다. 훈데르트바써는 비엔나 사람이기 때문에 비엔나에서 그의 오리지널 작품을 본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비엔나에는 훈데르트바써가 남긴 건물이 크게 세 개가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건설한 훈데르트바써하우스, 전시장과 카페-식당이 있는 쿤스트하우스빈(박물관), 그리고 맘대로 방문할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지역난방공장(쓰레기소각장)이 있다. 지역난방공장은 도나우카날에 면하여 있기 때문에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멀리서나마 감상할수 있다. 훈데르트바써하우스는 요즘에는 '훈데르트바써-크라비나하우스'(Hundertwasser-KrawinaHaus)라고 부른다. 공동설계자인 요제프 크라비나(Josef Krawina)교수를 함께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요제프 크라비나 교수는 훈데르트바써하우스에 대한 이른바 저작권 소송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 이야기는 말미에 소개키로 한다.

 

훈데르트바써하우스는 테라스 루프가 특이하다

 

훈데르트바써하우스를 대중교통 수단으로 가는 방법은 몇가지가 있다. 우선 주소는 3구 란트슈트라쎄의 케겔가쎄(Kegelgasse) 34-38번지 및 뢰벤가쎄(Löwengasse) 41-43번지이다. 왜 주소가 둘이나 되느냐고 묻는다면 길모퉁이의 집은 대개 주소가 둘이라고 대답하는 바이다. 대체적으로 힐튼 호텔이 있는 빈 미테(Wien Mitte)에서 비엔나 카날(운하) 방향으로 있다고 보면 된다. 지하철 U1, 또는 U4를 타고 슈베덴플라츠(Schwedenplatz)까지 와서 여기에서 프라터 하우프트알레(Prater Hauptallee)로 가는 전차 1번을 타고 몇 정류장 가다가 헤츠가쎄(Hetzgasse)에서 내려서 약 100 미터 걸어가면 나온다. 그렇지 않으면 지하철 U3 또는 U4를 타고 빈 미테/란트슈트라쎄(Wien Mitter/Landstrasse)에 와서 전차 1번을 타고 가다가 헤츠가쎄에서 내리면 된다. 전차를 다시 타기가 귀찮으면 지하철 빈 미테/란트슈트라쎄에서 내려서 란트슈트라쎄 하우프트알레(Landstrasse Hauptallee)라고 적혀 있는 출구로 나간후 왼편으로 자이들가쎄(Seidlgasse)까지 가서 거기서 카겔가쎄 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나온다. 여담이지만, 리투아니아대사관을 지나서이다. 리투아니아(Lithuania)는 독일어로 리타우엔(Litauen)이라고 한다.

 

훈데르트바써하우스의 분수

 

훈데르트바써하우스라고 해서 무슨 대단한 궁전같은 건물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영화에 나오는 집처럼 생겼다. 구불구불한 선들이 그려져 있는 건물이다. 나무와 담장이 넝쿨로 뒤덮혀 있는 건물이다. 그것이 특이해서 보러 오는 것이다. 훈데르트바써하우스는 오스트리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훈데르트바써하우스는 기본적으로 아파트이다. 사람들이 세들어서 살고 있는 아파트이다. 모두 52개의 아파트가 있다. 여기에 사무실로서 사용하는 공간이 4게가 있다. 아파트에는 별도의 테라스가 있는 집이 있다. 모두 16개의 집이 별도의 테라스를 가지고 있다. 공동 테라스는 세 개가 있다. 나무가 많다. 세어 보았더니 250그루의 나무가 심어져 있다는 것이다.

 

1977년 11월 훈데르트바써는 당시 비엔나 시장이던 레오폴드 그라츠(Leopold Gratz)와 수상인 브루노 크라이스키에게 서한을 보내어 건축에 대한 자기의 아이디어를 실현할수 있도록 후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따라 정부와 비엔나시의 지원을 받아 현재의 훈데르트바써하우스가 아파트로서 건설될수 있었다. 그런데 부지를 선정하는데에 몇년이 걸렸다. 원래 훈데르트바써는 아파트를 지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당국은 아파트만 허락할수 있고 후원할수 있다고 했다. 훈데르트바써는 건축전문가라기 보다는 화가였다. 다만,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건축전문가인 요제프스 크라비나가 초청을 받아 참여하게 된 것이다. 훈데르트바써는 크라비나의 건축설계에 자기의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 1979년에 크라비나는 훈데르트바써에게 스티로폼으로 만든 예비 도면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크라비나의 설계는 직선을 사용한 것이었으며 각 층의 구성도 평면을 도입한 것이었다. 훈데르트바써는 곡선과 굴곡을 이용해야 한다는 아이디어였으므로 모처럼 크라비나가 마련한 설계를 거절하였다. 훈데르트바써는 테라스 하우스를 구상했었다. 옥상에 정원을 만드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크라비나는 훈데르트바써의 그와 같은 아이디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훈데르트바써는 비엔나 지방법원에 소원을 내고 자기의 이상을 실현할수 있도록 현재의 설계자인 크라비나를 교체해 달라고 요청했다. 크라비나는 손을 뗐고 대신 시청 소속의 건축가인 페터 펠리칸(Peter Pelikan)이 설계를 맡았다. 이후 페터 펠리칸은 훈데르트바써의 동료 및 친구로서 오래도록 함께 일했다. 건축부지가 현재의 장소로 정해진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항이다.

 

훈데르트바써하우스의 Facade

 

드디어 설계가 완성되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는 1983년에 시작하여 1985년에 끝났다. 훈데르트바써의

기본 아이디어 및 개념과 건축교수인 요제프스 크라비나의 기본설계, 그리고 건축가인 페터 펠리칸의 상세설계 및 건축으로 완성된 아파트였다. 그런의미에서 훈데르트바써와 크라비나는 동업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2001년에 비엔나의 건축설계회사인 메딘페아트리브스게젤샤프트(H.B. Medienvertriebsgesellschaft)는 가만히 있던 크라비나 교수를 격려하여서 훈데르트바써하우스의 공동창안자(Co-creator)로서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고 나섰다. 이듬해에 그 건축설계회사는 법원에 소송을 내고 크라비나의 권리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로부터 8년후인 2010년 3월, 오스트리아 대법원(Oberster Gerichthof)은 크라비나 교수를 훈데르트바써와 함께 훈데르트바써하우스의 공동창안자로서 인정하였다. 대법원의 판결에 따르면 훈데르트바써는 훈데르트바써하우스의 유일한 정신적인 창조자(Geistiger Schoephfer)이지만 크라비나도 훈데르트바써와 대등한 입장에서 공동창조자로서 인정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는 훈데르트바써재단이라는 비영리재단이 훈데르트바써하우스에 대한 사진, 도면, 모형물 들을 배포하는 권한을 가졌지만 대법원의 판결 이후로는 크라비나 교수의 사전 양해를 받지 않으면 그런 활동을 할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훈데르트바써재단이 영리와 관계되는 어떤 사업을 할 때에는(예를 들어 기념품 제작 등) 로열티를 크라비나에게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훈데르트바써하우스의 공식 명칭도 '훈데르트바써-크라비나하우스'로 부르게 되었다. 크라비나는 건축전문가가 아니라 재판전문가인지 그전에도 훈데르트바써박물관, 즉 쿤스트하우스빈의 운영과 관련하여 훈데르트바써하우스의 경우와 똑같은 소송을 내서 이긴 일이 있다.

 

훈데르트바써는 일반적인 표준 건축물은 예술이라고 할수 없다고 말하며 어떤 건물이든지 디자인은 입주자의 심미감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훈데르트바써는 행위예술가로서도 알려졌다. 어느 때 그는 생태계 친화적인 비수세식 화장실의 이용 증진을 위해 누드로 대중 앞에 나타난 일도 있었다. 그는 예술이든 건축이든 환경친화적이어야 하며 철학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훈데르트바써의 작품 세계는 일상생활, 그리고 자연 속에 들어 있다. 그는 깃발, 우표, 동전, 포스터의 디자인을 남겼으며 학교, 교회, 공중화장실 등도 설계했다. 그는 뉴질랜드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했다. 뉴질랜드의 카와카와(Kawakawa)에 있는 집의 화장실은 그가 생태계를 고려하여 비수세식으로 직접 설계한 것이다. 1999년 그는 독일 마그데부르크(Magdeburg)의 ‘녹색 도심 요새’(Die Gruene Zitadelle)의 설계에 착수했다. 도심에 새로운 녹색 요새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그는 ‘녹색 도심 요새’를 착수한 이듬해인 2000년 2월 19일, RMS Queen Elizabeth 2를 타고 태평양을 항해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그데부르크의 녹색 도심 요새는 2005년 10월 3일 오픈되었다. 훈데르트바써는 뉴질랜드의 카와카와에 매장되었다. 뉴질랜드는 황가레이(Whangarei)에 있는 의원회관을 훈데르트바써 아트 갤러리로 개장하였다. 그는 진실로 뉴질랜드를 고향으로 생각했다. 그는 세계의 어느 곳을 가던지 항상 뉴질랜드 시간으로 시계를 세팅했다. 그것이 뭐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훈데르트바써라는 특별한 예술가가 그렇게 했으므로 얘기꺼리가 되었던 것 같다.

 

훈데르트바써하우스

 

 

[쿤스트하우스빈](KunstHauseWien)

 

쿤수트하우스빈(KunstHausWien)은 훈데르트바써가 디자인한 건물로서 훈데르트바써의 작품들을 전시한 기념관(박물관)이다. 3구 운테레 봐이쓰거버슈트라쎄(Untere Weissgerberstrasse) 13번지에 있다. 슈베덴플라츠에서 프라터 하우프트알레(Prater Hauptallee) 방향으로 가는 전차 1번을 타고 라데츠키플라츠(Radetzkyplatz)에서 내려서 10분 정도 카날 쪽으로 걸어가면 찾을수 있다. 지하철을 타고 빈미테/란트슈트라쎄까지 와서 프라터슈테른(Praterstern) 방향으로 가는 전차 O번을 타고 라데츠키플라츠에서 내려 찾아가도 된다. 훈데르트바써의 작품을 상시전시하는 기념관으로서는 이곳이 세계에서 유일하다. 쿤스트하우스빈에서는 훈데르트바써의 작품만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적 화가들의 작품도 전시한다. 쿤스트하우스빈은 개인단체가 운영하고 있으며 정부로부터는 어떠한 재정지원도 받지 않는다. 쿤스트하우스빈은 1년에 약 18만명이 찾아오는 비엔나의 명소가 되었다.

 

전시장

                              

쿤스트하우스빈 건물은 원래 토넷(Thonet) 가구공장이 있었던 건물을 훈데르트바써가 직접 아이디어를 내어 대폭 개조한 건물로서 1989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91년 4월에 오픈하였다. 토넷가구회사는 비스트로의자(Bistro chair)를 창작하여 유명한 독일-오스트리아 가구제조가인 미하엘 토넷(1796-1871)이 세운 회사이다. 보수공사는 오스트리아의 은행인 BAWAG P.S.K.(Bank für Arbeit und Wirtschaft und Österreichische Postsparkasse Aktiengesellschaft)가 후원하였다. 토탈 전시면적은 4천 평방미터에 이른다. 4층건물로서 1층과 2층은 훈데르트바써 상설전시장이며 3층과 4층은 국제전시회를 여는 장소이다. 건물은 전형적인 훈데르트바써 스타일로 설계되었다. 기본적으로 직선을 사용하지 않고 곡선을 사용한 건물이다. 플로어에도 굴곡을 주었다. 색채는 전반적으로 작열하는 듯한 빛나는 것이다. 포이어에 분수가 있다. 쿤스트하우스빈은 기념품 상점도 명물이지만 그보다도 식당이 더 유명하다. 식당의 이름은 '둥켈분트'(Dunkelbund)이다. 어두운 색채라는 뜻이지만 실은 훈데르트바써의 중간 이름의 하나이다. 혹시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다시 소개하자면 훈데르트바써의 풀 네임은 프리덴스라이히 레겐타크 둥켈분트 훈데르트바써(Friedensreich Regentag Dunkelbunt Hundertwasser)이다. 바로 그 둥켈분트를 가져와서 식당이름을 지은 것이다. 식당은 마치 쇤부른 궁전의 겨울 정원처럼 열대수와 화초들로 장식되어 있다. 전시장은 자연채광을 위주로 하였다. 쿤스트하우스빈은 아파트인 훈데르트바써하우스로부터 500 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간김에 간다.

  

둥켈분트 식당

                           

2003년에 훈데르트바써의 동료인 요제프스 크라비나 교수(1928-)는 쿤스트하우스빈의 이사회를 상대로 소송을 내고 쿤스트하우스빈의 공동창조자로서 권리를 침해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크라비나 교수는 쿤스트하우스빈을 마치 훈데르트바써가 혼자서 아이디어를 내고 설계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은 자기와 공동으로 추진한 것이므로 공동창조자로서의 권리를 찾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쿤스트하우스빈이 어떤 수익을 냈을 때 자기 몫을 요구할수 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대법원(OGH)은 크라비나에게 호의적인 판결을 내리고 쿤스트하우스빈의 이사회에게 크라비나 교수와 협의하여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라고 명령했다. 명예가 문제인가, 돈이 문제인가 모르겠다.

 

비엔나의 쿤스트하우스빈(KunstHausWien). 전시장, 카페 및 식당(둔켈분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