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Anton Webern(안톤 베베른)

정준극 2009. 5. 28. 22:00

Anton Webern(안톤 베베른)

제2비엔나학파의 중추

 

 

안톤 폰 베베른. 그는 나중에 폰(von)이라는 글자를 이름에서 삭제했다.

                  

안톤 베베른은 작곡가이면서도 지휘자로 이름이 높았다. 베베른은 이른바 제2 비엔나학파의 멤버였다. 아놀트 쇤베르크의 제자로서 쇤베르크를 충실하게 추종했던 베베른은 12음기법의 옹호자였으며 그의 핏치, 리듬, 다이나믹스의 도식적인 조직에 관한 개혁은 훗날 음조 병렬주의(시리얼리즘)라고 알려진 새로운 음악기법으로 발전하였다. 베베른은 1883년 비엔나의 3구 란트슈트라쎄의 뢰벤가쎄(Löwengasse) 53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풀 네임은 안톤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베베른(Anton Friedrich Wilhelm von Webern)이었다. 그는 생전에 프리드리히 빌헬름이라는 중간 이름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귀족출신임을 뜻하는 von이라는 단어도 1918년, 1차 대전이 끝난후 새로운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의 지시에 따라 버렸다. 베베른은 비엔나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그라츠(Graz)와 클라겐푸르트(Klagenfurt)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1902년 비엔나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어 다시 비엔나로 돌아왔다. 비엔나대학교에서는 음악학을 전공했다.

 

 안톤 베베른이 어린 시절을 보낸 그라츠(사진은 시청)

 

베베른은 아놀드 쇤베르크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1908년 비엔나대학교 졸업작품은 파사칼리아(Passacaglia)였다. 베베른이 쇤베르크의 제자인 알반 베르크를 만난 것도 이때였다. 베르크를 만난 것은 베베른의 인생과 작품활동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비엔나대학교를 졸업한 베베른은 바드 이슐(Bad Ishl), 테플릿츠(Teplitz), 단지히(Danzig), 슈테틴(Stettin), 프라하 등지에서 지휘자 생활을 하다가 비엔나로 돌아왔다. 비엔나에 돌아온 베베른은 베르크와 함께 쇤베르크가 주도하고 있는 ‘개인 연주회협회’의 일을 도왔다. 그리고 1922년부터 1934년까지 비엔나노동자교향악단을 지휘했다.

  

안톤 폰 베베른의 생가인 비엔나 3구 뢰벤가쎄(Löwengasse) 53번지에 부착되어 있는 명판

                         

베베른의 음악은 나치에 의해 문화적 볼세비즘으로 비난을 받았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되기 전에 이미 독일에서 ‘퇴폐예술’(Degenerate Art)로 인정되어 연주가 금지되었다. 1933년에 베베른은 나치의 예술정책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그런 내용을 책자로 발간하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 책자는 발간하지 못했다. 만일 나치의 비난하는 책자까지 발간되었다면 베베른은 나중에 더 큰 곤욕을 치루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시작되자 베베른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히틀러를 찬양하였다. 베베른은 히틀러야말로 ‘특별한 인물’(Unique man)로 새로운 독일을 창조한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어쨌든 현대음악을 퇴폐음악으로 규정한 나치의 정책으로 베베른은 공식적인 활동을 할수 없게 되었고 먹고 살기 위해 유니버살출판사에서 교정과 편집 일을 하며 지냈다. 전쟁의 막바지에 그는 비엔나를 떠나 딸과 사위가 살고 있는 잘츠부르크 근교의 미터질(Mittersill)이란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시골에 있는 것이 비엔나에 있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안톤 베베른이 소년 시절을 보낸 클라겐푸르트 시내중심가

 

1945년 9월 15일, 연합군이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던 시대에, 베베른은 미터질의 집 앞에서 미국 군인이 쏜 총에 맞아 길거리에서 즉사했다. 당시 베베른의 사위는 잘츠부르크의 암시장에서 군수품을 암거래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날 밤, 미군 두어명이 암거래상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미터질까지 미행하여 왔었다. 베베른의 사위의 집 근처에 잠복하고 있던 미군은 있는 어떤 남자가 집에서 밖으로 나와 주머니에서 권총 같은 것을 꺼내어 쏘는것 같자 순간적으로 응사하였고 그로 인하여 그 남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던 것이다. 그 남자가 바로 베베른이었다.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있었으므로 야심한 밤에 거리에 서 있다는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그날 밤, 베베른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었는데 잠들어 있는 손주들을 방해하기가 싫어서 몰래 집 밖으로 나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순간에 잠복해 있던 미군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사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육군 취사병인 레이몬드 벨(RAymond Bell) 일등병은 아무 잘못도 없는 훌륭한 음악가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알콜 중독자가 되었다가 그로부터 10년 후에 폐인으로 세상을 떠났다.

 

안톤 베베른이 세상을 떠난 미터질(Mittersill) 마을

 

베베른은 다른 작곡가들처럼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의 생전에 정식으로 출판된 작품은 모두 31곡이다. 지휘자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가 베베른의 작품번호가 없는 작품까지 전부 취입했을 때 CD 여섯 장으로 충분했다. 비록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전후 아방 갸르드에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사용한 그의 작품들은 나중에 루이지 노노(Luigi Nono), 프랭크 차파(Frank Zappa), 칼하인츠 슈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등의 작품에 영향을 준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오랜 작곡가의 경력을 가진 사람들의 작품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한다. 비록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베베른의 작품들도 기간에 따라 변화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마치 스파트타 훈련을 받은 것처럼 강인한 절도가 있다. 다시 말하여 모든 음표는 하나하나 분명하게 연주토록 되어 있으며 서로 다른 음색의 악기들도 대단히 신중하게 선정되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연주자들에게는 세세한 부분까지 지시가 되어 있어서 연주자들은 기량을 다하여 연주할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간결했다. 예를 들어 1931년에 내놓은 여섯 편의 바가텔레(Bagatelles)는 연주시간이 3분을 넘지 않는다.

 

비엔나의 3구 비엔나음악대학(비엔나음악공연예술대학)의 앞 광장이 안톤 베베른 광장(Anton-von-Webern-Platz)이다.

                       

베베른의 초기 작품들은 어떤 경우에 후기 낭만주의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작품들은 그의 생전에 출판되거나 연주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톤 포임(Tone Poem: 음조시)으로 현악4중주인 ‘여름바람’(1904) 또는 ‘느린 도약’(1905)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간혹 연주되기도 한다. 베베른은 한동안 자유스러운 무조(無調)작품을 썼다. 쇤베르크의 초기 무조작품과 형식에 있어서 거의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세편의 정신적인 민요’(Drei Geistliche Volkslieder: 1925)부터는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1927년의 현악사중주곡은 12음 기법을 이용한 최초의 순수 기악곡으로 처음으로 전통적인 음악형태를 벗어던진 것이다.  

 

피아노 앞에서의 안톤 베베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