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Arnold Schoenberg(아놀트 쇤베르크)

정준극 2009. 5. 28. 22:02

Arnold Schoenberg(아놀트 쇤베르크) - 아놀드 쇤버그

12음기법의 창시자

 

 

 

이른바 제2 비엔나학파의 주도적 인물인 아놀트 쇤베르크는 독일어 시와 독일 예술의 표현주의를 지향한 작곡가이다. 그는 1874년 비엔나 2구에 있는 오베레 도나우슈트라쎄(Obere Donaustrasse) 5번지에서 태어나 비엔나에서 자라고 공부하고 음악활동을 시작했으나 나치의 유태인에 대한 핍박을 피하여 1934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생을 마칠 때까지 미국의 작곡가로 활동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이름을 Schönberg라고 표기했으나 미국으로 간 후에는 Schoenberg라고 표기하였다. 쇤베르크는 브람스와 바그너의 독일 낭만적 전통을 이어나갔으며 한편 그가 선구적으로 개혁한 무조음악도 진지하게 확장하여 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무조음악은 오스트리아에서 나치가 기승을 부리는 기간에 재즈와 스윙과 함께 퇴폐음악으로 규정되는 수난을 당했다.

  

쇤베르크가 태어난 비엔나 2구 레오폴드슈타트의 거리 

 

쇤베르크는 유명한 12음 기법을 처음으로 개발하였다. 그는 또한 ‘발전하는 변화’라는 용어를 고안해 냈다. 쇤베르크는 예술적 재능이 다대하여 화가로서도 인정을 받았으며 음악이론에 있어서도 당대에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가하면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 교수이기도 했다. 그의 제자로서는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등이 있으며 나중에는 존 케이지(John Cage)도 그에게서 배웠다. 쇤베르크의 수많은 이론과 주장은 비엔나에 있는 ‘아놀트 쇤베르크 센터’에 정리, 보관되어 있다.

 

쇤베르크는 레오폴드슈타트의 아슈케나지(Ashkenazi)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슈케나지(복수는 아슈케나짐)는 히브리어로 독일인을 뜻한다. 독일의 라인란트와 인접 프랑스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13세기에 십자군전쟁이 끝나자 폴란드, 리투아니아,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러다가 17세기에 동유럽에서도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수많은 유태인들은 남부여대하여 서유럽에 가서 이미 정착해 있던 유태인 공동체와 동화했다. 이들을 아슈케나짐이라고 부른다. 쇤베르크는 서유럽에 동화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다. 레오폴드슈타트는 초기에 유태인 게토로 조성된 도시이다. 쇤베르크의 어머니 파울린(Pauline)은 폴란드 토박이로 피아노교사였다. 아버지 사무엘(Samuel)은 브라티슬라바에서 태어났으며 레오폴드슈타트의 어떤 상점에 종사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쇤베르크는 음악이론과 작곡기본을 대체로 독학하여 마스터했다. 피아노는 어머니로부터 배웠다. 나중에 대위법에 대한 것은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알렉산더 쳄린스키로부터 배웠다. 나중에 쇤베르크는 쳄린스키의 여동생 마틸데(Mathilde)와 결혼하여 쳄린스키와 처난매부지간이 되었으나 마틸데에게 문제가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1948년의 쇤베르크

                     

20대의 청년이 된 쇤베르크는 주로 오페레타의 오케스트라 파트를 편곡해 주는 일을 하면서 생활했다. 그러면서 작곡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시절에 나온 작품중 대표적인 것은 현악6중주인 ‘변화의 밤’(Verklärte Nacht)이다. 쇤베르크는 훗날 ‘변화의 밤’에 대한 오케스트라 버전을 만들었으며 이 곡은 그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중 하나가 되었다. 구스타브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쇤베르크의 작곡적 재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쇤베르크의 구레리더(Gurre-Lieder)라는 가곡과 다른 작품들을 들어본 슈트라우스는 놀랍다고 말했다. 말러는 쇤베르크의 후견인이 되어 계속 지도편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말러는 자기가 세상을 떠난후에 누가 쇤베르크를 돌보아 주어야할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말러는 쇤베르크의 후기 작품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쇤베르크를 아껴주었다. 반면, 쇤베르크는 처음에 말러의 음악을 경멸하고 조소했다. 하지만 말러의 교향곡 제3번을 듣고 나서부터 말러를 누구보다도 존경했다. 쇤베르크의 말러의 교향곡 3번을 천재가 아니면 작곡할수 없는 작품이라며 극찬을 했다. 아무튼 그로부터 쇤베르크는 말러를 ‘성자’(Saint)라고 부르면 경외했다. 쇤베르크는 유태인 배경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8년 루터교로 개종하여 1933년 나치가 득세할 때까지 루터교인으로 남아 있었다.

 

오페라 '모세와 아론'의 한 장면. 현대적 연출.

 

1908년 여름, 쇤베르크가 31세 때에 부인 마틸데가 리하르트 게르스틀(Richard Gerstl)이라고 하는 젊은 오스트리아 화가와 눈이 맞아 몇 달 동안 가출한 일이 있었다. 몇 달후 마틸데가 아이들 때문에 집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며 젊은 화가에게 결별을 선언하자 그 청년 화가는 낙심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쇤베르크도 많은 심적 타격을 받았다. 쇤베르크는 마틸데를 받아 들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쇤베르크의 작품에는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쇤베르크는 부인 마틸데가 집을 나간 기간에 독일의 신비스런 시인인 슈테판 게오르게(Stephan George)의 ‘공중누각서’(Das Buch der Hängenden Gärten)를 바탕으로 13편의 노래를 작곡했다. 마지막 13번째 노래는 ‘은빛 버드나무에 기댄 그대’(Du lehnest wider eine Silberweide)라는 타이틀이었다. 자기를 버리고 집을 나간 마틸데를 생각하는 곡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쇤베르크가 처음으로 조성(調性)을 고려하지 않고 작곡한 작품이라는데에 의의가 있는 곡이다. 1910년 여름에 쇤베르크는 ‘화음이론’(Harmonielehre)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훌륭한 음악이론서로 인정을 받고 있다.

 

오페라 '에어봐르퉁'(기다림)의 한 장면(제씨 노만)

 

1차 대전은 쇤베르크에게 여러 가지 변화를 안겨준 것이었다. 그의 생활은 군대에 복무를 하는 일 때문에 간섭을 받았다. 사실 그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유별나게 여러 사정들이 많이 생겨서 하던 일을 계속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의 작품 중에는 미완성이 많으며 어떤 것은 시작만 해놓고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한 것도 많다. 어쨌든 그는 42세 때에 군에 입대하였다. 어느날 상관 한명이 그에게 ‘혹시 문제가 많은 인간으로 소문난 쇤베르크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쇤베르크는 ‘보고 드립니다. 압니다. 바로 접니다. 아무도 문제가 많은 악역을 맡지 않으려 합니다. 누군가는 그런 역할도 맡아야 하기 때문에 제가 맡기로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쇤베르크는 현대 음악 작곡방법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12음 기법(Dodecaphic: 12-Tone)을 개발하였다. 프랑스와 미국에서는 이를 시리얼리즘(Serialism: 병렬주의)라고 불렀다. 쇤베르크의 제자들은 12음 기법을 많이 이용하였다. 이러한 쇤베르크의 제자들을 제2비엔나학파라고 불렀다. 안톤 베베른, 알반 베르크,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등이 쇤베르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1924년 베를린 소재의 프러시아예술아카데미에서 마스터 클라스를 운영하던 작곡가 페루치오 부소니(Ferrucio Busoni)가 세상을 떠나자 쇤베르크가 차기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쇤베르크는 건강상의 이유로 1926년에 가서야 직책을 수행할수 있었다. 프러시아예술아카데미에서 쇤베르크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 중에는 로베르토 게르하르트(Roberto Gerhard), 니코스 스칼코타스(Nikos Skalkottas), 요셉 루퍼(Josef Rufer) 등이 뛰어났다. 쇤베르크는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할 때까지 프러시아예술아카데미에 재직했었다. 히틀러와 나치가 집권하자 쇤베르크는 당장 해고되었고 강제추방 당했다. 그는 파리로 이민을 갔다. 이곳에서 그는 유태교 신앙을 다시 갖게 되었고 얼마후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처음 교수직을 맡은 곳은 보스턴의 멀킨음악원(Malkin Conservatory)이었다. 얼마후 그는 캘리포니아의 UCLA와 남가주대학교의 초청을 받았다. 훗날 두 대학교는 대학교 안에 쇤베르크기념관을 설립하여 그가 재직했던 것을 기념하였다. 로스안젤레스 인근의 브렌트우드 파크(Brentwood Park)에 정착한 그는 동료 작곡가인 조지 거슈인(George Gershwin)과 가깝게 지냈다. 거슈인은 쇤베르크의 테니스 파트너이기도 했다. 쇤베르크는 UCLA에서 교편을 잡은후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유명한 영화음악 작곡가인 레오나드 로센만(Leonard Rosenman)은 당시 UCLA에서 쇤베르크의 가르침을 받았다.

 

오페라 '모세와 아론'에서 모세(베이스 기아우로프)

 

쇤베르크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생의 마지막 기간을 보내면서 여러 중요한 작품들을 썼다. 그중에는 연주하기가 어렵기로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콜 니드라이: op 39: 1934-36)과 ‘나폴레옹 송가’(Ode to Napoleon Bonaparte: op 41: 1942), 유령이 나올것 같은 피아노협주곡(op 42: 1942), 그리고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추모하는 곡인 ‘바르샤바의 생존자’(A Survivor from Warsaw: op 46: 1947)등이 있다. 쇤베르크는 오페라의 작곡도 시도했으나 ‘모세와 아론’(Moses und Aron: 1932-33)은 완성하지 못했다. ‘모세와 아론’은 12음 기법을 이용한 최초의 오페라라고 할수 있다. 1941년, 그는 마침내 미국으로 귀화하여 미국시민이 되었다. 생의 마지막 기간에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작곡가로서는 존 케이지(John Cage), 루 해리슨(Lou Harrison), 오웬 리드(Owen Reed) 등이 있다. 쇤베르크는 1951년 로스안젤레스의 자택에서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7이라는 숫자를 좋아하였다. 하지만 13에 대하여는 극도로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에 있는 쇤베르크 묘비

 

13이라는 숫자를 기피하는 것을 학문적으로 트리스카이데카포비아(Triskaidekaphobia)라고 하며 중세로부터 퍼져 있던 일종의 미신이었다. 쇤베르크가 13을 기피하는 증세를 보인 것은 1908년경부터라고 볼수 있다. 그해에 그는 ‘공중정원서’에 의한 13개의 연가곡을 작곡했다. 그때에 쇤베르크는 가정적으로 부인이 다른 남자와 살기 위해 집을 나가는 등 대단한 어려움을 겪었다. 오페라 ‘모세와 아론’의 원래 스펠은Moses und Aaron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쓰면 알파벳의 수효가 13이 된다는 깨닫고 Moses und Aron으로 고쳤다. 이처럼 쇤베르크는 미신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 때문에 수명에 영향을 받은 일도 많았다. 쇤베르크의 친구에 의하면 쇤베르크는 13의 배수가 되는 해에 죽을 것이라는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쇤베르크는 65세가 되는 해를 대단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65는 13의 5배수가 되는 숫자이다. 쇤베르크의 친구는 쇤베르크를 안심시키기 위해 잘 아는 점성술사를 데려다가 65세가 되는 생일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명토록 했다. 실제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몇 년후 그 점성술사가 쇤베르크에게 편지를 보내어 1950년, 쇤베르크가 76세가 되는 생일은 위험하다는 경고를 보냈다는 것이다. 76은 7+6=13이 된다. 너무나 놀란 쇤베르크는 1950년부터 나이를 세지 않기로 했다. 즉, 75세로서 계속 머물러 있도록 한 것이다. 쇤베르크는 1951년 7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쇤베르크의 손자인 랜돌 쇤베르크(Randol Schoenberg)는 유명한 변호사가 되었다. 랜돌 쇤베르크의 딸인 누리아 도로테아(Nuria Dorothea)는 1955년 동료 작곡가인 루이지 노노(Luigi Nono)와 결혼했다. 쇤베르크는 훌륭한 화가이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프란츠 마크(Franz Marc)와 와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어도 손색이 없었다.

 

쇤베르크가 태어난 건물에 부착되어 있는 명판. 비엔나 2구 레오폴드슈타트의 오베레 도나우슈트라씨 5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