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mund Samuel Eysler(에드문트 사무엘 아이슬러)
비엔나 오페레타의 거장
에드문트 사무엘 아이슬러는 1874년 비엔나의 텔레만가쎄(Thelemanngasse)에서 장사를 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공과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레오 팔(Leo Fall)을 만나고 나서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비엔나음악원(Vienna Conservatorium)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로베르트 푹스(Robert Fuchs)의 지도아래 작곡을 공부했다. 졸업후 그는 피아노 교사와 합창지휘자가 되었다. 그후 그는 피아노곡과 실내악, 그리고 오페라 ‘졸하우크의 축제’(Fest auf Solhaug)와 발레곡인 ‘슐라라펜란트(Schlaraffenland)를 작곡했다.
비엔나 헤르날스의 텔레만가쎄 8번지 에드문트 아이슬러의 생가의 기념 명판
아이슬러는 어떤 권세있는 사람의 소개로 대본가인 이그나즈 슈니처(Ignaz Schnitzer)를 만났다. 슈니처는 ‘집시남작’(집시 왕)이라는 극본을 완성해야 할 입장이었다. 슈니처는 아이슬러에게 ‘집시남작’의 대본이 완성되면 ‘마녀의 거울’(Der Hexenspiegel)이라는 제목으로 오페라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오페라 ‘마녀의 거울’은 비엔나 시민극장에서 공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극장 감독이 이런 저런 트집을 잡아서 무대에 올리지 못했다. 아이슬러는 ‘마녀의 거울’의 음악을 오페레타 스타일로 바꾸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슈트라우빙거 형제’(Bruder Straubinger)였다. 이 오페레타는 1903년 2월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유명한 배우 겸 성악가인 알렉산더 기라르디(Alexander Girardi)가 주역을 맡았다. 아이슬러는 오페레타 작곡가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에드문트 아이슬러의 작곡 스승인 로베르트 푹스
아이슬러는 ‘죽지 않는 진드기’(Der unsterbliche Lump)라는 오페레타를 작곡하였다. 1910년 시민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평론가들은 아이슬러의 오페레타가 오페레타라는 장르에서 새로운 변화를 제시해 준것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이슬러는 시민극장의 상임작곡가로 남게 되었다. 이듬해에 초연된 새로운 오페레타 ‘여자 대식가’(Der Frauenfresser)도 환영을 받았다. 1913년에 발표한 ‘웃는 신랑’(Der lachende Ehemann)도 대성공이었다. 특히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멜로디가 사랑을 받았다. ‘웃는 신랑’은 하도 인기를 끌어서 1921년까지 8년 동안 1793회의 연속 공연을 가졌다. 1차대전 중에도 비엔나 시민극장에서는 아이슬러의 오페레타가 시즌마다 공연되었다. 예를 들면 ‘라인의 봄’(Fruhling am Rhein), ‘이것 아니면 아무것도’(Dei - oder Kaine!), ‘어두운 보물’(Der dunkle Schatz) 등이었다. 1차 대전이 거의 끝날 즈음에 아이슬러는 또 하나의 힛트작을 내놓았다. ‘황금 아가씨’(Die gold'ne Meisterin)였다. 비엔나에서 어찌나 인기가 있었던지 사람들은 전쟁의 두려움마저도 잊을 정도였다.
아이슬러는 유태계였다. 나치가 득세하자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히틀러는 자기가 좋아하는 오페레타인 ‘황금 아가씨’가 유태인이 작곡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공연을 금지시켰다. 아이슬러는 프랑스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대신 친구들의 도움으로 비엔나에서 숨어 지낼수 있었다. 아이슬러는 비엔나의 명예시민증을 받았는데 그것도 도움이 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난후 아이슬러는 마지막 성공작인 ‘비엔나 음악’(Wiener Musik)이라는 오페레타를 내놓았다. 1947년 12월 22일에 시민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비엔나 시민들은 아이슬러를 잊지 않고 있었다. 1949년 3월 12일, 아이슬러의 75회 생일을 맞이하여 비엔나시는 그에게 명예반지를 증정했고 그의 생가인 탈레만가쎄의 집에는 기념명판을 부착하였다. 탈레만가쎄의 아이슬러 생가에는 원래 기념명판이 붙어 있었으나 나치가 제거했었다. 아이슬러는 그해 10월 4일에 극장의 무대에 올라갔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에 안장되었다. 아이슬러는 약 60편의 오페레타를 작곡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는 명성을 얻지 못했다. 왜냐하면 비엔나 사람들을 대상으로한 오페레타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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