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화가와 조각가

프리드리히 가우어만(Friedrich Gauermann)

정준극 2009. 7. 16. 21:18

프리드리히 가우어만(Friedrich Gauermann)

비엔나풍의 풍경화 완성

 

 

비엔나 스타일의 풍경화를 완성한 프리드리히 가우어만의 본명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마티아스 가우어만(Friedrich August Matthias Gauermann)이다. 1807년 남부오스트리아의 미젠바흐(Miesenbach)에서 태어나 1862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의 화가이다. 그의 아버지 야콥 가우어만(Jakob Gauermann: 1772-1843) 역시 화가이며 유화 이외에도 소묘와 동판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인물이다. 프리드리히 가우어만에게는 형 칼(Carl)이 있었다. 아버지는 두 형제를 모두 화가로 양육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동생 프리드리히가 더욱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다구나 형 칼은 2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15세 때에 비엔나응용예술아카데미에 입학하였다. 5년후 졸업한 그는 2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두루 살펴보기로 결심하고 여행을 떠났다. 그는 슈타이어마르크(Steiermark), 잘츠부르크, 티롤 등지를 여행하며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실제로 그는 학생시절에도 여행을 자주 다녔다. 잘츠카머구트, 드레스덴, 뮌헨, 그리고 베니스까지 다녀왔다.

 

가우어만은 3월 혁명 이전 시대의 사람으로서 네스트로이, 라이문트와 같은 비엔나의 예술인들과 함께 어울리며 지냈다. 그러다가 1848년 고향인 미젠바흐로 돌아갔다. 고향에서 15년 이상을 지내던 그는 1861년 다시 비엔나로 올라와 예술가협회(Künstlerhaus)의 멤버로서 활동했다. 그는 이듬해인 1862년 현재의 링케 비엔차일레(Linke Wienzeile) 4번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고향인 마젠바흐에 안장되었다.

 

가우어만은 비더마이어 시대의 풍경화가였다. 그의 화풍은 초기 홀란드 화가들의 스타일을 닮았다. 그러나 홀란드 화풍과는 다른 비엔나 스타일이 있었다. 이를 비엔나 풍경자연주의(Wiener Landschaftsnaturalismus)라고 불렀다. 그의 작품은 자연적인 빛과 색조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의 주제는 주로 숲과 산과 동물들이었다. 당시 비엔나의 귀족사회는 이같은 주제의 작품들을 크게 선호하였다. 그는 메테르니히, 슈봐르첸버그, 리히텐슈타인과 같은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다. 그의 작품들은 상당수가 벨베데레의 20세기 오스트리아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죽은 사슴을 뜯어먹고 있는 독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