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시인과 작가

페터 알텐버그(Peter Altenberg)

정준극 2009. 6. 24. 23:47

페터 알텐버그(Peter Altenberg)

보헤미안 중의 보헤미안

 

비엔나의 1구 프라이융(Freyung)에 있는 팔레 페르스텔의 카페 센트랄(Cafe Central)에 들어서면 입구에서 가까운 곳의 탁자에 대머리에 무성한 콧수염을 기른 어떤 중년 신사가 무심코 앉아 있는 모습을 볼수 있다. 카페 센트랄에 처음 간 이방인이면 얼핏 진짜 사람이 앉아 있는줄 알고 머뭇거리지만 이내 모형인 것을 알고 누구인지 궁금해 한다. 시인 페터 알텐버그이다. 비엔나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페터 알텐버그이다. 페터 알텐버그는 비엔나의 초기 모더니즘을 창조한 사람이다. 그는 1859년 3월 9일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리하르트 엥글랜더(Richard Engländer)이며 페터 알텐버그는 필명이다. 알텐버그는 그가 한때 사랑했던 베르타 레처(Berta Lecher)라는 아가씨의 집이 있는 도나우 연안의 있는 작은 마을인 알텐버그 안 데어 도나우(Altenberg an der Donau)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페터라는 이름은 그가 사랑했던 베르타 레허를 애칭으로 부르는 이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오스트리아에서도 시골이건 도시이건 여자 아이에게 남자 이름을 붙여주는 경우가 많다. 그 소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남자 이름인 페터라고 불렀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는 그 소녀와의 순진한 사랑을 잊지 못하여 페터라는 그 소녀의 애칭을 자기의 정식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알텐버그 안 데어 도나우(Altenberg an der Donau)는 오늘날 장크트 안드레 뵈르데른(St Andra-Wordern)에 속한 지역이다.

 

카페 센트랄에서는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언제나 할일 없는 사람처럼 앉아 있는 페터 알테버그를 우선 볼수 있다.

카페 센트랄에 앉아서 신문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평상시를 보내고 있는 페터 알텐버그의 사진.

 

알텐버그는 중산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모리츠 엥글랜더는 상인이었다. 알텐버그는 처음에 법학을 공부코자했으나 취미를 붙이지 못했다. 그 후엔 의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그것도 중도에서 집어 치우고 결국 대학을 중퇴하였다. 문학에 뜻을 둔 청년으로서 진실로 보헤미안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전통적인 유태인 가정의 틀에서 벗어나 독립하여 집시와 같은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결혼도 하지 않았다. 연애도 별로 열심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 특히 젊은 여성 예찬자였으며 흠모자였다. 젊은 여성을 예찬하다보니 그는 마치 여자처럼 행동하며 다니기를 좋아했다. 글씨도 여자처럼 썼다. 하지만 외양은 특이했다. 큰 망토를 걸치고 샌들을 신었으며 테가 넓은 모자를 쓰고 다녔다. 멀리서도 그가 사뿐사뿐, 또는 터벅터벅 걸어오는 것을 알아차릴수 있었다. 그는 여성 예찬자였기 때문인지 오늘날의 아놀드 슈봐르츠네거, 또는 종전의 존 웨인과 같은 마쵸(Macho) 스타일의 남성들을 경멸하였다.


페터 알텐버그의 생가가 있었던 2구 페르디난트슈트라쎄의 건물에 설치되어 있는 기념명판. 이 장소에서 1859년 3월 9일 태어났다는 설명이다.

                 

세기말에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는 현대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때에 그는 ‘젊은 비엔나’(Jung Wien: Young Vienna: 융 빈)라고 하는 문학예술운동에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알텐버그는 칼 크라우스(Karl Kraus), 구스타브 말러, 아르투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구스타브 클림트, 아돌프 로스(Adolf Loos)등과 같은 젊은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지냈다. 물론 알텐버그가 이들보다 연배가 많았지만 같은 시대에서 같은 취향으로 행동하였기에 동료 이상이었다. 알텐버그는 시인이었지만 단편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주로 시를 썼지만 산문과 수필도 즐겨 썼다.

  

융 비엔(젊은 비엔나) 운동을 함께 했던 건축가 아돌프 로스와 함께

 

알텐버그는 취미가 고상해서 그런지 아무튼 매일 카페에 앉아서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여인들과 어린이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소감을 적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나중에 그는 그 소감문을 단편집으로 발간했다. 그로부터 페터 알텐버그라는 이름은 비엔나에서 괴짜 시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주로 주점이나 커피하우스에 죽치고 앉아서 글을 썼다. 캬바레시인 또는 커피하우스시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가 가장 자주 드나들었던 커피하우스는 앞에서도 말했던 카페 센트랄이었다. 하도 단골이었기 때문에 알텐버그에게 편지를 보내려면 카페 센트랄로 보내면 배달되었다. 알텐버그를 공연히 비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반유태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알텐버그가 알콜중독자이며 정신질환이 있다는 식으로 소문을 퍼뜨렸다. 그렇지만 알텐버그를 숭배하는 사람들도 더 많았다. 알텐버그의 팬들은 높은 심미안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자연과 젊은 아가씨들을 사랑하는 알텐버그를 대단히 창조적인 인물이라고 찬양하며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알테버그는 젊은 여자들을 무조건적으로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예쁘고 귀여운 젊은 아가씨들의 사진을 무척 많이 수집하였다. 그리고 자기를 알아주는 아가씨들을 위해 글을 썼다. 예를 들면 출판사집 딸이었다. 물론 출판사집 딸은 다른 사람과 결혼하였다.


페터 알텐버그가 수집한 예쁜 여인들 사진 중의 하나. 릴리 버거라고 적혀 있지만 진짜 이름은 아니고 페터 알텐버그가 지어서 붙인 이름이 분명하다. Beaute est vertue 라는 문구도 적혀 있고 PA라는 이니셜을 썼다. 이 사진은 비엔나시립박물관이 알텐버그가 1919년 세상 떠날 때까지 묵었던 그라벤 호텔의 방에서 수집한 것이다. 이 사진을 비롯해서 다른 사진들과 기타 알텐버그의 물건들은 현재 칼스플라츠에 있는 비엔나박물관이 메모라빌리아라는 프로그램으로 소장하고 있다.

 

알텐버그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예술가들과는 거리가 먼 작가였다. 돈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명성 하나만으로 만족하며 살았다. 그는 그림엽서나 카페의 컵받침(코스터)과 같은 종이에 마치 격언이나 경구와 같은 글을 쓰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쓴 글들은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작곡가 알반 베르크는 그런 위트 있는 격언들을 가사로 삼아 노래를 작곡하였다. 1913년 3월 31일 알반 베르크는 ‘페터 알텐버그의 그림엽서 글에 붙이는 다섯 노래’를 작곡하여 비엔나 악우회에서 초연하였다. 일반적으로는 '알텐버그 리트'(Altenberg Lied)라고 불리는 노래였다. 모두 다섯 곡이었지만 초연에서는 2번과 3번만이 연주되었다. 오케스트라는 베르크의 스승인 아놀트 쇤베르크가 지휘했다. 연주회장은 그 노래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쓴 글 중에는 알 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사회저명 인사적인 사람들에게 보내는 냉소적인 비판도 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 글을 가사로 삼은 노래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결국 연주회는 큰 소동으로 변하였다. 연주회는 중단되었고 다시 열리지 않았다. 훗날 사람들은 그 연주회를 스칸달콘체르트(Skandalkonzert)라고 불렀다. 알텐버그의 글에 의한 베르크의 노래곡이 모두 연주된 것은 한참 후인 1952년이었다. 다섯 곡은 다음과 같다.


1. 영혼, 그대는 얼마나 더 아름다운가(Seele, wie bist du schoner)

2. 폭풍우가 지난간 후의 숲을 보았는가(Sahst du nach dem Gewitteregen den Wald?)

3. 우주의 경계를 넘어서(Uber die Grenzen des Alls)

4.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Nichts ist gekomment)

5. 여기에 평화가 있도다(Hier ist Friede)


알텐버그는 다른 일반적인 문인이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항상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친구를 사귀고 후원자를 발굴하여 자기의 밥값, 샴페인값, 심지어 집세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대신 내주도록 만드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알텐버그는 그런 친구들의 후의에 위트 있는 글로서 보답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보헤미안 중의 보헤미안’이라고 혀를 차면서도 결코 미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그를 아꼈다. 알텐버그의 작품은 독일어로 출판되었다. 영어로 번역된 선집(選集)은 거의 없다. 그래서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알텐버그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그의 날카로운 위트와 풍자에 넘쳐 있는 글을 맛보지 못하고 있다. 현재까지 영어로 번역된 선집은 Evocations of Love(1960: 사랑의 회상)과 Telegrams of the Soul: Selected Prose of Peter Altenberg(영혼의 전보: 피터 알텐버그 산문선집)이다. 알텐버그는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살다가 1919년, 우리나라에서 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나던 해의 1월 8일에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9세였다. 그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예술가묘역에 안장되었다.

 

한두가지 알텐버그의 격언과 같은 글을 소개한다.

- 예술은 삶이다. 삶은 삶이다. 그러나 삶을 예술적으로 사는 것은 삶의 예술이다. (Art is life, life is life, but to lead life artistically is the art of life.)

- 관중: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다.(Spectators: people who are interested in something they are not interested in at all.)

- 행복한 부부: 남편은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준다. 아내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한다.(A happy couple: he does what she wants and she does what she wants.)

- 누드에는 점잖지 못한 점이 하나 있다. 누드가 점잖지 못하다는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다.(There is only one thing indecent with nekedness, and that is to find nakedness indecent.)

   

카페 센트랄의 페터 알텐버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