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아메리(Jean Amery)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장 아메리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고 하면 죽음의 지옥에 끌려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가 살아났다면 그건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 아메리(Jean Améry: 구명 한스 마이어: 1912-1978)는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가 살아남은 몇 안되는 유태인중의 하나였다. 그의 작품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것들이었다. 비엔나에서 유태인 아버지와 가톨릭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메리는 비엔나대학교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던 학생이었으나 나치의 핍박을 피해 벨기에로 가서 지하저항운동에 참여하다가 체포되어 게슈타포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은후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Buchenwald) 강제수용소에서 몇 년을 지내다가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극적으로 살아남은 오스트리아의 수필가이다. 그의 대표작인 At the Mind's Limits: Contemplations by a Survivor on Auschwitz and Its Realities(정신의 한계: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관점과 현실)로서 그는 이 작품에서 독일 제3제국의 엣센스는 고문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주요 작품으로는 on Aging and on Suicide: A Discourse on Voluntary Death(나이 드는 것과 자살에 대하여: 자발적 죽음에 대한 고찰)이 있다.
그의 원래 이름은 한스 마이어(Hans Mayer)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4살 때에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따라서 그는 가톨릭인 어머니의 손에서 가톨릭으로 성장했다. 그는 비엔나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경제적 사정 등으로 중퇴해야 했다. 아버지가 없이 살아야 했던 아메리의 가족은 비엔나의 전통적인 유태인 사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오히려 비엔나의 가톨릭 사회에 적응하여 살았다. 그러나 나치의 입장에서 보면 아메리는 역시 유태인이었다. 아메리는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반나치이다. 내 자신이 그렇게 결정했다. 나치가 반유태주의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나치가 싫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935년의 ‘뉘른베르크법’은 결국 모든 유태인들을 죽음으로 내몰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메리는 죽음이라는 것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어야 했다. 유태인으로 죽음을 택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가톨릭으로서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그의 저서인 The Necessity and Impossibility of Being a Jew(유태인이 되어야 하는 필요성과 불가능성)은 그의 존재에 대한 내적 갈등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톨릭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유태인으로서 ‘여호와가 없으면 역사도 없고 역사가 없으면 메시아를 기다리는 민족적 희망도 없다’고 느꼈다. 아메리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태 여인과 결혼하였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함으로서 오스트리아라는 유구한 역사의 나라는 없어지고 독일 제3제국의 일원이 되자 아메리는 유태인 부인과 함께 프랑스로 도피하였다. 이어 그는 벨기에로 갔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치에 협조하는 벨기에가 그를 프랑스로 강제 추방하였고 프랑스는 그를 유태인이기 때문에 체포하였다. 아메리는 프랑스의 귀르(Gurs)수용소에 구금되었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할수 있었다. 그는 벨기에로 다시 잠입하여 벨기에의 지하저항운동에 합류하였다. 1942년, 그는 벨기에에서 독일 점령군을 반대하는 전단을 배포하다가 나치에게 체포되어 포트 브린동크(Fort Breendonck)에 있는 게슈타포 본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게슈타포는 아메리에게 심한 고문을 했지만 특별한 정보를 꺼내지 못하자 아메리의 등급을 정치범에서 한단계 낮추어 아우슈비츠로 보냈다. 만일 정치범으로 결정된다면 총살형을 면치 못할 입장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 그는 별다른 기술이 없기 때문에 육체노동을 해야 했다. 아메리는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인 부나-모노비츠(Buna-Monowitz) 강제노동수용소를 건설하는데 동원되었다. 이듬해에 소련군이 침공해오자 아메리는 다른 유태인 수감자들과 함께 부헨발트(Buchenwald)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베르겐-벨젠(Bergen-Belsen)수용소로 옮겨졌다. 그후 1945년 4월, 영국군이 진주함으로서 아메리는 수용소에서 해방되었다.
부헨봘트 강제수용소. 수용소 입구에 Jedem das Seine(모두의 생존)이라고 적혀 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한스 마이어라는 이름을 프랑스식의 장 아메리로 바꾸었다. 아메리는 마이어의 프랑스식 표기였다. 그가 프랑스 이름을 가진 것은 독일과는 관계가 없으며 프랑스 문화에 융화되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의 저서를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출판하는 것을 거부하고 스위스에서만 출판했다. 원래 그는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글로 남기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무나 가혹하고 쓰라린 생활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회상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다가 1964년 독일의 시인인 헬무트 하이쎈뷔텔(Helmut Heissenbüttel)의 권유를 받아 들여서 Jenseits von Schuld und Sühne(범죄행위와 참회의 건너편에서)를 썼다. 이 책은 나중에 영어로 At the Mind's Limits: Contemplations by a Survivor on Auswitz and its Realities(정신의 한계: 아우슈비츠 생존자에 의한 고찰과 현실성)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그후에는 on Suicide: A Discourse on Voluntary Death(자살에 대하여: 자발적 죽음 고찰)을 썼다. 아메리는 1978년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였다. 비엔나 출신인 그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죄수번호가 몇번이었다는 것이 적혀 있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에 있는 장 아메리의 묘비
아메리는 홀로코스트와 독일 제3제국의 성격에 대한 여러 가지를 시사하는 ‘정신의 한계’로 인하여 홀로코스트 작가로 간주되었다. 그는 나치와 사디즘 정부를 비교하면서 사디스트들은 세례를 무가치하게 만들고자 원하고 있다고 말하고 나치는 고문이라는 방식으로 이를 합리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장 아메리의 저서 '자살에 대하여'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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