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비히 안첸그루버(Ludwig Anzengruber)
19세기 농민문학의 대표작가
평범한 독일-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베르크(Berg: 산), 제(See: 호수), 펠트(Feld: 평원), 봘트(Wald: 숲), 하이마트(Heimat: 고향)라는 단어에 대하여 이상할 정도로 애정을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하이마트라는 단어에 대하여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함께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어릴 때 함께 뛰어놀던 친구들, 아름다운 고향산천...이런 얘기가 나오면 누구든지 마음을 풀고 감상에 젖기 마련이다. 19세기에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른바 하이마트리테라투르(Heimatliteratur)라는 것이 대인기를 끌었다. 고향문학이라고 번역할수 있지만 보통 우리가 말하는 농민문학을 말한다. 즉, 농민들을 주제로 한 소설, 드라마, 시 등을 말한다. 오스트리아의 농민문학은 일제 치하의 우리나라 농촌문학과는 개념이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나라 잃고 착취당하는 농민들을 계몽하려는 목적의 문학이 농민문학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농민문학은 힘든 생활을 하지만 마음만은 행복한 농민들의 이야기, 종교지도자나 관리들이나 귀족들에 대한 농민들의 은근한 저항과 비평을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에 재미가 있어서 일반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더구나 구수한 고향 사투리가 나오는 연극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성공이었다.
'양심의 가책' 표지
비엔나에서 태어나 비엔나에서 활동하다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루드비히 안첸그루버(1839-1889)는 19세기 농민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였다. 그는 시골의 향취가 풍기는 소설을 썼고 연극을 위한 희곡을 썼으며 시를 썼다. 안첸그루버의 대표작은 Der Schandfleck(치욕), Der Sternsteinhof(슈테른슈타인 농장), Der Pfarrer von Kirchfeld(키르흐펠트의 교구신부) 등이다. 그중에서도 ‘키르흐펠트의 교구신부’는 신부의 금욕생활, 자살자의 교회장례금지 등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룬 것으로 전통적인 가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내용이어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드라마 작품이었다. ‘키르흐펠트의 교구신부’는 1870년 11월 비엔나의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에서 초연되었으며 책자로 출판된 것은 이듬해였다. 이때부터 루드비히 안첸그루버는 L. 그루버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이 드라마는 오스트리아 사투리로 써졌으며 오스트리아의 가톨릭교회 내에서의 자유진보주의와 로마 교황청간의 견해 차이를 그린 것이다.
안첸그루버 작품집 제5권 표지
키르헨펠트에는 헬(Hell)이라는 교구신부가 있었다. 마을에는 종교에 대하여 의심이 많은 부르첼제프(Wurzelsepp)라는 마을 철학자가 있었다. 헬 신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르첼제프를 설득하여 마침내 가톨릭을 믿게 만들었다. 로마 교황청은 헬 신부가 정통적인 방법이 아닌 세속적인 방법으로 철학자를 개종시켰다고 하며 비난하였다. 마을에는 안나 비르크마이어(Anna Birkmeier)라는 아름답고 착한 아가씨가 있었다. 안나는 헬 신부를 사랑했고 헬 신부도 안나가 좋았다. 두 사람은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만났지만 계속 그렇게 지낼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서로의 본분을 인식하고 더 이상은 만나지 않기로 했다. 내용이야 이상과 같이 간략하지만 그간의 과정은 복잡하기가 이를 데없다. 결국 헬 신부는 인습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연극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시민들은 로마 가톨릭의 지나친 권위주의와 우월주의에 식상하고 있었던 때였다.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가 어느 시기보다도 논란이 되던 때였다. 그러므로 안첸그루버의 로마 가톨릭에 반기를 드는 연극은 환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침 오스트리아 정부와 바티칸이 이른바 화해조약(Concordat)을 맺었다. 독일이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로 돌아섰기 때문에 같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에서도 개신교가 확장되었지만 신성로마제국을 주도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제국으로서 입장이 난처하므로 바티칸과 서먹한 관계였었는데 화해를 하고 다시 로마 가톨릭에 충실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바로 콘코르다트였다. 그런 협약이 맺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첸그루버의 ‘키르흐펠트의 교구신부’를 더욱 신나게 보았으며 안첸그루버에 대한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안첸그루버의 할아버지는 북부 오스트리아의 리트(Ried)라는 곳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다. 아버지 요한은 젊은 시절, 농사만 짓고 살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홀로 가출하여 비엔나로 와서 정부기관의 경리공무원이 되었다. 1938년 아버지는 라미아 허비흐(Maria Herbich)라는 아가씨를 만나 결혼하였다. 마리아는 약국집 딸이었다. 이듬해에 루드비히 안첸그루버가 태어났다. 안첸그루버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시인이었다. 아버지는 쉴러 스타일의 시를 썼고 한편의 희곡을 발간하기도 했다. 안첸그루버의 문학적 재능은 아마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것 같다. 아버지는 안첸그루버가 다섯 살때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받는 연금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겨우 살아갈수 있었다. 다행히 어머니의 친정어머니가 경제적으로 자주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친정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생활을 꾸려 나가기가 어려워 바느질일을 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의 교육만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신경을 썼다. 안첸그루버는 성바울초등학교와 피아리스트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고등학교 성적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일을 나가면 집안 일을 도맡아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안첸그루버는 학교를 그만두고 어떤 서점에 견습직원으로 들어갔다. 안첸그루버는 서점에서 일하는 동안 책을 많이 읽을수 있었다.
19세 때에 큰 병을 앓고난 안첸그루버는 다시 서점에 나가서 일하려고 했으나 서점 주인이 못되게 구는 바람에 '좋습니다. 내가 뭐 할 일이 없어서 이러는줄 아십니까?'라고 소리한번 지르고 그만두었다. 안첸그루버는 직업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순회극단에 들어가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연극에 출연하였다. 물론 주로 단역이었다. 그후에는 비엔나의 2류극장에서 조역으로 출연하며 지냈다. 그러나 안첸그루버는 연극배우로서 성공하지 못했다. 그저 단역뿐이었다. 배우로서 가장 문제는 사투리를 쓰는 것이었다.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고치질 못했다. 그는 1866년부터 연극에 출연하는 대신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단편소설도 몇편 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나마 성공한 것은 희곡이었다.
드라마 작가로서는 혼자 먹고 살기에도 힘들었다. 1869년, 안첸그루버는 제국경찰서의 서기로 취직이 되었다. 어느정도 안정이 되자 이듬해 그는 L. Gruber라는 필명으로 희곡을 써서 발표했다. ‘키르흐펠트의 교구신부’였다. 1870년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의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관중들은 오래동안 기립하여 그루버(안첸그루버)에게 박수를 보냈다. 궁정극장(부르크테아터)의 극장장인 하인리히 라우베(Heinrich Laube)도 이 연극을 보러 왔었다. 다음날 그는 안첸그루버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젊은 안첸그루버는 하루 밤 사이에 비엔나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유명한 극작가인 페터 로제거(Peter Rosegger)와 친분을 쌓게 된것도 이때부터였다. 안첸그루버는 극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렵게 들어간 제국경찰서에는 사표를 냈다.
1873년, 안첸그루버는 24세 때에 아델린데 리프카(Adelinde Lipka)라는 아가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아델린데는 16세였다. 어릴때부터의 친구인 프란츠 리프카의 여동생이었다. 안첸그루버의 어머니는 이 결혼을 반대했다. 며느리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안첸그루버는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느니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느니 하면서 결혼을 강행했다. 어머니의 걱정대로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우선 철모르는 새댁인 아델린데는 씀씀이가 헤펐다. 유명인사의 부인이기 때문에 옷도 자꾸 사고 구두도 사고 모자도 새로 사야했다. 안첸그루버의 빚은 늘어만 갔다. 게다가 아델린데는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마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에 기분이 언짢아서 그랬던 것 같았다. 안첸그루버의 어머니는 ‘내가 어서 죽어야지’하면서 한숨만 쉬었다. 어머니는 어렵게 키운 아들 안첸그루버의 성공도 보지 못한채 1875년 세상을 떠났다. 안첸그루버는 결혼후 세 아이를 두었지만 결국 아델린데와 이혼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우선 몇 년동안 별거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결혼생활 16년만인 1889년에 정식으로 이혼하였다. 이상한 일이겠지만 안첸그루버는 이혼하기로 결심한 후부터 성공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연극은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유럽의 각지에서 무대에 올려졌다.
소설. '슈테른슈타인 저택' 표지. 그런데 46세때에 발표한 소설이어서 아마 그 당시의 저자 사진을 표지에 사용한 모양인데 왜 이렇게 늙어보이는지?
안첸그루버는 드라마를 쓰는 이외에도 다른 일도 맡아하게 되었다. 이혼하기 4년전부터 안첸그루버는 Die Heimat(고향)이라는 신문의 편집장이 되었다. 이어 파리의 Le Figaro지에도 고정적으로 기고하게 되었다. 이혼하기 1년전부터는 Wiener Bote(비엔나 메신저)라는 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그해에 그는 새로 문을 여는 폭스테아터(Volkstheater)의 연극감독으로 임명되어 이혼하던 해인 1889년에 폭스테아터가 오픈하였을 때는 그의 신작 Der Fleck auf der Ehr(명예에 얼룩진 오점)이 개관기념으로 초연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혼한지 몇 달후 그는 탄저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더니 2주후에 패혈증으로 요단강을 건넜다. 그때 그는 50세였다. 더 살았더라면 더 훌륭한 작품들을 썼을 것인데 아깝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안첸그루버의 희곡은 주로 오스트리아 농민들의 생활을 그린 것이다. 자칫하면 우울할 농촌 드라마를 밝고 위트에 넘친 장면으로 만들어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의 연극에는 거의 대부분 음악이 등장한다. 주인공들이 한두곡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필수이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합창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 독일 징슈필(Singspiel)의 후속타자와 같은 연극이었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안첸그루버의 연극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여러 극장에서 끊임없이 공연되고 있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연극들이다. 안첸그루버의 연극은 외국인으로서는 도무지 알아 듣기가 어렵다. 시골 사투리가 너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엔나 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우스워서 죽겠다는 듯 난리도 아니다.
- Der Pfarrer von Kirchfeld(키르흐펠트의 교구신부) - 테아터 안 데어 빈. 1870
- Der Meineidbauer(거짓말하는 농부) - 테어터 안 데어 빈. 1872
- Elfriede(엘프리데)- 칼테아터. 1873
- Die Tochter des Wucherers(고리대금업자의 딸)- 테아터 안 데어 빈. 1873
- Der G'wisssenwurm(양심의 가책)- 테아터 안 데어 빈. 1874
- Hand und Herz(손과 마음) - 비너 슈타트테아터. 1874
- Doppelselbstmord(이중 자살) - 테아터 안 데어 빈. 1876
- Die vierte Gebot(네째 계명) - 요셉슈태터 테아터. 1878
소설: - Der Schandfleck(오점) 1884
- Der Sternsteinhof(슈테른슈타인 저택) 1885
'오스트리아의 명인들 > 시인과 작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드비히(비키) 바움(Hedwig [Vikki] Baum) (0) | 2009.06.26 |
---|---|
한스 칼 아르트만(Hans Carl Artmann) (0) | 2009.06.26 |
장 아메리(Jean Amery) (0) | 2009.06.25 |
페터 알텐버그(Peter Altenberg) (0) | 2009.06.24 |
오스트리아를 빛낸 문인들 (0) | 2009.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