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시인과 작가

페르디난트 라이문트(Ferdinand Raimund)

정준극 2009. 7. 3. 23:18

페르디난트 라이문트(Ferdinand Raimund)

비엔나 익살극의 대가

  

 트라우촌 궁전에 있는 라이문트 기념상

 

비엔나에서 라이문트나 네스트로이를 모른다면 사람 대접을 받기가 어렵다. 정치가의 이름은 몰라도 되지만 배우나 극작가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문화인이랄수가 없기 때문이다. 페르디난트 라이문트는 1790년 6월 1일, 당시 비엔나 외곽인 마리아힐르프(Mariahilf)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야콥 라이문트는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는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이었다. 어머니 카타리나 라이만(Katharina Raimann)은 라이문트가 12살 때에 생활고로 고생만 하다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2년후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어린 라이문트는 돈을 벌어야했다. 처음에는 빵가게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라이문트에게는 제빵기술자가 되는 것보다도 더 큰 야망이 있었다. 유명해지는 것이었다. 라이문트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지금처럼 TV나 DVD가 없던 시절에서는 연극이나 오페라가 유일한 문화생활이었다. 하지만 오페라는 상류사회의 사교적 용도가 더 컸으므로 일반 대중은 연극 극장에 몰렸다. 따라서 연극배우에 대한 인기는 대단했었다. 배경도 없고 학력도 없는 라이문트는 궁정극장에 들어갈수는 없어서 유랑극단에 들어가 유럽의 이곳저곳을 순회하며 무대에 섰다. 그러면서 그는 상황에 따라 연극 대본을 수정하기도 하고 몇마디 새로 집어넣는 일도 맡아했다. 라이문트는 연극을 무척 좋아했고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다. 그는 유명하게 된 후에도 자기 작품의 공연에 출연하며 연기를 엔조이했다.

 

유로화가 통용되기 전, 오스트리아의 50 쉴링 지폐에 등장한 페르디난트 라이문트

 

어느때 동료배우가 라이문트에게 ‘남의 대본을 고치는 일만 하지말고 자기 작품을 한번 만들어 보는 것이 어때?’라고 권장하는 바람에 자극을 받아 자기의 극본을 쓰기 시작했다. 라이문트는 무려 여덟편의 극본을 써서 당시 비엔나의 유명 극장인 폭스테아터(Volkstheater)에 전달했다. 그로부터 라이문트의 이름을 서서히 비엔나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라이문트의 유일한 라이벌은 그보다 11살 아래인 요한 네스트로이(1801-1862)뿐이었다. 네스트로이는 라이문트보다 더 풍자적이고 더 사실적이었다. 여하튼 두 사람의 환상적인 코미디는 비엔나의 폭스테아터(국민극장)뿐 아니라 이탈리아 연극을 주로 공연하는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 그리고 궁정극장(부르크테아터)까지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젊은 시절의 라이문트                                                  나이든 시절의 라이문트

 

라이문트의 연극은 유머와 마법과 동화와 같은 요소들이 혼합된 것이었다. 여기에 노래와 춤이 가미되었다. 게다가 기계적인 무대장치와 특수 조명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심지어는 무대 위에서 불꽃놀이까지 하는 장면이 나오도록 했다. 그러니 사람들이 입을 하 벌리고 다물 줄을 몰랐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연극은 모두 권선징악 및 해피엔딩이었다. 그러므로 박수를 치지 않을수 없는 내용이었다. 라이문트의 작품은 처음 1885년에 당시 최고의 극장인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그리고 1백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에도 부르크테아터의 주요 레퍼토리로 되어 있다. 라이문트가 처음으로 인기를 끌게 된 작품은 Der Barometermacher auf der Zauberinsel(마법 섬의 기압계장이)로서 1823년에 발표한 것이다. 동화 스타일의 연극이었다. 비엔나에서 기압계를 만드는 바로톨로모이스 크벡질버(Bartholomäus Quecksilber)라는 영리한 사람이 요정으로부터 마법의 지팡이, 허리띠, 뿔피리와 같은 마법도구를 얻는다. 그의 유일한 대적은 마법 섬에 있는 조라이데(Zoraide)공주 뿐이다. 공주는 마력과 트릭을 써서 기압계 장이의 도구들을 훔치려 한다. 공주의 아버지인 투투(Tutu)왕이 공주를 도와준다. 투투 왕은 프란츠 요셉 황제처럼 생긴 수염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얘기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 웬만한 비엔나 사람들은 라이문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짐작한다. 사람들은 란츠 요셉 황제에 대한 풍자가 나오면 속이 시원해서 박수를 치기 마련이었다. 이밖에 라이문트의 대히트작으로는 Der Diamant des Geisterkönigs(유령왕의 다이아몬드: 1824), 아직도 계속 공연되고 있는 Bauer als Millionar(백만장자로서의 농부), 그리고 최대 걸작이라고 할수 있는 Der Alpenkönig und der Menschenfeind(알프스 왕과 염세가: 19828)와 Der Verschwender(낭비가)등이 있다.

 

    

요셉슈태트극장장이던 시절                        기념 우표(탄생 2백주년 기념. 1990년)

 

젊은 시절, 라이문트는 몇차례의 연애를 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번번이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 어떤 때는 너무 상심하여 자살할 생각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여자를 구타했다는 혐의로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1820년, 그가 30세 때에 루이제 글라이히(Luise Gleich)와 결혼하였다. 극작가인 알로이스 글라이히(Alois Gleich)의 딸이었다. 결혼후 아이가 태어났으나 불행하게도 몇주만에 숨을 거두었다. 라이문트는 아이가 죽은 것이 엄마의 잘못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 외에도 부인에 대하여 못마땅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라이문트는 이혼코자 했으나 루이제가 이혼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재혼을 하고 싶어도 할수 없었다. 실제로 루이제에게 질린 라이문트는 숨겨놓은 애인이 있었다. 상냥한 토니(안토니아)였다. 라이문트는 남은 생애를 안토니아 바그너(Antonia Wagner: 애칭 토니)라는 여인과 보냈다. 안토니아의 아버지는 커피하우스를 경영했다. 라이문트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라이문트는 이혼하지도 못하고 재혼하지도 못하며 지냈기 때문에  항상 긴장과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던중 1836년 여름에 미친개에게 물렸다. 미친개에게 물렸다는 비유가 아니라 진짜 미친개에게 물린 것이다. 라이문트는 ‘이제는 끝이다. 광견병에 걸려 죽는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얼마후인 9월 5일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였다. 라이문트는 비엔나 익살과 농담의 대가였다. 그는 놀랍도록 풍부한 유머로 사람들을 즐거움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그런데 정작 그는 강박관념으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라이문트의 기념상은 트라우촌(Trautson)궁의 정원에 아름답게 설치되어 있다.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