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화가와 조각가

클림트의 여인들

정준극 2009. 8. 26. 06:44

클림트의 여인들

 

얼마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클림트라고 하면 ‘누구시더라?’라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걸음 나아가서 그의 작품인 ‘키스’ 또는 ‘유디트’(Judith)에 대하여 얘기하면 ‘그런 것도 있나요?’라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틈엔가 이상하리만치 클림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신세계백화점은 클림트의 작품을 크게 복사하여 간판으로 걸어놓아 고객들을 유치했다. 쇼핑백도 클림트 스타일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그 쇼핑백을 들고 다니면 상당이 품격이 높아보였다. 마침 2009년 봄에 예술의 전당에서 클림트 특별 전시회가 열리자 클림트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관심은 더구나 높아졌다. 이제 클림트라고 하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클림트라고 하면 우선 ‘키스’(Der Kuss)라는 작품을 연상하게 된다. 거의 벌거벗은 남성과 어떤 여인이 열정적으로 키스를 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여담이지만 미술사학자들은 ‘키스’라는 타이틀은 우회적인 표현일 뿐이며 실은 ‘섹스’가 적합한 타이틀이라고 설명했다. ‘키스’에는 세기의 여류 알마 쉰들러(Alma Schindler: 1879-1964)와의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어느날 클림트가 화가 에밀 쉰들러(Emil Schindler: 1842-1892)의 집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했을 때 쉰들러의 딸인 알마(Alma)가 그에게 관심을 갖고 가볍게 키스를 하였다. 클림트는 뜻밖에 알마의 키스를 받고 이를 잊지 못하여 오늘날 세계적 걸작인 ‘키스’를 완성했다고 한다. 매력적이고 지성적인 알마 쉰들러는 청년 클림트에게 관심이 있었으나 클림트가 적극적으로 대쉬하지 않아서 두 사람의 관계는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알마는 나중에 위대한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구스타브 말러와 결혼하였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하였으며 그와 이혼한 후에는 작가 프란츠 베르펠과 재혼하였고 그런 중에도 젊은 화가 코코슈카와 대단한 어페어를 기록하였다.

 

 

 키스(Der Kuss)                                                                     알마 쉰들러

 

하지만 클림트의 주장에 따르면 얘기가 다르다. 클림트는 알마에게 깊은 호감을 가지고 쉰들러 가족이 제노아에 여행갔을 때 우정 따라가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알마에게 접근하여 제노아의 호텔 방에서 알마와 키스를 하였고 베니스에 가서는 유명한 리알토 다리에서 서로 포옹하며 석양을 바라보며 장래의 희망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알마가 무관심 일변도로 나오는 바람에 장밋빛 꿈은 유야무야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나중에 알마 쉰들러는 위대한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와 결혼하였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와 재혼하였으며 그런 중에도 청년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와 열정적인 애정행각을 벌였고 그로피우스와 이혼하고서는 작가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과 결혼한 여인이다. 클림트의 여성관계는 알마 쉰들러부터 시작하였으나 그것은 모양뿐이었으며 사실상 생전의 여성편력은 복잡하여 사생아 아들이 세 명이나 되었다. 예술가들은 다 그런 것인가? 하기야 심미안이 누구보다도 뛰어난 예술가들이므로 여성문제가 화려하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여인의 세단계 나이

 

1902년 6월, 유명한 프랑스의 조각가 오거스트 로댕(Auguste Rodin)이 프라하로 가는 도중 비엔나를 지나게 되었다. 로댕이 잠시 비엔나에 머문다는 소식을 들은 클림트는 비엔나 제체시온(Secession)에서 열리고 있는 자기의 전시회를 방문하여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로댕과 클림트는 서로 만난 일이 없었으므로 만일 로댕이 제체시온을 방문한다면 클림트와 만나게 되며 또한 클림트의 대작인 베토벤프리즈(Beethoven Frieze)를 볼수 있는 기회가 된다. 당시 로댕은 62세의 거장이었으며 클림트는 40세의 중년화가였다. 제체시온에서 만난 두 사람은 베토벤프리즈의 관람을 마치고 프라터(Prater)에 있는 카페로 향하였다. 제체시온에서 프라터는 상당한 거리였지만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6월의 따스한 햇살을 즐기면서 향하였다. 비엔나의 여류인 미술평론가 베르타 추커칸들(Berta Zuckerkandl)도 동참하였다. 베르타에 따르면 로댕과 클림트는 카페에서 어떤 화려하게 멋있는 두명의 여인과 합석하였다고 한다. 로댕은 이 여인들을 감탄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베르타는 ‘날씬하고 사랑스럽게 생긴 두명의 여인이 클림트와 로댕의 주변에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웃음을 만들고 있었다.’고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로댕은 클림트에게 “오늘과 같은 분위기는 생전 처음으로 경험한다. 당신의 비극적이면서도 장엄한 작품인 베토벤프레스코, 마치 신전과 같은 제체시온의 전시장, 이 아름다운 공원, 이 사랑스러운 여인들, 그리고 음악! 이 모든 것을 경험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말했다. 클림트는 천천히 다만 한마디 말로서 로댕의 질문에 답변하였다. ‘비엔나’였다.

 

   

세레나 레더러의 초상화                         

 

클림트의 ‘키스’는 제체시온에 그린 베토벤프리즈의 절정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은 프리드리히 쉴러의 위대한 서사시 ‘환희의 송가’(Ode to Joy)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클림트의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주제로 한 프리즈(천정과 벽면사이의 공간에 그리는 그림)작품은 교향곡 제9번에 대한 바그너의 논평에 기본을 둔 것이다. 바그너는 “더 할수 없이 가장 장엄한 음악이다. 환희의 정령과 적대세력간의 투쟁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투쟁은 우리 자신들과 세상적인 열락의 사이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클림트의 ‘키스’는 쉴러의 구절인 ‘환희여, 신들의 아름다운 불꽃이여, 온 세상을 위한 입맞춤이다’를 가장 세상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클림트의 프리즈는 음악, 사랑(또는 섹스), 죽음이라는 명제들을 모두 함께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지그문트 프로이드와 아르투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의 비엔나를 말할수 없이 환상적으로 이끈 것이다. 클림트가 로댕의 질문에 대하여 ‘비엔나’라고 한마디로 대답할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같은 복합성을 달리 표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베토벤프리즈의 한 장면

 

로댕과의 대화에서도 볼수 있듯이 클림트는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대신에 그는 몸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클림트는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함부르크미술관장인 알프레트 리히트바르(Alfred Lichtwar)는 클림트에 대하여 “키는 크지 않지만 통통하게 살이 붙어 있는 편이다. 대체로 쾌활한 인상이지만 실제로 대화를 나누다보면 무뚝뚝한 성격을 볼수 있다. 피부는 마치 뱃사람처럼 햇빛에 그을린 것 같고 얼굴에서는 어찌보면 강인한 인상까지 받는다. 하지만 눈길은 자주 초점을 잃는다. 말할 때에는 음성이 울리는 것 같으며 특별히 비엔나 사투리를 강하게 썼다.”고 말했다.

 

  

클림트와 플뢰게. 클림트는 부대자루와 같은 옷을 즐겨 입었다. 플뢰게는 패션 디자이너. 오른쪽은 클림트가 그린 에밀레 플뢰게.

 

1915년 어느날 클림트의 집에 프레데리케 베르-몬티(Fredericke Beer-Monti)라는 젊은 여인이 찾아왔다. 클림트의 모델이 되고 싶어서 왔다는 것이다. 베르-몬티는 이미 모델 경험이 있어서 클림트의 라이벌인 에곤 쉴레의 모델 노릇을 했었다. 베르-몬티는 클림트도 사람이 과묵하고 친절하다고 생각하여 모델을 서겠다고 찾아온 것이다. 클림트는 한참만의 생각 끝에 베르-몬티를 모델로 하여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6개월 동안 1주일에 세시간씩 그리는 조건이었다. 클림트와 베르-몬티가 이성으로서의 관계를 가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중에 베르-몬티가 친구들에게 ‘클림트라는 사람은 말야, 그렇게도 애완동물을 좋아하더라고, 남자가 뭐 그래, 하여튼 그 사람 옆에 있으면 특별한 냄새가 난단 말이야, 고양이 냄새라고나 할까? 아무튼 여자들은 그런 냄새를 아주 싫어하잖아?’라고 말한 것을 보아 베르-몬티가 클림트와 아주 가깝게 지냈다고는 볼수 없다.

 

프레데리케 베르-몬티를 모델로 한 작품

 

1862년에 태어난 클림트는 평범한 가정출신이었다. 아버지는 금세공장인이었다. 클림트는 일곱 남매 중에 둘째였다. 클림트에게는 동물과 같은 야성적인 면이 있었다. 클림트의 사진을 보면 보통 부대자루와 같은 헐렁한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마치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 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목신과 같은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클림트에게서 좋게 말해서 자연적, 보통 말해서 야성적인 모습을 볼수 있다. 클림트의 화실에는 언제나 모델들이 넘쳐 있었다. 아무리 작품을 위해 포즈를 취하는 모델이라고 해도 여성의 아름다운 누드를 대하는 화가의 입장에서는 모델과의 사이에 에로틱한 사건이 없을수 없다. 베르-몬티는 화실의 모델들에 대하여 이렇게 얘기했다. “젊은 모델들은 마치 클림트의 애완동물처럼 휴게실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클림트는 그림을 그리다가 거의 한 시간 마다 휴게시간을 갖고 휴게실에 가서 모델들과 잡담을 하거나 커피를 마시며 지낸다.”

 

애완동물(특히 고양이)을 무척 좋아했던 클림트

 

클림트에게는 대외적으로 아들이 셋이나 있었다. 대외적이라는 것은 남들이 모두 알고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중 하나는 나중에 훌륭한 영화감독이 되었다. 다른 두 아들은 비엔나의 유명한 의상 디자이너인 에밀리 플뢰게(Emilie Flöge)에게서 태어났다. 클림트와 플뢰게의 관계는 비엔나에서는 누구나 아는 비밀이었다. 플뢰게는 클림트의 말년에 그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지냈던 여인이었다. 말년의 클림트의 다른 여인들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분명이 있었지만 클림트가 다른 여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들, 사진 등등은 클림트가 세상을 떠난 직후 플뢰게가 뜻한바 있어서 모두 불태워 없앴기 때문에 증거가 없다. 그런 중에 최근에 클림트의 모델이었던 한 여인이 클림트와 깊은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름다운 빨강머리의 보헤미아 여인인 힐데 로트(Hilde Roth)였다. 부다페스트에서 온 힐데 로트는 클림트의 작품인 ‘보아목도리에 모자를 쓴 여인’(1910), 그리고 ‘금붕어’(1902)에 등장하는 육감적인 여인이었다.  

 

보아목도리에 모자를 쓴 여인(모델: 힐데 로트)

 

만일 그렇다면 클림트는 힐데 로트와 10여년간 관계를 가졌다는 얘기이다. 클림트는 풍경에도 뛰어났지만 실상 그의 대부분 작품들은 여성을 그린 것이다. 물론 전통적으로 빼어나게 예쁜 여인들의 모습을 그린 것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림트의 작품에 등장한 여인들은 이상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비엔나의 여인들이었다. 미술평론가 리하르트 무터(Richard Muter)는 1909년 신문기고에서 “클림트에 의해서 새로운 모습의 비엔나 여인들이 재발견되었다. 비엔나의 여인들은 다른 어느 곳의 여인들과는 달리 특별한 부류라고 말할수 있다. 이들이야 말로 유디트와 살로메의 후손들이다. 클림트가 이들을 재발견했다. 비엔나의 여인들은 명랑하고 활발하다. 죄스러운 행동을 하더라도 매력적으로 한다. 이들은 환상적으로 사악하다.”고 말했다.

클림트는 모델 여인들을 대단히 육감적으로 표현한다. 비잔틴 모자익과 켈트의 디자인, 동양의 양탄자와 도자기에서 볼수 있는 사치스러운 장식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꾸민 그의 그림은 화려하고 육감적이며, 추상적이지만 그렇다고 전위적이지는 않다.

 

                

'금붕어'의 육감적인 여인 (모델은 힐데 로트)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들고 있는 유디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