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더 알기/동방박사 세사람

동방박사들의 일정

정준극 2009. 7. 18. 19:11

동방박사들의 루트


제임스 자크 조셉 티소의 '동방박사들의 여행'. 수행원이 상당히 많았다.

 

동방박사들은 어떤 루트를 따라 동방으로부터 베들레헴으로 갔을까? 아마도 시리아(수리아)와 유브라데스강의 사이에 있는 시리아사막을 건너 할레브(Haleb 또는 Aleppo)나 투드모르(Tudmor)에 도착한 후 계속하여 다메섹(Damascus: 다마스커스)을 거쳐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내려가다가 오늘날 이슬람 순례자의 길이라고 하는 메카 루트를 따라 갔을 것이며 이어 갈릴리 호수를 지나 여리고성 쪽으로 내려오지 않았을까 보고 있다. 아무튼 성경에서 지적한 ‘동방’이라는 곳이 어딘지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어느 루트를 통해 베들레헴까지 왔는지는 알수 없는 일이다. 복음서의 저자들이 조금만 신경을 써서 동방박사들이 어느 곳에서 온 사람들이라고만 적어 놓았어도 성경을 해석하는데 훨씬 쉬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하여 아쉬움이 있다. 그동안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동방이 어디를 의미하느냐는 추측은 많이 있었다. 성막시무스와 데오도투스(Theodotus)는 바빌론이라고 주장했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와 성시릴(St Cyril)은 페르시아라고 했으며 성유스틴(St Justin)과 그노시스교(비교)의 경전과 성에피파니우스(St Epiphanius)는 아라비아라고 주장했다. 물론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가하면 중국의 기독교 학자들은 동방박사 중의 한 사람이 중국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무어(Christopher Moore)가 쓴 ‘양’(Lamb)이라는 책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러 주장들이 있는 가운데 근자의 신빙성 있는 연구에 따르면 동방박사들, 즉 마기들은 당시 파르티아제국의 사베(Saveh)라는 도시에서 출발하였다고 한다. 사베는 파르티아제국, 즉 오늘날의 이란과 이락 일부에 해당하는 대제국에서 대단히 중요한 도시였다고 한다. 오늘날의 테레란에서 서남쪽을 약 1백 km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이다.

  

언제 왔었나?

 

동방박사들의 공현은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처음으로 이방인에게 모습을 보인 것으로서 의미가 있다. 동방박사들이 찾아간 집의 위에는 이들을 인도한 별이 떠 있다.

 

동방박사들은 언제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을까? 우리는 보통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바로 그날에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경배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림에도 보면 동방박사들이 목자들과 함께 아기 예수와 마리아에게 경배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과연 그랬을까? 성경의 몇 구절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것 같다. 우선 누가복음 2: 21-22을 보자. ‘21 할례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지 8일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것이 분명하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적어도 이틀거리이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후 그 다음날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리는 만무하다. 요셉도 본래의 출장목적인 호적을 마쳐야 하므로 최소한 하루는 더 베들레헴에 머물러야 했을 것이다. 이렇듯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는 일이 급한데 언제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으로 와서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다는 것인가?


예루살렘에서 헤롯을 만나는 동방박사들

                                      

신학자들은 동방박사들이 예수의 할례 이후에 찾아 왔다고 보고 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루살렘에서의 할례 이후에 베들레헴으로 간 것이 아니라 갈릴리로 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했다면 베들레헴이 아니라 갈릴리에서였을 것이다. 한편, 동방박사들이 떠나자마자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헤롯의 박해를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하라고 했을 것이다. 마태복음 2: 13을 보면 ‘그들이(동방박사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급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보면 알수 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와 마리아에게 경배한 후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헤롯이 동방박사들에게 속은줄 알고 대단히 화가 나서 베들레헴과 그 부근에 있는 사내아이들을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이로 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라고 명령하기 전에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였음은 분명한 일이다.

 

'동방박사의 경배'.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작품

                           

그런데 문제가 있다. 누가복음 2: 39에 보면 예수에게 성결의식을 거행한 후에 갈릴리로 돌아갔다고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성결의식만 마치고 금방 갈릴리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곳에서 며칠 더 묵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누가복음에는 그 유명한 동방박사들이 경배했다는 얘기도 없고 애급으로 피난했다는 얘기도 없으며 헤롯 때문에 무고한 아기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얘기도 없고 성가족이 상당 기간 동안 애급에 피난 갔다가 갈릴리로 돌아왔다는 얘기도 없다. 누가복음에는 그저 예수께서 태어나신 일과 8일후에 할례를 받으러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갈릴리로 돌아갔다는 얘기로 연결될 뿐이다. 나사렛에 머문 기간은 상당히 짧다. 그 이후에 성가족은 아마도 베들레헴으로 돌아가 머물렀을 것이다. 베들레헴에 다시 돌아갔을 때 동방박사들이 찾아 왔을 것이다. 문제는 왜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느냐는 것이다. 다시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산후에 몸도 성하지 아니하고 더구나 나이도 어린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그 더운 날씨에 이리 저리 돌아다녀야 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이상한 점은 또 있다. 동방박사들이 찾아온 것은 헤롯왕 시절이었다. 헤롯은 여리고에서 주전 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들이 찾아온 시기는 적어도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4년 이전이라고 할수 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이 헤롯을 찾아 온 것은 여리고가 아니라 예루살렘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그 시기는 주전 4년 초이거나 주전 5년 말일 것이다. 일각에서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이 주후 4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역사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헤롯이 죽기 8년전에 태어났다는 것이 신빙성이 있게 된다. 아무튼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온 시점이 아기 예수가 탄생한지 적어도 1년 이상 지난 후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다. 헤롯은 박사들로부터 별이 나타난 시기에 대하여 물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온 때부터 최대 2년 전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당장 명령을 내려서 베들레헴과 그 인근지역에 있는 남자 아이 중 두 살 미만을 모두 찾아 죽이라고 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했던 헤롯 대왕(주전 72-주전 4) 

                                         

학자들은 헤롯이 두 살 아래의 남자 아이들을 참혹하게 살육한 사실에 비추어서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 예루살렘에 온 시점을 예수께서 태어 난지 2년후 정도라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동방박사들은 헤롯에게 별이 2년 전에 나타났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동방박사들이 헤롯에게 별이 나타난 때를 속여서 말했을 수도 있다. 중세의 그림들을 보면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할 때에 아기 예수는 말구유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기 예수가 태어 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방문했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림은 다만 그림일뿐이기 때문에 내용이 정확치 않을수 있지만 그래도 큰 교회에 거는 그림인데 사실과 너무 동떨어진 내용은 그릴 수는 없을 것이므로 어느 정도 근거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무슨 이유로 별이 나타난 시점을 거짓으로 말했겠느냐는 의문을 가질수 있다. 헤롯의 포악한 의중을 간파하고서 그렇게 말했다는 설명이다. 이는 물론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일이다. 그보다도 더한 궁금증은 따로 있다. 동방박사들이 어디서부터 여행을 시작했는지 확실히 모르지만 아무튼 페르시아 지역이라고 한다면 그곳에서 예루살렘까지 오는데 2년이나 걸렸냐는 의문이다. 뙤약볕을 피해서 천천히 걸어온다고 해도 두어 달이면 충분한 거리이기 때문이다. 동방에서 '왕중의 왕'에게 경배하기 위해 찾아나선 박사들은 원래 네 명인데(넷이라는 숫자는 완성을 의미함) 그중 하나가 도중에 길을 잃어 낙오되는 바람에 셋만 오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이것은 글자그대로 전설일 뿐이다.

 

라인강변의 쾰른돔에 있는 동방방사의 관. 동방박사 세 사람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다. 원래 동방박사들의 유해는 성헬레나가 페르시아에서 발굴하여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가져와서 소피아사원에 안치하였다가 밀라노대성당으로 이관되었고 다시 12세기에 쾰른대성당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페르시아로부터 예루살렘까지는 거리가 대략 1,000마일로부터 1,200마일에 이른다. 이만한 거리라면 낙타를 타고 쉬어가면서 가면 최소 3개월에서 최대 1년이 걸린다. 실제 여행 기간은 그렇다고 해도 준비하는데 또 한 달 정도는 걸릴 것이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들이 별이 나타난 때로부터 1년 이내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 가톨릭교회는 예수공현(公顯)의 축일을 1월 6일로 지키고 있다. 이방인인 동방박사들이 예수의 나심을 치하하기 위해 찾아와 경배한 날을 말한다. 이는 크리스마스(12월 25일)로부터 13일 후가 된다. 그러나 이같은 날짜 계산은 교회 전례(典禮)상의 계산일뿐이며 역사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4세기에 동방교회들은 예수 탄생 축일을 1월 6일로 지키기 시작했다. 동방교회들은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예수의 세례도 이날 함께 축하한다. 기독교가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기원후 4세기 경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인 크리소스톰(Chrysostom) 시기에 안디옥교회에서부터였다. 안디옥은 크리소스톰 대주교의 고향이다. 그후 예루살렘교회와 알렉산드리아교회가 안디옥교회의 관례를 따라 12월 25일로 성탄절을 지키기 시작함으로서 세계적인 축일로 정착되었다.

 

오늘날의 터키 안티옥. 이곳에 처음 세워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크리스챤이라고 처음 불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