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더 알기/동방박사 세사람

동방박사, 그 후의 이야기

정준극 2009. 7. 18. 19:32

동방박사들은 어떤 길로 돌아갔나?

 

마태복음 2장 12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동방박사들은 헤롯에게 돌아가지 않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갔다. 만일 처음에 왔던 루트대로라면 귀국 길은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을 거쳐 여리고를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이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길로 갔다고 하므로 동방박사들의 귀국 루트는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통과하지 않는 것이었다. 생각컨대 이들은 남쪽의 브엘세바(Beersheba)를 우회한후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모압 지방에 있는 메카 루트라고 하는 대로로 갔을 것이며 이어 사해 동편으로 가다가 페르시아로 갔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훗날 동방박사들은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도마(Thomas)로부터 모두 세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으며 동방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도록 헌신했다고 한다. 마침 그때 도마는 인도로 전도여행을 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도마가 세례를 주었다는 이야기는 6세기의 어떤 아리안(Arian) 작가가 쓴 Opus imperfectum in Matthaeum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한편, 주후 4세기 경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성크리소스톰(St Chrysostom)은 경외서인 셋서(Book of Seth)를 저술코자 초안을 마련했는데 그 중에 동방박사의 전설도 설명해 놓았다고 한다.

 


독일 쾰른대성당. 이곳에 동방박사의 성골들이 보관되어 있다.

  

동방박사들의 유해

 

독일 라인강변의 쾰른에 있는 대성당(Kölndom)에는 동방박사들의 유해라는 것이 보관되어 있다. 이 유해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한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성헬레나(St Helena)가 페르시아에서(또는 성지 예루살렘에서) 발굴한 것으로 콘스탄티노플에 가져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사원에 보관하였으나 그후 5세기에 밀라노 대성당으로 이관되었다가 1163-64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레데릭1세에 의해 쾰른대성당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밀라노 대성당은 지금도 동방박사들의 유골을 보관했었다는 기념으로 매년 1월 6일 두오모(대성당)가 주관하여 축제행렬을 벌이고 있다. 이날은 동방박사 공현축일이기도 하다. 공현축일은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방인인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처음으로 받았다는 것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14세기의 성직자인 힐데샤임의 존(John of Hildesheim)은 Historia Trium Regum(세 왕의 이야기)라는 저서에서 성헬레나가 동방박사들의 유해를 비롯한 다른 성물들을 발견했다는 얘기를 다루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헬레나 모후는 팔레스타인에서 성지로 가는 중에 가스파르, 멜히오르, 발타자르의 유해를 발견한 후 이들을 상자 하나에 넣고 상자를 아름답게 장식한후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왔다. 그리고 성소피아 사원에 안치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장소에서 동방박사들의 유해를 발견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동방박사의 이름들을 열거하므로서 동방박사들이 세명이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사족: 쾰른대성당에는 세례 요한의 머리라는 것도 보관되어 있다. 대성당에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므로 믿어야 할 것이다.

                      

동방박사들의 유해를 발견했다는 성헬레나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그린 정교회 이콘(성화). 동방정교회의 십자가를 함께 들고 있다.

 

이제 쾰른대성당의 동방방사 영묘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독일어로는 드라이쾨니히스슈라인(Dreikönigsschrein)이라고 한다. 글자그대로 번역하면 세 임금의 영묘가 된다. 영어로는 The Shrine of the Three Kings 이다. 세 임금의 묘(Tomb of the Three Kings) 또는 세 마기들의 묘(Tomb of the Three Magi)라고도 표현한다. 그런데 독일어의 Schrein, 영어의 Shrine은 일반적으로 영묘 또는 사당을 말하지만 교회에서는 성체용기(성체용기) 또는 성골함(성골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쾰른대성당의 '동방박사 영묘'는 커다란 석관과 같은 모습이다. 여기에 우리가 말하는 동방박사들의 뼈가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석관은 도금한 것으로 중앙제단의 뒷편 높은 곳에 안치되어 있다. 예술적으로 보면 모산(Mosan) 예술의 정점에 있는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서유럽에서는 가장 커다란 유물함이라고 할수 있다. 앞에서도 잠시 설명했지만 동방박사들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 있었다. 그것을 밀라노 주교인 에우스토르기우스 1세가 소가 끄는 달구지에 싣고 밀라노로 가져왔다. 그것이 서기 314년이었고 이같은 조치는 에우스토르기우스 주교가 당시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의 허락을 받아 취해진 것이다. 그로부터 8세기가 지난 1164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레데릭 바르바로사가 밀라노의 성에우스토르지오 교회에 있는 동방박사들의 유해를 쾨른대주교인 다세의 라이날트(Rainald von Dassel)에게 이관토록 지시하여 쾰른에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쾰른대성당의 동방박사 유해는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을 이끈 것이 되었다.


쾰른대성당에 있는 동방박사 관


석관의 일부는 유명한 금세공기술자인 베르둔의 니콜라스가 완성한 것이다. 베르둔의 니콜라스라고 하면 비엔나의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 있는 비너 노이슈타트 제단 장식을 만든 사람으로서 이름나 있다. 니콜라스는1180년부터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석관의 양 옆에는 이름난 성자들과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의 모습,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내용도 조각되어 있다. 석관이 완성된 것은 1225년 경이다. 석관을 제작 중인 1199년에 오토 대제는 세명의 동방박사를 위해 세개의 금관을 기증하였다. 쾰른 시로서는 동방박사의 영묘로 인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래서인지 쾰른시의 문장에는 세명의 동방박사(또는 임금)를 상징하는 세개의 금관이 그려져 있다. 웅장하기로 이름난 고틱 양식의 쾰른대성당을 건축하게 된 이유도 실은 동방박사의 유해를 모실 성당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쾰른대성당의 건축공사는 1248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완성까지 632년이 걸렸다. 그리고 1864년 7월에 동방박사 세 사람의 유해를 모신 관이 처음으로 개봉되었다. 동방박사들의 뼈로 추정되는 물건들이 발견되었고 또한 쾰른대주교인 필립 1세를 기념하는 주화들이 발견되었다.  


쾰른의 어디서나 볼수 있는 시문장. 동방박사 세 사람을 상징하는 세개의 왕관이 그려져 있다.


동방박사의 관(세 임금의 관)이 1864년에 오픈되었을 때 이를 목격했던 사람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석관의

한쪽 특별실에 고대의 것으로 보이는 부패된 또는 주조한것처럼 보이는 붕대의 잔해들을 볼수 있었다. 아마도 고대의 삼베같았다. 그 옆에는 유황과 같은 향내나는 수지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뼈들이 많이 보였다. 세 사람의 뼈이기 때문에 많았을 것이다. 옆에 있던 전문가 한 사람은 저 뼈들을 맞추면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만들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는 뼈들을 관찰하고 나서 세 사람의 뼈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뼈들의 형태를 살펴보고나서 하나는 젊은이이고 또 한 사람은 중년이며 나머지 한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일 것이라고 말했다. 주화는 두개가 발견되었다. 은화였다. 그런데 한면만 주조되었고 다른 한면은 밋밋한 상태였다. 하인스버그의 필립스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 주화에는 교회의 그림이 주조되어 있고 다른 주화에는 십자가와 함께 공의의 검과 주교장(crosier)이 조각되어 있었다." 뼈들은 비단으로 다시 싸서 관 안에 넣었다. 관의 크기는 폭이 110cm, 길이가 153cm이며 높이는 220cm이다. 관의 형태는 노아의 방주 또는 바실리카 교회 스타일이다. 관은 기본적으로 나무로 만들었으며 여기에 금과 은으로 코팅을 하였다. 관의 표면은 금사와 에나멜로 장식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무려 1000개 이상의 보석과 유리구슬로 치장되어 있다. 관의 표면에는 모두 74명의 인물이 부조되어 있다. 모두 은도금된 인물상이다. 실은 74명의 주인물 이외에도 백그라운드에 수많은 인물들이 부조되어 있지만 일일히 세어보기가 쉽지 않다. 관의 옆면의 인물들은 두 층으로 부조되어 있는데 윗쪽은 사도들과 전도자들의 모습이, 아랫쪽에는 예언자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한쪽 끝에는 동방박사들의 경배, 아기 예수와 함께 있는 성모의 대관,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는 예수, 마지막 심판 날에 면류관을 쓰신 그리스도의 장면들이 부조되어 있다. 다른 한쪽에는 수난의 장면들이다. 채찍질 당하는 그리스도,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다셀의 라이날트의 흉상이 있다.




동방박사의 관의 외부를 장식하고 있는 부조.


동방박사들의 무덤 

 

동방견문록으로 유명한 마르코 폴로는 1270년에 테헤란 남쪽 사베(Saveh)라는 곳에서 동방박사 세 사람의 무덤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마르코 폴로는 그곳에 세 개의 각각 웅장하고 아름다운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무덤 위쪽에는 넓은 장방형 건물이 있는데 이곳에 동방박사 세 사람의 시신들이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다고 적었다. 그는 시신들의 머리칼과 수염이 아직도 생전처럼 남아 있었다고 기술했다. 그러면 성헬레나가 성지에서 발견했다는 동방박사들의 유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성지라고 하면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설마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을 방문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테헤란은 오래동안 페르시아-이란의 수도였다. 사진은 테레한의 골레스탄 궁전. 테레한의 인근 사베라는 곳에 동방박사 세사람의 무덤이라는 것이 있다.

 

동방박사의 종교적 의미

                              

동방박사들은 이방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경배한 인물들이었다. 물론 그 전에 들에서 양을 지키던 목자들이 천사들의 전하는 말을 듣고 마굿간에 와서 아기 예수를 보고 경배했다고 되어 있지만 목자들이 동방박사들보다 먼저 와서 경배했는지 또는 나중에 와서 경배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더구나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는 목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한마디도 없으며 누가복음에만 잠시 등장한다. 어쨌든 동방박사들이야말로 비록 이방인들이었지만 예수의 탄생을 공식적으로 경배하고 축하한 첫 인물들이므로 교회에서는 이 사실을 대단히 중히 여기고 있다. 예수께서 만방의 사람들로부터 유태인의 왕, 즉 메시아로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고 경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서방교회(로마 가톨릭)에서는 1월 6일을 공현축일로 지키고 있다. 동방정교회는 12월 25일을 공현축일로 지키고 있다. 기독교 예술에서는 동방박사들의 방문이 The Adoration of the Magi라는 타이틀로 주요 소재가 되고 있다.

 

 동방박사들의 유해를 처음 보관했었다는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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