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 집중분석/HRE가 뭐길래

신성로마제국 아웃라인

정준극 2009. 7. 20. 23:02

신성로마제국 아웃라인

 

비엔나를 좀 더 알려면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하여 좀 더 아는 것이 중요하고 아울러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도 좀 더 아는 것이 필요하다.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비엔나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사람들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이래 오래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다. 그 기간이 무려 6백년이 넘는다. 15세기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공식명칭은 독일국가의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 of German Nation: 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었다. 신성로마제국과 독일국가들은 어떤 관련이 있기에 그런 명칭이 붙었을까? 그리고 로마는 이탈리아에 있는데 신성로마제국이란 또 무엇인지? 이제부터 아주 간략하게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탐구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다시 말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비엔나를 이해하는 지름길 중의 하나이다.

 

비엔나는 약 6백년간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다.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는 처음에 레겐스부르크였으며 그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을 거쳤으며 한때는 프라하도 제국의 수도였다. 그러나 역시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는 비엔나였다. 사진은 링슈트라쎄의 팔라멘트와 미술사박물관 및 자연사박물관, 그리고 폭스가르텐

                  

결론부터 말하면, 신성로마제국은 10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성향이 강한 유럽 국가들의 정치적 연방체를 말한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로부터였다. 프랑크 왕국은 베르됭 조약으로 동서로 나뉘었는데 오토 1세가 동쪽을 점거하고 있던 마자르족을 격퇴한 후 로마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수여받아 신성로마제국 건국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은 초기에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으나 점차 이탈리아에 대한 간섭으로 독일 지역에 소홀히 하면서 여러 제후들에 의해 분할 상태가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962년 독일의 오토 1세(Otto der Grosse)가 교황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가진 이래 1806년 합스부르크의 프란시스 2세(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로서는 프란시스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로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까지 8백여년간 지속된 제국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이 약 8백년의 연혁을 지니고 있지만 여러 왕조들이 황제를 배출하였고 그중에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신성로마제국을 지배한 것은 약 6백년에 이른다. 영광과 오욕이 점철된 신성로마제국은 동프란시아(East Francia: 독일)의 뒤를 이어 처음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으며 19세기 초에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자 그 뒤를 이어 여러 국가들이 서로 유럽의 맹주라고 주장하며 등장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이 막을 내린후 두각을 나타낸 대표적인 국가들은 스위스 연맹, 화란공화국 연맹, 라인 연맹, 오스트리아 제국(나중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랑스 제1제국, 프러시아 왕국이다. 그중 프러시아왕국은 독일 제2제국, 제3제국으로 발전하였으니 제3제국은 바로 히틀러의 나치에 의한 제국이었다. 사실 우리는 히틀러의 독일을 제3제국(Der dritte Reich)이라고 부르지만 독일어의 Reich는 반드시 제국(Empire)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제 제3국가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른다.

 

샬레마뉴 대제가 학자들과 성직자들로부터 여러 교육을 받고 있다. 샬레마뉴 대제는 어릴 때에 군사교육만 받았을 뿐 인문교육은 받지 못하여 훗날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자 여러 나라에서 훌륭한 학자들과 신앙심이 깊은 성직자들을 초청해서 개인적이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샬레마뉴 대제를 '다윗 왕'이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샬라마뉴 대제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문이 열렸다.

 

전성기의 신성로마제국은 약 3백개의 국가, 공국, 자유도시, 대주교도시 등으로 구성되었다. 주로 중부 유럽에 산재하여있던 국가나 공국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다른 나라들도 그런 경향이었지만 특히 독일 지역의 나라들은 작더라도 영지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마치 주권국가처럼 행세하였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실제로 중부 유럽에는 수백개의 작은 나라들이 난립하여 있었다. 지금도 당시의 전통을 이어 받았던지 중부 유럽에는 소공국들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리히텐슈타인, 안도라, 산마리노 등이다. 왜 독일에는 작은 나라들이 산재하였던 것일까? 전통적으로 독일지역에서는 일국의 왕이 죽으면 그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어 다스리게 했기 때문에 나라가 자꾸 쪼개졌던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은 독일 국가들을 중심으로한 여러 나라들의 연합체로서 사실상의 영토는 보유하지 않고 있으며 군림할 뿐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로마 교황에 의해 대관식을 치루어야 황제(Imperator 또는 Emperor)라는 호칭을 사용할수 있었다. 그 이전에는 독일왕(King of German Nation)이라고 불렀다. 독일왕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되기 전 단계의 호칭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간혹 교황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독일왕은 그까짓 황제라는 타이틀을 받기 위해 굳이 로마까지 가서 굽신거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독일왕이라는 타이틀로서 만족하였다. 그러면서 교황을 견제하였다. 독일왕은 신성로마제국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국가, 공국 등의 대표들이 선출했다. 독일왕을 선출할수 있는 투표권을 가진 왕이나 제후들을 선제후라고 불렀다. 독일왕에 선출되는 절차는 대단히 복잡했다. 여러 정치적인 이권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선출되며 누가 선출하는지에 대하여는 나중에 설명코자 한다. 우선 신성로마제국의 출범 과정을 살펴보자.

   

신성로마제국의 출범(Holy Roman Empire)

라틴어: Sacrum Romanum Imperium 독일어: Heiliges Römisches Reich

 

로마가 대제국으로서 출범한 것은 저 유명한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서였다. 위대한 정복장군인 줄리어스 시저는 로마의 공화제를 무너뜨리고 사실상의 황제에 올라 로마제국의 천년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실제로 로마제국(Roman Empire)이라는 명칭은 기원전 27년, 시저가 암살당한 후에 권력을 잡은 시저의 조카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누구인가? 잠시 신약성서를 펼쳐 보기로 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누가복음 2장 1절에는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가이사(시저) 아구스도가 바로 옥타비아누스이다. 줄리우스 시저에 의해 다져진 나라를 로마제국이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사람이다. 줄리어스 시저가 브루투스에 의해 암살 당한후 옥타비아누스가 정적들을 물리치고 권력을 잡고 황제가 올랐다. 사람들은 그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존경하여 부르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말은 현명한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황제와 같은 존귀한 지위의 사람에게 붙이는 타이틀이기도했다. 그 아우구스투수라는 이름을 성경을 번역하는 중에 어쩐 일인지 아구스도라고 단축하여 부르게 되었다. 당시 유대 땅은 로마제국의 속령이었다. 황제에 오른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에 속하여 있는 모든 나라의 호적을 정리토록하여 세금을 제대로 받아내고 병역의 의무를 정확히 하고자 했다. 그래서 유대땅에서도 호적이 실시되었고 목수 요셉이 정혼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호적을 하러 갔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던 시기에 로마를 다스렸다. 로마제국의 황금기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이루어졌다.

 

라파엘이 그린 바티칸에서의 샤를르마뉴 대제의 대관식 

 

세월은 흘러 어느덧 기원후 4세기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틴)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누그든지 기독교를 믿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공인하였으며 수도를 로마로부터 콘스탄티노플(현재의 터키 이스탄불)로 옮겼다. 되도록이면 성지 예루살렘으로부터 가깝게 있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바티칸의 교황은 그대로 로마에 남아 있었다. 베드로가 순교한 바티칸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죽음을 맞자 그의 아들들이 제국을 멋대로 나누며 주도권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대로마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제국과 로마를 본거지를 둔 서로마제국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제국은 그런대로 별고 없이 지내게 되었지만 서로마제국은 476년 로물루수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가 황제로 있을 때에 게르만족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이로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선포되었던 로마제국은 동로마제국에 의해 명맥을 갖추게 되었지만 서로마제국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후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로마제국의 영토는 여러 군주들이 나누어 갖는 작은 나라들로 분할되었다. 그렇게 나누어진 나라 중에서 프랑크왕국의 세력이 가장 컸다. 오늘날의 중남부 독일을 차지하였던 왕국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인한 사연은 본 블로그의 <성물이야기>편을 참조하기 바람].

 

교황 히드리안이 로마를 방문한 샤를르마뉴 대제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세월은 계속 흘러 8세기 후반이 되었을 때 프랑크왕국의 걸출한 위인 샤를르마뉴(살레마뉴대제: 칼대제: Charlesmagne)가 유럽의 강호로 급격히 부상하였다. 카롤링거왕조의 후예인 샤를르마뉴 대제(大帝)는 북부 이탈리아까지 프랑크 왕국에 병합하며 기세를 올렸다. 샤를르마뉴의 생각은 유럽에 옛 로마제국처럼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한편, 바티칸에 있던 교황 레오3세는 교황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잠 못 이루며 여러 생각을 하다가 샤를르마뉴 대제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는 것이 유익하다는 생각을 했다. 교황은 샤를르마뉴 대제를 느닷없이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Augustus: 아우구스투스 황제)로 임명하였다. 즉, 325년간 존재하지 않았던 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한 것이다. 샤를르마뉴 대제는 줄리어스 시저, 또는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로마제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교황이 옛날 로마제국 황제의 타이틀인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을 내리자 ‘그러면 그렇지, 내가 누구인데, 아무튼 고마운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로마로 가서 교황으로부터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고 대관식을 가졌다. 그로부터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으려면 바쁜 중에도 로마까지 가서 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임명을 받는 전통이 생겼다. 그러나 그 전통도 종교개혁 이후에는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교황이 자기가 무언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임명하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아무튼 샤를르마뉴는 비록 타이틀에 불과했지만 드디어 그 옛날 유럽의 거의 전역을 손아귀에 넣었던 대로마제국을 계승한다는 생각에 감개가 무량했다.

 

바티칸에서의 샬레마뉴 대제의 대관식. 카울바흐 프리드리히 칼바흐 작. 1861년

 

샤를르마뉴는 이어 덴마크와 독일을 자신의 제국에 편입시켰으며 스페인에서 무어족을 몰아내는 일도 주도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유럽의 제후들이나 영주들은 교황이 임명한 샤를르마뉴의 권위를 고려하지 않을수가 없어서 샤를르마뉴를 마지못해 옛 로마제국의 황제와 같은 위대한 인물로 간주하고 복속하였다. 그러한 샤를르마뉴가 세상을 떠나자 누가 후계자가 되느냐를 놓고 약 30년 동안 분열시대로 들어갔다. 그 때에 독일에서 오토1세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다시 제후국들을 추슬러서 이번에는 정식으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아래 샤를르마뉴 대제가 누렸던 아우구스투스 황제로서 재출범하였다. 그러므로 신성로마제국은 샤를르마뉴 대제에 의해 출범하였으나 오토(Otto) 1세가 완성한 것이다. 얼마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왕관은 합스부르크 왕가로 건네졌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하여 신성로마제국의 깃발을 내려야만 했고 아울러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릴 때까지 거의 7백년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세습해온 유럽의 맹주였다. 신성로마제국이 막을 내린 것은 1806년 합스부르크의 프란시스 2세 황제때였다. 이것이 신성로마제국의 간략한 역사이다.

 

독일 아헨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샤를르마뉴 대제 금상

 

신성로마제국의 황제(The Holy Roman Emperor: 독일어로는 Romische-deutscher Kaiser, 라틴어로는 Romanorum Imperator)는 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통치자이다. 초기의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는 절대군주적인 독재자였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독재를 할수 없게 되었다. 비록 형식적이던지 아니던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거를 통해서 선출했기 때문에 선거인단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선거를 하는 선거인단을 선제후(Prince-electors)라고 불렀다. 라틴어로는 Imperator electus 이다. 선거인단(Electoral council)은 1356년의 금인칙서(Golden Bull)에 의하여 7명의 제후로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 3명은 대주교였고 4명만이 일반 제후였다. 이같은 7명 선거인단 제도는 수백년동안 지탱되다가 30년 전쟁이 마무리된 1648년에 비로소 개정되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발란스를 맞추기 위해 1명의 위원을 추가한 것이다. 그후 1690년에 또 다시 1명의 선기위원이 추가되었다. 그래서 총 9명이 되었는데 1803년에 가서 무슨 생각들을 했는지 대대적인 정비작업이 있었다. 그로부터 3년 후에 제국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1438년부터였다. 합스부르크 단독의 왕가는 샤를르 6세의 서거 이후에 합스부르크-로레인 왕가로 진로를 바꾸어 1차 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막을 내렸다. 물론 중간에 합스부르크가 개입하지 못한 시기도 있었다. 비텔스바흐의 샤를르 7세 알베르트가 황제였을 때였다. 바바리아 선제후인 샤를르 7세는 1742년부터 1745년까지 3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재임하였다. 샤를르 7세는 비록 비텔스바흐 왕가 출신이긴 하지만 합스부르크와 먼 혈통을 유지했었다.

 

합스부르크 왕조로서는 마지막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샤를르 6세.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이전까지는 아무리 선제후들이 선출한 황제라고 해도 일단 로마로 가서 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임명을 받고 취임식을 해야 교회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인정을 받았다. 중세에는 교회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으므로 바티칸이 하라는 대로 해야 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제국에 속한 모든 영토를 통치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우산 아래에 있으면서도 황제의 명령을 우습게 여기는 군주들이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고 해도 모든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목에 깁스를 대고 있는 다닐수있는 지역은 독일국가들,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의 왕국 정도였다. 이론적으로 보아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Primus inter pares 라고 해서 다른 모든 가톨릭 군주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야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자기의 군대로 통치할수 있는 지역에 한하여, 그리고 동맹이 되는 국가에 한하여 권세를 행사할수 있었다.

 

샬레마뉴 대제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로 임명을 받은 이래 여러 왕조들이 그 자리를 지켜왔다. 아무리 선제후들이 선거를 통해서 황제를 선출한다고 해도 세습제인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특히 합스부르크 왕조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차지한 이래 형식적으로는 선거를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자자손손 세습을 통해서 황제의 자리를 유지했다.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후 독일의 국가들은 거의 모두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는 개신교, 즉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되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가톨릭이어야 했다. 4세기경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시대로부터 로마황제들은 가톨릭 교회를 수호하는 역할을 다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독일국가의 군주들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사이에 여러 갈등이 있을수 밖에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이 대단원을 막을 내린 것은 프란시스 2세 황제 때였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위협을 느껴 어쩔수 없이 신성로마제국을 해산하고 역사의 페이지에서 영원히 이름을 감추었다. 1806년의 일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합스부르크-로레인 왕조의 프란시스 2세(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시스 1세)


로마제국의 통치자가 황제라는 타이틀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1세로부터였다. 그러다가 476년 교황이 서로마제국의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파면함으로서 서유럽에서는 로마제국의 황제라는 명칭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반면에 동로마제국에서는 1453년 동로마제국이 오토만 제국에 멸망할 때까지 로마제국의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서유럽에서 황제라는 호칭이 다시 부활한 것은 800년부터였다. 황제와 교황간의 새로운 파트너쉽이 부활해서였다. 중세에는 교황의 권세가 말할수 없이 커지자 국가를 다스리는 황제와의 마찰이 빈번히 일어났다. 가장 대표적인 갈등은 11세기에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 7세 사이에 벌어졌던 '책봉 논란'(Investiture Controversy)였다. 서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웠다. 교황으로서는 병력이 약하므로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다. 그러자 교황은 외부세력을 끌어서 하인리히 4세를 굴복시키려는 묘책을 개발했다. 그래서 살레마뉴가 교황으로부터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인지 무언지 하는 타이틀을 받고 교황편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샬레마뉴가 받은 타이틀은 계속 세습되어서 924년 이탈리아의 베렌가르 1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교황은 또 무슨 심사가 틀어지는 일이 있었는지 독일왕으로 선출된 사람에게 임페라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을 내려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38년만인 962년 오토 대제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대관식을 가짐으로서 황제라는 타이틀을 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토 대제와 그의 후손들의 시대에 과거 카롤링거 왕조가 통치하던 동부 프랑시아 왕국은 거의 모두가 신성로마제국의 우산 아래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대로부터 독일의 제후들이 자기들 중에서 한 사람을 독일 왕으로 선출하였는데 교황이 독일 왕을 황제로 임명하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행세하였다. 샤를르 5세의 대관식 이후 그의 후계자들은 여러 사정으로 대체로 교황의 임명을 받자 않았다. 이런 독일왕을 Emperors -Elect(선출 황제)라고 불렀던 시기가 있었다.

 

일곱명의 선제후들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고 있는 모습. 1341년 하인리히 7세를 선출할 당시.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타이틀에서 신성(Sacrum)이라는 단어는 1157년 바바로사의 프레데릭 1세부터 사용한 것이다. 샤를르 5세는 교황으로부터 임명받은 마지막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1530년의 일이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명칭은 '로마의 현명한 황제'(August Emperor of the Romans)였다. 라틴어로 말하면 Romanorum Imperator Augustus 였다. 800년에 샬레마뉴 대제가 황제로서 대관식을 가졌을 때에는 그에 대한 호칭이 '지극히 존귀하신 아우구스투스, 하니님으로부터 왕관을 받으신 분, 위대한 평화의 황제, 로마제국의 통치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하다'는 단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후손 황제들도 공식 문서에는 Holy(신성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님에게나 사용하는 신성하다는 단어를 어찌 감히 쓸수 있겠느냐는 생각에서라고 한다. 타이틀에 로마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서로마제국을 계승한다는 의미가 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중에서 가장 오랜기간 통치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


어떤 왕조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연관이 되는지 연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바쁜데 무어 이런것 까지 알아야 하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므로 적어 놓는바이다.

 

[오토 대제 이전의 황제를 배출한 왕조]

- 카롤링거(Carolingian) 왕조

- 귀데쉬(Guideschi) 왕조

- 다시 카롤잉거 왕조

- 보소니드(Bosonid) 왕조

- 운루힝(Unrouching) 왕조


나폴레옹과 합스부르크 로레인 왕조의 마리 루이제의 결혼식. 1810년 3월 11일. 마리 루이제는 프란시스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딸이다.

 

[오토 대제 이후의 황제를 배출한 왕조]

- 오토(Ottonian: 작손) 왕조

- 살리안(Salian: 프랑코니아) 왕조

- 수플린부르크(Supplinburg: 왕조

- 슈타우펜(Staufen) 왕조(또는 호엔슈타우펜 왕조)

- 벨프(Welf) 왕조

- 다시 슈타우펜 왕조

- 룩셈부르크(Luxemboug) 왕가

- 비텔스바흐(Wittelsbach) 왕가

- 합스부르크(Habsoburg) 왕가

- 다시 잠시동안 비텔스바흐 왕가

- 합스부르크-로레인(Habsburg-Lorraine) 왕가


일반적으로 합스부르크 왕가라고 부르는 합스부르크-로레인 왕가의 마지막 황제인 칼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로서의 대관식. 황비 치타와 황태자 오토와 함께. 19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