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 집중분석/HRE가 뭐길래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프란시스 2세 - 1

정준극 2015. 10. 28. 13:40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프란시스 2세 - 1

오스트리아제국 황제로서는 프란시스 1세

 

프란시스(프란츠)는 24세 때에 오스트리아 대공 및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윗 그림은 프란시스가 25세때의 모습이다. 나중에 그는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선포하고 스스로 초대 황제가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초석을 놓은 샬레마뉴 대제가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과 함께 새로운 로마 황제로서 대관식을 가진 것은 800년이다.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시스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막을 내린 것은 1806년이다. 그러므로 신성로마제국은 계산상 1천년이 넘는 연륜을 기록하고 있다. 그나저나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시스 2세는 어떤 사람인가? 우선 출신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프란시스 2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손자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부군 프란시스 스테판과의 사이에서 16 자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이 나중에 요제프 2세 황제가 된 사람이며 둘째 아들이 요제프 2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레오폴드 2세이다. 프란시스 2세는 바로 레오폴드 2세의 큰 아들이다. 프랑스의 루이 15세와 결혼하였으나 나중에 혁명의 와중에서 길로틴으로 목숨을 잃은 저 유명한 마리 앙뚜아네트는 요제프 2세와 레오폴드 2세의 누이동생이 된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열다섯번째 자녀이다. 프란시스 2세는 마리 앙뚜아네트의 조카가 되며 마리 앙뚜아네트는 프란시스 2세의 고모가 된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프란시스 2세의 고모이다.

 

유럽 왕실간의 얽히고 설킨 인척관계는 말할수 없이 복잡한 것이다. 사촌간의 결혼은 별로 신통한 일도 아니다. 누이동생과 결혼하는 일도 있고 삼촌이 조카와 결혼하는 일도 흔하다. 그러다보니 족보를 정리하는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합스부르크 왕가의 경우에 그러하다. 결혼으로 사방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기 때문에 한집 건너 두 집이 최소한 사촌간이다. 프란시스 2세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프란시스 2세의 딸인 마리 루이제(Marie Luise)는 비록 정략적이기는 하지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두번째 부인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첫번째 부인인 조세핀과 이혼을 하고 새장가를 들 궁리를 하는 중에 마리 루이제와 결혼한 것이다. 그러므로 프란시스 2세는 나폴레옹의 장인어른이 된다. 오스트리아의 역대 영웅 중에서 가장 먼저 손꼽히는 인물로 샤를르 대공(Archduke Charles)이 있다. 샤를르 대공은 아슈페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친 장군이다. 돌이켜 보면, 프란시스 2세 시절에는 나폴레옹 군대와 여러번에 걸친 전투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프란시스 2세의 오스트리아 군대는 번번히 패배하였다. 그러다가 샤를르 대공이 아슈페른 전투에서 막강의 나폴레옹 군대를 모처럼 물리친 것이다. 사람들은 샤를르 대공을 오스트리아의 구국영웅이라고까지 부르며 찬양했다. 비엔나 시가지의 중심지역인 헬덴플라츠의 한쪽에 장엄하게 서 있는 기마상이 샤를르 대공이다. 그 샤를르 대공으로 말하자면 프란시스 2세 황제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한편,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슈타츠오퍼)의 뒤편에는 세계적인 그래픽 미술관인 알베르티나가 있다. 알브레헤트 대공의 궁전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것이다. 그래서 알베르티나 미술관 입구의 테라스 광장에 알브레헤트 대공의 기념상이 있다. 알브레헤트 대공은 샤를르 대공의 아들이므로 프란시스 2세 황제의 조카가 된다. 유럽 역사에 있어서 가장 오래기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오스트리아제국(나중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프란시스 2세 황제의 손자가 되며 요즘 영화나 뮤지컬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부인인 엘리자베트(씨씨)는 프란시스 2세 황제의 손자 며느리가 된다. 그나저나 레오폴드 2세도 인생 50을 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갔는데 그동안 자식 농사는 열심히 지어서 슬하에 모두 16명의 자녀를 두었다. 레오폴드 2세  자신의 형제자매들도 16명이나 되는 것을 보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둔둔하게 보이는 이 여인이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이다. 자녀를 16명이나 생산했다. 둘째 아들이 레오폴드 2세 황제이다.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레오폴드 2세도 16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에서 큰 아들이 프란시스 2세(또는 프란시스 1세) 황제이다. 그러므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란시스 2세의 친할머니이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프란시스 2세 자신의 가족에 대하여 소개하면 그는 아무래도 황제라서 그런지 부인을 네명이나 두었다. 네명을 한꺼번에 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면 부인이 얼마 후에 자꾸 죽는 바람에 네번이나 결혼한 것이다. 첫번째가 독일 뷔르템버그의 엘리자베트이며 둘째가 나폴리의 마리아 테레사, 셋째가 오스트리아 에스테(Austria-Este)의 마리아 루도비카, 넷째가 바바리아의 카롤리네 아우구스타이다. 프란시스 2세는 이들 4명의 부인에게서 모두 5남 8녀를 두었다. 첫째는 딸인데 1790년에 태어나서 1791년 유아 때에 세상을 떠났으니 안되긴 했지만 가족이라고 말하기가 무엇하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율이 매우 높아서 후손을 다만 한두명이라도 건지려면 자꾸 생산해야 했다. 아무튼 그래서 두번째로 태어난 마리 루이제가 여러 형제자매들의 맏이 노릇을 하였다. 이 마리 루이제가 나중에 나폴레옹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나폴레옹 3세이다. 마리 루이제 다음으로 태어난 아기가 나중에 프란시스 2세 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1세이고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이 프란츠 요제프 1세이다. 프란시스 2세 황제의 주변은 아주 간단히 말해도 이렇게 복잡하다. 그러나 합스부르크와 유럽의 다른 왕실들과의 관계를 파고 들어가면 서로 사촌간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이므로 너무 복잡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 된다. 그래서 이쯤해서 가족사항이야기는 마무리하고자 한다.

 

유럽 역사에서 가장 우랜 기간 군주의 자리에 있었던 오스트리아제국(나중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 무려 68년이나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프란시스 2세의 손자이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부인이 씨씨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큰 아들인 요제프는 아버지 프란시스 스테판(프란시스 1세)이 1765년에 세상을 떠나자 부왕의 직위를 모두 물려 받아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의 대공이 되었다. 그러나 그전부터 어머니가 명목상의 황제인 아버지를 대신해서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기타 영토들을 다스려 왔으므로 요제프도 비록 황제로서 대관식을 가지고 요제프 2세가 되었지만 제국 내의 모든 영토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공동으로 통치하였다. 그러다가 1780년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세상을 떠나자 그때부터는 단독 통치에 들어갔다. 요제프 2세는 처음에 이탈리아 파르마 공국의 이사벨라 공주와 결혼하였다. 이사벨라 왕비는 딸만 둘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 요제프 2세는 혼자 살려고 했다가 그래도 아들을 얻어야한다는 생각으로 바바리아의 마리아 요제파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요제프 2세 황제는 아들을 얻지 못하고 1790년에 향년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의 일이었다. 요제프 2세라고 하면 우리가 잘 아는대로 모차르트에게 독일어로 된 오페라의 작곡을 의뢰하였고 그래서 '후궁에서의 도주'가 탄생하게 된 바로 그 요제프 2세이다. 아무튼 요제프 2세는 모차르트를 높이 평가해서 여러가지로 후원하였다. 그건 그렇고, 요제프 2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다음 황제의 자리는 당연히 남동생인 레오폴드에게 돌아갔다.

 

 

프란시스 2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 2세와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 두 사람은 13자녀를 생산했다.

 

그때 레오폴드는 비엔나에서 멀리 떨어진 이탈리아 투스카니 공국의 대총독이었다. 그래서 프란시스 2세도 투스카니 공국의 플로렌스(피렌체)에서 태어났다. 황제가 된 프란시스의 아버지 레오폴드는 가족들을 데리고 비엔나로 자리를 옮겼다. 여담이지만 모차르트는 새로 황제가 된 레오폴드에게 잘 보이려고 대관식에서 연주할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레오폴드는 형인 요제프 2세와는 달리 모차르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나저나 레오폴드는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좀 사치스러운 면이 있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제국내의 여러 도시에서 차례로 거행하고 싶어했다. 프랑크푸르트, 비엔나, 프라하에서 순차적으로 대관식을 가지고 싶어했다. 모차르트가 레오폴드의 관심을 얻기 위해서 피아노 협주곡 '대관식'을 가지고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대관식에서 연주를 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모차르트는 다음번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레오폴드는 프라하에서 1791년 9월에 또 다른 대관식을 가지기로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모차르트는 이번에야 말로 좋은 작품을 연주해서 레오폴드의 관심을 얻고자 했다. 모차르트는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프라하의 어떤 귀족의 주선으로 경축 오페라를 작곡하여 대관식을 축하하는 공연을 갖게 되었다. 그때 모차르트는 비엔나의 친구 쉬카네더의 요청으로 오페라 '마술피리'를 작곡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술피리'를 완성하는 것보다도 레오폴드 황제의 대관식 축하용 오페라를 새로 작곡하는 것이 더 중요해서 마침내 '티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를 완성했다. '티토의 자비'는 1791년 9월 6일에 프라하에서 대관식에 즈음해서 초연되었다. 그후 모차르트는 미완성인 '마술피리'를 완성하기 위해 밤을 낮삼아서 작곡에 전념했다. 그리하여 '마술피리'는 비엔나의 뷔드너극장에서 1791년 9월 30일에 초연되었다. 그로부터 약 두어달 후인 12월 5일 모차르트는 '진혼곡'을 미완성으로 남긴채 저 세상으로 떠났다. 모차르트와 레오폴드 2세와는 아무런 인연도 갖지 못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티토의 자비'. 레오폴드 2세 황제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되어 1791년 9월에 대관식이 열리는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사진은 메트로폴리탄 공연.

 

한편, 프란시스의 아버지인 레오폴드가 황제로 되긴 했지만 2년 후인 1792년 3월 1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혹자는 독살되었다고 얘기했고 혹자는 살해되었다고 말했지만 원인은 알수 없었다. 그때문에 큰아들인 프란시스가 자동적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프란시스가 24세때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그리고 나중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로서 프란시스 2세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프란시스 2세가 황제에 오른지 두어달 후인 5월 15일에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도 세상을 떠났다. '남편 없는 세상, 살아서 무얼하나'라는 생각을 가졌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남편이 세상을 떠난지 두달 며칠만에 남편을 따라 요단 강을 건너갔다. 그때 마리아 루이사의 나이는 46세였다(참고로 말하자면 남편 레오폴드 2세는 44세였다). 비엔나의 호프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란시스 2세는 자기의 대관식도 대관식이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장례식을 계속 치루며 바쁜 시간을 보내지 않을수 없었다. 프란시스 2세의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는 보통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라고 불리는 사람이지만 태어난 곳은 스페인이 아니라 니폴리이다.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라고 불리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나중에 스페인의 카를로 3세 국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는 중매로 프란시스 2세의 아버지 레오폴드 2세와 결혼하게 되었고 결혼 생활 27년동안 13자녀를 두었다.  

 

프란시스의 아버지인 레오폴드는 바로 위의 형인 요제프 2세가 황제가 되어 재임하고 있지만 두번이나 결혼했는데 후사가 없자 아무래도 요제프 형님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기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의 대공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어서 그는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자기의 큰 아들인 프란시스가 자기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것으로 예견하고 어린 프란시스를 비엔나에 보내서 형님 황제인 요제프 2세의 휘하에 두어 제왕이 되는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렇게해서 플로렌스에서 잘 놀고 있던 프란시스는 16세 때에 비엔나의 궁전으로 들어갔다. 아들이 없어서 항상 심란하게 생각하고 있던 요제프 2세는 자기가 얼마 못살고 죽을 것으로 예상을 했는지 하여튼 동생의 아들인 프란시스의 제왕교육에 직접 나서서 관리하였다. 그런데 요제프 2세는 프란시스가 말도 별로 없으면서 고집만 세고 행동도 민첩하지 못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요제프 2세는 동생 레오폴드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이 아이가 아무래도 마마보이로 자라서 버릇이 없고 제멋대로이며 사리판단도 제대로 못한다'고 말했다. 집안에서 그저 옹야옹야 소리만 들으면서 엄마의 치마폭 속에서만 지내다가 대제국의 수도에 와서는 기가 죽어서인지 좀 이상한 아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요제프 2세는 결론적으로 프란시스가 자기만을 아는 소심하고 고집센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어떤 처방을 내려야 하는가? 요제프 2세는 군대식으로 힘들고 딱딱한 교육을 시키기로 결심했다. 소년 프란시스에게는 삼촌 요제프 2세의 교육이 두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내키지 않기 때문에 점점 혼자서만 시간을 보내는 고독한 사람이 되었다. 요제프 2세는 '저렇게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나로서는 이제 아무것도 할수 없다'면서 두 손을 들었다. 그런데도 프란시스는 삼촌인 요제프 2세가 두려우면서도 그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생각하였다.

 

레오폴드 2세와 요제프 2세 황제. 1769년 폼페오 바토니 그림. 두 사람은 다른 어느 형제들보다 가깝게 지냈다. 그래서 레오폴드는 자기 큰아들인 프란시스를 비엔나에 보내어 형인 요제프 2세의 손에 교육을 받도록 했다.

                 

아무튼 그렇게 교육을 받으면서 시간이 지나자 프란시스는 어느새 군대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군대에 있는 것이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서 지내는 것보다 좋았다. 요제프 2세는 프란시스에 대한 마지막 교육과정으로서 프란시스를 헝가리 연대에 보내어 전투훈련을 받도록했다. 프란시스는 그 훈련을 별로 어려움 없이 받았다. 이러한 군대훈련은 훗날 프란시스가 황제가 되어 열강들과 전쟁을 벌일 때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1790년에 요제프 2세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프란시스의 아버지인 레오폴드가 레오폴드 2세로서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레오폴드 2세는 사실상 오래전부터 자기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상을 했었다. 말하자면 '준비된 황제'였다. 레오폴드 2세는 계몽군주인 형 요제프 2세가 시행한 여러가지 개혁으로 제국내에서 반발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는 형 요제프 2세와는 다르다는 새로운 이미지를 제국내에 널리 선전하기 위해 그저 제국내를 순방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제국내의 여러 곳에서 거행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그런데 문제는 건강은 생각하지 않고 너무 열심히 돌아다니다보니 1791년 겨울쯤해서는 그만 병에 걸렸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채 몇 달후인 이듬해 3월 1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44세였다. 그리고 아들 프란시스가 24세의 젊은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빨리 황제가 된 것이다.

 

레오폴드 2세의 황제 대관식 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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