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 집중분석/HRE가 뭐길래

경건왕 루이의 파란만장 인생

정준극 2015. 10. 27. 10:24

경건왕 루이의 파란만장 인생

 

프랑크 왕국의 루이 1세

 

루이는 샬레마뉴 대제의 셋째 아들이지만 위로 두 형이 모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샬레마뉴의 뒤를 이어 대프랑크왕국의 왕이 되고 아울러 샬레마뉴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받은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라는 황제에 버금하는 호칭도 받았다. 루이는 아버지 샬레마뉴와 마찬가지로 신앙심이 너무 좋아서 사람들은 그를 '경건왕'(Louis the Pious)라고 불렀다. 경건하다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루이는 자기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는 참회를 잘했다. 남들에게 보이려고 일부러하는 쇼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참회를 잘 한다는 것은 경건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것 같다. 814년에 루이가 아버지 샬레마뉴의 서거 소식을 들은 것은 앙주(Anjou)에 있는 빌라에서 별로 할일 없이 쉬고 있을 때였다. 1월 28일의 일이었다. 814년이면 우리나라로서는 통일신라 시대였다. 아버지 샬레마뉴의 서거 소식을 들은 루이는 당장 짐을 꾸려서 아헨으로 갔다. 며칠 후 루이는 아헨에서 스스로 대관식을 가지고 제3대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취임했다. 루이는 대관식에 참석한 귀족들이 '루이 황제 만세'(Vivat Imperator Ludovicus)라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 그제서야 '아하, 내가 황제가 되었구나'라며 만족해 했다고 한다. 루이는 선왕인 샬레마뉴의 이미지를 닮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너무나 유명한 샬레마뉴 대제의 뒤를 이은 마당에 사람들로부터 너무 얕잡아 보이게 되면 안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우선 기념주화를 만들었는데 자기의 얼굴인지 샬레마뉴의 얼굴인지 모를 정도로 거의 똑같이 그려 넣었다. 평소에 입는 옷도 샬레마뉴 처럼 입었다. 루이가 프랑크왕국의 왕이 되었을 때 루이에게는 남자 형제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서 하나도 없었고 여자 형제들만 다섯이나 있었다. 루이는 미혼의 여자 형제들을 모두 수녀원으로 보내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나중에 이들이 결혼해서 남편들과 합세하여 자기에게 대항할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내린 조치였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샬레마뉴가 이곳저곳 다니면서 만들어 놓은 두어명의 이복 동생들, 그리고 사촌형제들까지도 찾아서 모두 삭발을 시키고 수도원으로 보냈다. 사촌들 중에는 전부터 루이에게 충성을 바치던 사람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는 그마저 가차없이 수도원으로 보냈다.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하는 루이 1세. 822년 아티니(Attigny)에서.

 

루이는 두명의 수석자문관을 새로 임명했다. 셉티마니아의 변경백인 베르나르드와 렝의 대주교 에보(Ebbo)였다. 렝의 대주교 에보는 원래 농노출신이었으나 일찍이 루이가 데려다가 보살펴주었다. 그런데 에보 대주교는 나중에 루이의 하는 짓을 도저히 볼수 없다고 해서 배신을 했다. 루이가 프랑크 왕이 된지 2년 후인 816년에 교황 스테픈 4세가 렝으로와서 루이를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하는 대관식을 주재하여 주었다. 교황이 직접 프랑크 왕국까지 와서 루이의 대관식을 치루어주자 루이는 그제서야 당당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교황청과의 관계를 매우 돈독히 하였다. 루이가 렝에서 대관식을 가진 이듬해인 817년에 그는 아헨대성당에서 미사에 참석한후 궁전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갑자기 대성당 회랑의 기둥과 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수행하던 사람 여러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졌다. 겨우 목숨을 건진 루이는 '하아, 이건 무슨 하늘의 징조란 말인가'라면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이참에 후계자를 정해 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루이는 40세도 안된 39세였다. 얼마후 루이는 Ordinatio Imperii 라는 황제의 칙령을 발표했다. 다음번 왕위 계승 순위를 명시한 칙령이었다. 루이(루이 1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로타르(Lothair)와 페핀(Pepin)과 루이(Louis)였다. 루이는 칙령을 통해서 큰 아들 로타르를 자기와 함께 프랑크 왕국의 공동왕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로타르에게 나중에 프랑크 왕국의 거의 모두를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로타르는 큰 아들이기 때문에 나머지 동생들이나 사촌들과는 달리 대군주로서 대우를 받도록 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둘째 아들 페핀은 아퀴텐의 왕으로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페핀은 아퀴텐 왕으로서 가스코니, 그리고 툴루스 일대의 변경 영지들, 아발론과 네베르등 군소국가들도 관할토록했다. 셋째 아들 루이에게는 바바리아와 인접 변경 영지들을 통치토록 했다. 세 아들은 각각의 영토에서 왕으로서 행세토록 하였다. 그리고 누구 한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 아들이 대를 이어 국왕이 되도록 했다. 또한 둘째와 셋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난다면 큰 아들인 로타르가 동생들의 왕국을 이어 받도록 했다. 만일 큰아들 로타르가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 다음의 동생이 대를 잇는 것으로 했다. 유럽의 대다수 군주들은 아들들에게 자기의 영토를 균등하게 나누어 주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러나 루이 1세는 프랑크 왕국의 대부분을 큰아들이 상속하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루이 1세의 부왕인 샬레마뉴의 대관식

               

루이 1세의 사촌으로서 롬바르디 왕인 베르나르드는 루이 1세가 칙령으로서 큰아들 로타르에게 막강한 권력을 약속하자 잘못했다가는 자기의 위치가 위태롭게 될수 있다고 생각했다. 루이 1세의 칙령은 결국 베르나르드를 로타르의 봉신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베르나르드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할 생각을 했다. 베르나르드는 비밀리에 군대를 모으고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비밀이란 없었다. 그런 소식을 들은 루이 1세는 군대를 신속하게 롬바르디로 파견하였다. 베르나르드는 설마 루이 1세가 그렇게 신속하게 군대를 동원할 줄을 몰랐다. 루이 1세는 롬바르디에 대한 전격적인 군사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그래도 사촌인데 왜 반란을 획책했는지 얘기나 들어보자고 해서 베르나르드를 오라고 해서 진중에서 만났다. 베르나르드는 돌아가는 사정을 짐작하고 삼촌인 루이 1세에게 항복했다. 루이 1세는 베르나르드를 반역죄로 선고하여 처형토록 했다. 루이 1세는 우선 베르나르드의 두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들었다. 베르나르드는 고통 속에서 이틀 후에 죽었다. 베르나르드를 마음으로 지원했던 사람들도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또 다른 사촌인 오를레앙의 테오덜프 영주는 샬레마뉴 대제가 세상을 떠난 후에 자기의 지위가 소외되는 것을 느끼고 베르나르드의 편에 섰었다. 루이 1세는 테오덜프를 체포하여 수도원의 지하감옥에 가두었다. 얼마후 테오덜프도 숨을 거두었다. 소문에 의하면 독살되었다고 한다. 루이 1세는 사촌을 죽였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평생동안 괴로워했다고 한다. 루이 1세는 822년에 마침 교황 파스칼 1세가 프랑크 왕국을 방문하자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촌 베르나르드를 죽인 것을 크게 참회하는 이벤트를 수행하였다. 수많은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참석한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루이 1세는 이복 동생들과 화해를 하는 이벤트도 연출하였다. 그리하여 이복 동생인 휴고는 생퀜탱 수도원장으로 삼았으며 또다른 이복 동생인 드로고는 메츠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렇지만 불씨는 사그러지지 않았다. 루이 1세는 재임 중에 세번이나 커다란 내전에 시달려야 했다. 모두들 이른바 '왕자의 난'이었다. 서로 권력을 잡으려는 욕심 때문에 일어난 내전들이었다.

 

루이 1세가 프랑크 왕국을 네 아들에게 나누어 줌. 로타르, 페핀, 독일의 루이, 이복동생인 샤를르

 

[첫번째 내전]

818년이 되었다. 루이 1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된지도 4년이 지났다. 루이 1세는 그 4년 동안 전쟁도 많이 치루었다. 변방의 민족들이 프랑크 왕국을 계속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루이 1세는 브리타니 전투에서 겨우 승리하여 아헨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때 급한 소식이 전해졌다. 왕비 에르멘가르데(Ermengarde)가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었다. 에르멘가르데는 루이 1세의 첫번째 부인으로서 헤스바예 공작의 딸이다. 루이 1세가 왕이 되기 20년전에 결혼한 사이이다. 루이 1세와 에르멘가르데는 3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큰 아들이 로타르이고 둘째 아들이 페핀이며, 셋째 아들이 독일의 루이(Louis of German)이었다. 로타르는 중부 프란시아의 왕이었도 페핀은 아퀴텐의 왕이었으며 독일의 루이는 동부 프란시아의 왕르로 봉해졌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더 하자면 루이 1세의 두번째 부인은 바바리아의 유디트인데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다. 아들이 서부 프란시사의 왕으로 봉해진 대머리왕이라는 별명의 샤를르(Charles the Bald)였다. 세번째 부인은 부인이라고까지 할 형편은 아닌 내연의 처인데 두 아들을 두었다. 두 아들 모두 적생이 아니기 때문에 서자로 취급되었다. 다시 첫번째 부인 에르멘가르데의 서거이야기로 돌아가면, 루이 1세는 에르멘가르데의 서거를 무척이나 애통해 하였다. 깊이 사랑했기 때문인지 결혼한지 5년 동안 여섯 자녀를 두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에르멘가르데는 애나 낳는 여자가 아니었다. 프랑크 왕국의 정치문제에도 깊숙히 관여해서 남편인 루이 1세를 코치했다. 소문에 의하면 에르멘가르데는 롬바르디 왕의 죽음에도 간여했다는 것이다. 그정도로 루이 1세와 콤비여서 지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루이 1세는 부인 에르멘가르데의 죽음을 하늘의 뜻이므로 받아 들일수 밖에 없다고 믿었다. 다만, 에르멘가르데가 저지를 악행들로 인하여 하늘의 심판을 받아 죽게 되었다고 믿는 점은 있었다.

 

루이 1세의 큰 아들인 로타르(로타르 1세)

 

왕비 에르멘가르데가 죽자 신하들과 친척들은 루이 1세에게 '왕국에 왕비가 없으면 안되니 어서 왕비를 맞아 들이소서'라면서 재혼을 끈질기게 권했다. 마침내 루이 1세도 국가에 국모가 없으면 안된다니 어쩔수가 없어서 재혼키로 했다. 루이 1세는 820년에 알트도르프 백작의 딸인 유디트(Judith)와 결혼하였다. 결혼한지 3년 후인 823년에 아들 샤를르가 태어났다. 루이 1세가 45세의 장년이던 때였다. 루이 1세는 늦으막해서 얻은 아들 샤를르가 귀여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두번째 부인인 유디트도 아주 곰살맞게 굴어서 도무지 밉지가 않았다. 루이 1세는 샤를르의 앞날을 위해서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프랑크 왕국의 일부를 떼어서 샤를르에게 주는 것이 아비로서 할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루이 1세는 829년에 어린 아들 샤를르에게 알레마니아를 떼어 주고 왕(또는 공작)으로 임명했다. 알레마니아는 프랑크 왕국의 노른자나 마찬가지의 영토였다. 오늘날 아헨 축구팀의 이름이 알레마니아인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러자 첫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세 아들들이 잠자코 앉아서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자기들에게 주어졌던 영토가 샤를르인지 무언지하는 어린아이 때문에 이미 줄어들었고 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것을 생각하니 잠을 제대로 잘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20여년간 끊이지 않고 계속된 내전이 비롯되었다.

 

루이 1세가 망년이 들었는지 하여튼 프랑크 왕국의 노른자위인 알레마니아를 두번째 부인이 낳은 아들 샤를르에게 주자 가장 분개한 사람은 큰아들 로타르이었다. 루이 1세는 이미 칙령을 통해서 로타르에게 프랑크 왕국의 거의 전부를 상속한다고 했고 이미 중부 프란시아의 왕으로 임명을 받았는데 자기의 통치할 땅 중에서 알레마니아를 떼어서 이복 동생에게 주었으니 속이 상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 로타르에게 발라(Wala)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발라가 누구냐하면 샬레마뉴 대제의 사촌으로서 코르비 수도원장이었지만 샬레마뉴 대제 때부터 왕의 자문관으로 활동하였고 그후 루이 1세의 자문관이었으며 나중에는 로타르의 자문관을 지낸 인물이다. 발라는 기본적으로 조카뻘이 되는 루이 1세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루이 1세는 그런 발라가 권력을 잡을 것을 두려워 해서 왕이 되자마자 발라를 수도원장으로 쫓아보내어 정치에서 손을 떼도록 했다. 그러다가 루이 1세는 복잡한 국제사회에서 아무래도 발라만큼 정치적 수완이 있는 사람이 없어서 다시 불러들여서 자문관으로 삼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발라로서는 비록 루이 1세의 자문관으로 있지만 과거에 루이 1세가 자기를 증오하여서 수도원으로 추방한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로타르가 아버지 루이 1세의 처사에 대하여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 거리자 로타르의 편에 서서 루이 1세에게 등을 돌렸다. 루이 1세는 모든 것이 요부와 같은 유디트 때문이므로 유디트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이 1세는 유디트가 루이 1세의 수석 자문관인 셉티마니아의 베르나르드와 간통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샤를르가 루이 1세의 아들이 아니고 실은 베르나르드의 아들이라고 내세웠다. 셉티마니아는 프랑스 서남부 지중해에 면한 지역으로 유태인 자치국이었다. 그 셉티마니아의 영주가 유태인인 베르나르드인데 유디트도 이름을 보면 알수 있지만 유태계이므로 서로 눈이 맞아서 간통을 저질렀다는 얘기였다.

 

루이 1세의 또 다른 수석자문관인 렝의 대주교 에보(Ebbo)도 루이 1세로부터 등을 돌렸다. 리옹의 대주교와 아미엥의 대주교도 루이 1세로부터 등을 돌렸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왕국의 분열을 싫어하므로 루이 1세가 왕국을 쪼개어서 어린 샤를르에게 준 것을 대단히 반대했다. 830년에 발라는 아퀴텐의 왕 페핀에게 베르나르드가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베르나르드를 막지 않으면 프랑크 왕국은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페핀은 가스코니의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군하였다. 셋째 아들인 독일의 루이고 둘째 형인 페핀을 돕기로 했다. 그때 루이 1세는 또 다시 벌어진 브리타니 전투를 끝내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전쟁은 프랑크 왕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루이 1세의 군대는 페핀이 이끄는 군대에게 포위되었으며 마침내 루이 1세는 페핀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왕비 유디트는 뿌아티에란 곳에 유배되었고 사실 영문도 잘 모르는 베르나르드는 우선 살고보자는 생각에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도망갔다. 한편, 반란의 주역이 되어야 하는 로타르는 롬바르디에서 군대를 모아서 오느라고 시간이 지체되어 프랑크 왕국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사태가 끝난 후였다. 페핀의 포로로 잡혀 있는 루이 1세는 아마도 강압에 의해서 그랬겠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페핀과 독일의 루이에게 더 많은 영토를 상속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신분도 봉신에서 왕의 반열로 격상해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큰 아들 로타르는 분개하여서 당장 각 제후들과 영주들을 소집하여 프랑크 왕국의 앞날에 대한 회의를 갖자고 했다. 그러자 아우스라시아의 영주와 라인란드의 영주들이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서 세 아들을 불러 놓고 불효막심한 자식들이라고 비난하면서 당장 구금되어 있는 루이 1세를 석방하고 그의 발 아래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라고 했다. 그리고 로타르를 비롯한 아들들이 용서를 받도로 ㄱ했다. 그러나 이들은 반역사건을 로타르가 주도한 것으로 간주하여 로타르를 이탈리아로 추방하였다. 페핀은 아퀴텐으로 돌아갔으며 유디트는 베르나르드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크게 맹세한 후에 아헨의 궁전으로 돌아갔다. 한편, 로타르와 페핀을 부추켜서 반역을 일으켰던 발라는 스위스 제네바 호반의 어떤 작은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발라에 동조하였던 다른 대주교들도 각각 적당한 처벌을 받았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두번째 내전]

두번째 내전은 첫번째 내전이 겨우 마무리된지 고작 2년 후에 일어났다. 둘째 아들 페핀은 첫번째 내전에서 반란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지만 큰 아들 로타르에 비하여 별로 심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아헨의 궁정에서는 이 문제를 가지고 논란이 많았다. 그래서 일단 페핀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다시한번 따져보자고 결정했다. 페핀이 저 남쪽 아퀴텐으로부터 아헨으로 불려왔다. 페핀은 아헨의 궁전에서 기분 나쁠 정도의 푸대접을 받았다. 모두들 말은 안하지만 '반역자가 왔구나'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왕비인 유디트부터 페핀을 미워했으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었다. 매우 불쾌해진 페핀은 아버지 루이 1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퀴텐으로 그냥 돌아갔다. 그러자 루이 1세는 페핀이 아퀴텐에 돌아가서 분명히 반역을 획책할 터이니 미리 막는 것이 상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휘하의 모든 군대에게 아퀴텐으로 집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반란이 일어나면 그 자리에서 궤멸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틈을 타서 독일의 루이가 슬라브 동맹국들의 군대와 연합하여 프랑크 왕국 북부의 슈봐비아를 점령했다. 아버지 루이 1세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다. 아무튼 이래서 그 단단하던 프랑크 왕국도 분열되어야  했다. 루이 1세는 기왕에 남쪽 아퀴텐으로 내려왔기에 기분도 그렇지 않고 해서 페핀을 아퀴텐의 왕으로부터 폐위시키고 문제의 아들인 샤를르를 아퀴텐의 왕으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아직은 가만히 있는 큰아들 로타르에게 프랑크 왕국의 나머지 영토를 모두 상속한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실은 로타르의 생각은 다른데 있었다. 지난번에는 성공을 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반란을 일으켜서 루이 1세를 편히 쉬도록 하고 자기가 프랑크 왕국의 전권을 손에 넣을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로타르의 심복들이 아퀴텐에 있는 페핀과 은밀히 연락하였고 마찬가지로 독일의 루이에게도 연통하여 반란에 동참하도록 했다. 로타르는 동생인 독일의 루이에게 반란이 성공하면 샤를르가 받았던 알레마니아 왕국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로타르는 아버지 루이 1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교황 그레고리 4세의 사무실을 찾아가서 사정이 여차여차하니 제발 지원해 달라고 해서 약속을 받았다. 이제 아버지와 자식들 사이에 전투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봄스(Worms)에서 새로운 군대를 모집한 루이 1세는 남쪽으로 진군했으며 로타르는 북쪽으로 진군해 갔다. 두 군대는 로트펠트(Rothfeld) 평원에서 맞서게 되었다. 이때 교황 그레고리가 뜻밖에도 이곳까지 와서 루이 1세의 진영을 찾아가서 루이 1세를 만났다. 교황은 집안에서 분쟁을 일으킨 것은 루이 1세 자신이니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원래대로 모든 것을 수습하라고 종용했다. 그건 그렇고 교황이 나타나자 루이 1세의 진영은 어수선해졌다. '교황께서 루이 1세를 꾸짖으러 오셨는데 우린 뭐냐?' 면서 '부자간의 전쟁에 왜 우리들이 희생되어야 하느냐?'는 생각들을 했다. 다음날 아침에, 루이 1세의 군대는 마치 수증기처럼 어디론가 증발해 버리고 빈 막사만이 남아 있었다. 루이 1세는 한심해서 말이 안나왔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그나마 남아 있는 장병들에게 '어서들 집으로 돌아가시오. 나때문에 그대들의 목숨을 잃거나 또는 불구자가 된다면 그건 안될 일이요'라고 말했다. 루이 1세는 프랑크 왕국의 왕위와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까지 모두 사임하고 오늘날 프랑스 수아송 지방의 생메다르(St Médard)에 가서 지내기 시작했다. 말썽의 원인인 샤를르는 독일 라인란트의 프륌(Prüm)으로 유배되었고 왕비 유디트는 이탈리아의 토르토나(Toortona)로 보내졌다. 교황 그레고리의 방문으로 루이 1세의 병사들이 모두 도망쳤으며 그때문에 루이 1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모욕을 당한 지역은 훗날 Field of Lies(Lügenfeld: 거짓의 평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833년 11월에 렝의 대주교인 에보는 수아송의 성모교회에서 공회를 열고 이미 폐위된 루이 1세에게 그동안 지은 많은 죄에 대하여 만백성 앞에서공식적으로 참회하라고 했다. 그러나 에보 대주교가 나열한 루이 1세의 죄목을 보면 사실상 루이 1세가 지은 죄라고 말할수 있는 것은 없었다고 한다. 아무튼 로타르는 에보의 이러한 적극적인 행동에 보답하기 위해 생바스트(St Vaast) 수도원을 선물로 주었다. 위대한 샬레마뉴 대제의 적자로서 대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승계했던 경건왕 루이 1세는 그후 꽁피에느대성당에서 다시한번 참회를 해야했고 말할수 없는 모욕을 당했다. 루이 1세가 말할수 없는 모욕을 받자 과거에 샬레마뉴 대제와 루이 1세에게 충성했던 아우스트라시아와 작소니의 귀족들이 분개한 나머지 로타르에게 반기를 들었다. 갑자스런 공격을 받은 로타르는 몇몇 충복들만 데리고 브루군디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루이 1세는 이듬해인 834년 3월 1일에 왕위를 다시 찾았다. 로타르의 편에 서서 루이에게 반기를 들었던 발라 등은 이탈리아에서 역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루이 1세에게 참회하라면서 모욕을 주었던 에보 등은 모두 성직에서 쫓겨나서 원지로 추방되었다. 로타르는 병에 걸려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할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가족은 가족이니 어찌하랴! 그러한 루이 1세가 다시 왕위에 오른지 2년 후인 836년에 루이 1세는 '앞으로는 절대로 그러지 마라'고 당부하면서 아들 페핀과 독일의 루이를 종전의 지위로 복귀시켜주었다. 다만, 로타르에 대하여는 그가 이탈리아에서 소유하였던 모든 것을 빼앗아서 샤를르에게 넘겨 주었다.

 

[세번째 내전]

두번째 부자간의 전쟁이 있은지 2년 후인 837년에 루이 1세는 망내 아들 샤를르에게 알레마니아와 부르군디의 왕관을 씌어 주었다. 그리고 독일의 루이가 소유하고 있던 영토 중에서 상당부분을 샤를르에게 주었다. 화가 치민 독일의 루이가 당장 반기를 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자 루이 1세는 한술 더 떠서 바바리아의 모든 영토를 샤를르에게 주었다. 뿐만 아니었다. 노인네가 망년이 났는지 망내 아들 샤를르에 대한 루이 1세의 헌신적인 행동은 끝날 줄을 몰랐다. 루이 1세는 둘째 아들 페핀이 838년에 세상을 떠나자 샤를르를 아퀴텐의 새로운 왕으로 선포하였다. 아퀴텐의 귀족들은 그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하면서 세상 떠난 페핀의 아들(페핀 2세)를 아퀴텐의 왕으로 선출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루이 1세가 아퀴텐의 귀족들에게 '정말 그렇게 나온다면 군대를 이끌고 가서 쓸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아퀴텐의 귀족들은 이에 질세라 '올테면 와 봐라'면서 맞섰다. 그리하여 영토상속 문제로 인한 세번째 내전이 발발했다. 그런데 839년 봄에 은인자중하던 독일의 루이가 슈봐비아를 침공했다. 그리고 페핀 2세와 아퀴텐의 귀족들은 루이 1세의 군대를 맞아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웠다. 루아르 강 전투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북쪽에서는 덴마크인들이 프리시아 해변을 휩쓸며 약탈을 서슴치 않았다. 사태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어가고 있었다.

 

한쪽에 있던 큰 아들 로타르가 아버지 루이 1세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아버지와 동맹을 맺어서 덴마크인들을 몰아내고 왕국을 평화스럽게 만들겠으니 대신에 왕국의 영토를 상속하는 문제를 다시 결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루이 1세는 사람은 어차피 죽을 터인데 땅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생각으로 상속 문제를 재고키로 했다. 그리하여 바바리아를 독일의 루이에게 주었다. 그러나 페핀 2세에게는 아무것도 상속하지 않기로 했다. 한편, 제국의 나머지 영토는 동서로 분할하여 동프랑크 왕국을 로타르에게 주었다. 로타르는 이탈리아도 차지하였다. 서프랑크 왕국은 샤를르의 소유가 되었다. 루이 1세는 아퀴텐의 귀족들도 복속시켜서 이들이 샤를르에게 충성하도록 만들었다. 루이 1세는 생애의 마지막을 화려하고 영광스럽게 장식하고 싶어서 아들 루이(독일의 루이)가 바바리아에 이어 오스트마르크(현재의 오스트리아)를 관할토록 했다. 루이 1세는 이러한 모든 일들을 마친 후에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으로 돌아가서 전쟁을 위해 조성하였던 군대를 모두 해산하였다. 이로써 루이 1세 치하에서 일어났던 세번에 걸친 내전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루이 1세는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왕실 여름 사냥 숙사인 라인 강변의 잉겔하임(Ingelheim) 궁전으로 들어가서 여생을 보냈다. 루이 1세는 840년 6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까지 임종을 지킨 사람은 이복 동생인 드로고(Drogo)였다. 부인 유디트와 아들 샤를르는 푸아티에에 있었기 때문에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루이 1세가 세상을 떠나자 로타르와 독일의 루이와 샤를르 사이에 다시한번 영토문제를 두고 내전이 벌어졌다. 그래서 정작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843년 베르둔 조약(Treaty of Verdun)으로였다. 베르둔 조약은 프랑크 왕국을 셋으로 나눈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독립된 길을 걷게 되었으며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부르군디와 저지대 국가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아퀴텐 문제는 860년에 가서야 겨우 해결을 보았다. 루이 1세는 메츠의 생아르눌드(Saint-Arnould) 수도원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찾았다.

 

메츠의 생아르눌 수도원에 있는 경건왕 루이 1세의 석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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