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 집중분석/HRE가 뭐길래

샬레마뉴 대제는 누구?

정준극 2015. 10. 25. 20:54

신성로마제국의 문을 연 샬레마뉴 대제(샤를르 1세 프랑크 왕국 국왕)

 

아헨대성당의 샬레마네 대제 흉상

                                            

신성로마제국은 문을 열어 놓은 인물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르 1세이다. 우리가 보통 샬레마뉴(Charlemagne) 대제(大帝)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프랑크 왕국은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북부, 스페인의 동부, 오스트리아 서부 등을 합한 왕국이라고 보면 된다. 프랑크 왕국은 처음에 현재의 독일 중북부에서부터 시작했다. 이 지역을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라고 불렀다. 아우스트라시아라고 하니까 혹시 아시아와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무런 관계도 없고 이름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우스트라시아의 중심 도시는 아헨(Aachen)이며 그외의 대도시로서는 쾰른, 메츠(Metz), 벨기에의 리에즈(Liege) 등이 있었다. 프랑크 왕국의 사람들은 원래부터 사냥을 잘해서 용감했다. 날씨가 나빠서 농사를 지을 형편이 안되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사냥을 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남쪽으로 가면 날씨가 아주 좋고 땅도 비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할 일도 별로 없는데 힘이라도 써보아야 겠다고 생각해서 남쪽 지방의 나라들과 자꾸 싸웠고 싸우면 이겼다. 숲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멧돼지나 사슴을 사냥하는 사람들과 땅이나 파며 농사 짓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프랑크 왕국은 클로비스 왕이 주도하는 481년부터 511년까지는 지금의 프랑스 대부분인 네우스트리아(Neustria, 주요 도시: 파리, 렝, 낭트 등)를 정복했고 이어 프랑스 남부의 아퀴텐(Aquitaine, 주요도시: 보르도, 툴르스 등), 프랑스 동북부의 슈바비아(Swabia, 주요도시: 스트라스부르)를 정복하여 프랑크 왕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어 531년부터 614년까지는 프랑크 왕국의 동남부에 있는 부르군디(Burgundy, 주요도시: 제네바, 리옹)와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 스페인과의 접경지역에 있었던 가스코니(Gascony)를 정복했다. 그후 프랑크 왕국은 더 열심히 노력해서 투링기아와 작소니 지역까지 차지하였다. 아무튼 프랑크 왕국은 밥만 먹고 나면 영토를 늘릴 궁리만 했다.

 

프랑크 왕국의 중심도시였던 아헨

 

얼마후 프랑크 왕국에는 종전의 클로비스 왕보다도 더 싸움을 좋아하는 샤를르 1세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그저 심심하면 다른 나라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 큰 일이었다. 샤를르 1세는 프랑크 왕국이 중심이 되어 통합유럽을 이루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는 옛날 알렉산더 대왕이나 시저가 이루어 놓은 것과 같은 대제국을 만들어서 호령이나 하며 지내기를 바랬다. 그렇다고 샤를르 1세가 정말 밥만 먹고나면 전쟁을 벌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일일히 얘기하기는 뭐하지만 아무튼 다른 훌륭한 일도 많이 했다. 이 양반이 다름아닌 샬레마뉴였다. 샬레마뉴라는 말은 '위대한 샤를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샬레마뉴 대제'라고 부르는 것은 '역전앞'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핀잔할 일은 아니다. 샬레마뉴 대제는 왕좌에 앉은 768년부터 이웃나라 정복의 길에 나서서 요단강을 건넌 814년까지 잘츠부르크가 주요 도시였던 바바리아,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카린티아 지역,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 왕국, 바르셀로나가 주요 도시인 스페인 동남부 지역 일대를 모두 프랑크 왕국의 우산 아래에 두었다. 샤를르 1세는 768년에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지만 774년에는 이탈리아 왕까지 겸하였다. 사람들은 샤를르 1세가 마치 고대 로마제국이나 마찬가지로 유럽의 거의 전역을 통합하는 장거를 이룩하였다면서 칭송하기에 바뻤다. 심지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고대 로마제국이 부활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는 중에 로마 교황 레오 3세는 이탈리아를 넘보는 이교도들 때문에 바티칸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으로 골치아프던 차에 막강한 샤를르 1세에게 의탁하면 당분간 마음 편하게 지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샤를르 1세에게 '듣자하니 시중에서 귀하를 로마 황제에 비유하는 소문이 나돌고 있던데 그럴바에야 아예 로마 황제의 왕관을 줄터이니 받으면 좋겠으며 대신에 로마를 외세로부터 보호해 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샤를르 1세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여서 '아. 뭘!'이라고 사양하다가 마침내 800년 12월 25일 성탄을 맞이하여 바티칸에 가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를 의미하는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과 함께 대관식을 가졌다. 이로써 샤를르 1세는 교황으로부터 하늘이 낸 제왕이라는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샤를르 1세는 프랑크 왕국이 정복해서 우산 아래에 둔 모든 영토를 카롤링거 제국이라고 불렀다. 카롤링거는 '카를의', 즉 '샤를르의'라는 뜻이다.

 

800년 12월 25일 바티칸의 성베드로성당(옛건물)에서 거행된 샬레마뉴 대관식(교황 그레고리 3세)

 

샤를르 1세는 742년 프랑크 왕국에서 태어났다. 혹자는 태어난 해가 747년이라는 주장을 했고 또 어떤 학자들은 748년이라고 말했지만 아무튼 그 즈음에 태어났다고 보면 된다. 태어난 연도뿐만 아니라 장소도 정확하지 않다. 프랑크 왕국의 중심도시인 아헨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오늘날 벨기에의 리에즈(Liége)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샤를르 1세가 세상을 떠난 장소는 확실하다. 814년 아헨이다. 샤를르 1세의 묘소는 아헨 대성당(Aachener Dom)에 있다. 칼스슈라인(Karlsschrein)이라고 부른다. 슈라인이라는 단어는 성체용기 또는 성골함을 말한다. 샤를르 1세를 성자에 비유하여 슈라인이라는 용어를 쓴 것이다. 아헨대성당에는 마리엔슈라인(Marienschrein: Shrine of Mary)도 있다. 마리엔슈라인(마리아 성체용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허리 아래에 둘렀던 이른바 허리 두르개(Lindentuch), 성모 마리아가 입으셨던 옷, 세례자 요한이 죽임을 당했을 때 입으셨던 옷이 간직되어 있다. 샤를르 1세의 아버지는 프랑크 왕국의 페핀 왕이었고 어머니는 라온 출신의 베르트라다였다. 페핀왕은 키가 작아서 단신왕(Pepin the Short)라고 부르는 사람이었으며 베르트라다는 베르타라고도 하는데 발이 커서 '왕발 베르타'라는 별명을 가진 여인이다. 샤를르 1세는 부왕인 페핀(또는 피핀)이 768년에 세상을 떠나자 곧이어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원래 샤를르 1세는 동생인 카롤만 1세와 함께 프랑크 왕국을 통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공동왕이 된지 3년이 지난 771년에 동생인 카롤만 1세가 원인을 알수 없이 세상을 떠나자 그때부터는 샤를르 1세가 프랑크 왕국의 단독왕으로서 행세했다. 나중에 일부 학자들이 샤를르 1세가 '공동왕은 무슨 얼어죽을 공동왕이냐?'면서 비밀리에 동생 카롤만 1세를 어떻게 했다는 주장도 했지만 훌륭하신 샤를르 1세를 그렇게 불경스럽게 얘기하면 안된다는 여론이 있어서 그런 주장은 쑥 들어갔다.

 

아헨대성당. 세상 떠난 샬레마뉴 대제가 안치되어 있다.

 

샤를르 1세는 부왕인 페핀과 마찬가지로 신앙심이란 것이 대단했다. 그래서 부왕이 그랬던 것처럼 교황을 지극히 생각했다. 말하자면 자기는 교황을 보호하는 존재라는 생각이었다. 샤를르 1세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롬바르드인들이 로마를 위협하자 분연히 떨쳐 일어나서 롬바르디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냈다. 뿐만 아니라 스페인에서 활개를 치던 무슬림들도 몰아냈다. 그래서 교황 레오 3세가 발 쭉 펴고 잠잘수 있게 해 주었다. 교황으로서는 신세를 단단히 진 셈이어서 무엇인가는 보답을 해야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샤를르 1세는 욕을 먹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는 색슨족을 굴복시켰을 때였다. 샤를르 1세는 자기가 무슨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생각했는지 하여튼 기독교를 믿지 않는 색슨족에게 기독교로 개종해서 세례를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목을 내놓으라고 했다. 색슨족들이 기독교가 무언지 잘 모르겠다면서 개종할 것을 거부하자 샤를르 1세는 병사들에게 영을 내려서 색슨족 포로 4천 5백명의 목을 자르도록 했다. 대학살이었다. 하여튼 이로 인해서 오늘날 독일 중북부의 베르덴의 알러(Aller)강은 며칠 동안이나 강물이 물인지 피인지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를 Blutgericht von Verden(블루트게리히트 폰 베르덴)이라고 부른다. 샤를르 1세는 무력으로 서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통일하고 대 제국을 이룩하였다. 로마제국 이후에 처음으로 등장한 대제국이었다. 그래서 샤를르 1세는 '유럽의 아버지'(Pater Europae)라는 칭송을 들었고 샬레마뉴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인데 로마 교황이 그를 하늘로부터의 지위를 부여했으니 샤를르 1세는 그로부터 샬레마뉴로서 호랑이가 날개를 단 셈이 되었다. 이후 샬레마뉴 대제는 문화예술과 학문의 진흥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다만, 대부분의 문예부흥 운동은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진행되었다. 아무튼 그리하여 그의 치세기간을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샬레마뉴 대제의 치세에 대한 얘기는 한도 끝도 없으므로 줄이기로 하고 우리가 흥미를 가질 내용은 그의 아들들에 대한 것이다.

 

아헨대성당에 있는 샬레마뉴 금관(金棺). 스테인드 글래스가 화려하다.

 

샬레마뉴는 네번 결혼했다. 첫번째 부인은 샬레마뉴가 44세 때에 결혼한 롬바르디 왕의 딸인 데시데라타(Desiderata: 770-771)였다. 데시데라타는 겨우 1년 동안 왕비로서 지내다가 의문을 남긴채 죽었다. 자녀도 하나도 없었다. 두번째 부인은 게르만부족의 영향력있는 백작의 딸인 슈봐비아의 힐데가르트(Hildegard: 771-783)였다. 힐데가르트는 샬레마뉴와 12년간 결혼생활을 하면서 모두 9명의 자녀를 두었다. 4남 5녀였다. 큰아들 샤를르는 부왕인 샬렘마뉴가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로 대관식을 가진 800년부터 부왕과 함께 프랑크 왕국의 공동왕이 되었다. 둘째 아들은 칼로만(Carloman)인데 나중에 할아버지 이름인 페핀(Peppin 또는 Pippin)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탈리아왕을 지냈다. 셋째 아들은 나중에 '경건왕'이라고 불린 루이스(Louis)였다. 루이스는 쌍둥이 동생인 로타르(Lothair)와 함께 아퀴텐(Aquitaine)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로타르는 두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샬레마뉴는 두번째 부인인 힐데가르트를 대단히 총애했다. 세번째 부인은 아우스트라시아 백작의 딸인 화스트라다(Fastrada)였다. 10년동안 샬레마뉴의 부인이었으나 딸만 둘을 낳았다. 네번째 부인은 알라마니 (Alamanni) 백작의 딸인 루이트가르드(Luitgard)였다. 6년 동안 샬레마뉴의 부인이었으나 자녀를 생산하지 못했다.

 

그런데 샬레마뉴에게는 롬바르디 왕의 딸인 데시데라타와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에 내연의 처가 하나 있었다. 히밀트루데(Himiltrude)라는 여인이었다. 히밀트루데는 귀족 집안의 여식이었다고 한다. 정확치는 않지만 알레마니아(Alemannia) 또는 알사티아(Alsatia) 귀족 가문이라고 한다. 알레마니아는 오늘날의 중북부 독일 지역에 있던 게르만 부족의 나라였고 알사티아는 독일 남부 알사스 지방에 있던 게르만 부족 국가였다. 샬레마뉴가 히밀트루데와 동거한 것은 정치적인 배경은 없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샬레마뉴는 아직도 부왕인 페핀이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있을 때에 히밀트루데를 알게 되어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샬레마뉴가 왕으로 취임하기 전에 아들 하나를 두게되었다고 한다. 그 아들의 이름은 샬레마뉴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페핀이라고 했다. 그런데 페핀은 태어난 후에 척추에 이상이 생겨서 꼽추가 되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페핀을 '꼽추 페핀'(Peppin der Buckelige)라고 불렀다. 페핀은 768년 또는 767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페핀이 태어날 즈음에 프랑크 왕국은 북부 이탈리아를 차지하고 있는 롬바르디 왕국과 정치적으로 동맹을 맺게 되었다. 롬바르디의 왕인 데이데리우스는 프랑크 왕국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기의 딸 데시데라타를 샤를르 1세(훗날 샬레마뉴)와 결혼시키도록 주장했다. 그래서 샤를르 1세는 770년에 데시데라타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데시데라타는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왜 떠났는지는 모른다. 그건 그렇고 샤를르 1세가 데시데라타와 결혼하게 되자 내연의 처인 히밀트루데는 정식 부인으로 인정도 받지 못한채 어디론가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녀원으로 들어갔다는 얘기가 있지만 그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꼽추 아들인 페핀은 어머니를 따라서 집을 나가지 않고 그대로 눌러서 살았다. 페핀은 나중에 샤를르 1세의 정식 두번째 부인인 힐데가르트가 낳은 아이들 때문에 그늘 속에서 지내야 했다. 훗날 페핀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규합하여 샤를르 1세(샬레마뉴)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아서 성공하지 못했다. 샤를르 1세는 꼽추 페핀을 차마 처형하지는 못하고 멀리 수도원으로 들여 보내어 꼼짝도 하지 못하게 했다. 이제 힐데가르트가 낳은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샤를르 1세는 두번째 공식 부인인 슈봐비아의 힐데가르트와의 사이에 아들 넷을 두었다. 네 아들 중에서 큰 아들이 샤를르 2세(Charles the Younger 또는 Charles of Ingelheim: 772-811)이다. 하지만 샬레마뉴로 보면 두번째 아들인 셈이다. 내연의 처인 히밀트루데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꼽추 페핀'을 어떻든 장자라고 볼수 있기 때문이다. 샬레마뉴는 아들 샤를르를 프랑크 왕국의 후계자로 생각했다. 두번째 아들인 카롤만(나중에 페핀으로 이름을 바꿈)은 이탈리아의 부왕(Sub-king)으로 임명했고 셋째 아들인 루이(루이스)는 아퀴텐의 부왕으로 임명했다. 아퀴텐은 프랑스의 서남쪽 스페인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지역으로 중심도시는 보르도이다. 아퀴텐은 비스케이 만에 면한 넓은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큰 아들인 샤를르는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전투에 능숙하여서 브레톤족들이 프랑크 왕국에 항거를 할 때마다 전쟁에 파견되어 성공적으로 평정했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서 이후 샬레마뉴는 북쪽의 작손과 전투가 벌어지면 샤를르를 보내서 대처토록 했다. 샤를르는 프랑크 왕국의 정통 후임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샤를르는 아버지인 샬레마뉴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샬레마뉴는 814년에 세상을 떠났고 아들 샤를르는 그보다 3년 전인 811년에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났다. 샤를르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둘째 아들인 카롤만(페핀)도 810년에 세상을 떠났다. 말하면 잔소리이겠지만 셋째 아들 루이가 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계승받을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네번째 아들도 있었는데 아주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언급할 필요가 없다.

 

샬레마뉴의 힐데가르트의 셋째 아들인 루이는 신앙심이 좋아서인지 '경건왕'(Louis the Pious)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루이는 778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세살 때에 아퀴텐 왕으로 봉해졌다. 한참 후 35세 때인 813년에는 아버지 샬레마뉴와 함께 프랑크 왕국의 공동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루이를 루이 1세로 부르게 되었다. 루이는 814년에 아버지 샬레마뉴가 세상을 떠나자 샬레마뉴의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로서 당연히 프랑크 왕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두 형인 샤를르와 페핀(카롤만)은 모두 샬레마뉴가 살이 있을 때에 세상을 떠났다. 814년에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된 루이는 840년 세상을 떠날 때가지 26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833년에는 1년 동안 왕좌에서 쫒겨나서 추방생활을 해야 했다. 루이는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왕이 되기 전까지 아퀴텐의 왕으로 제국에 봉사했다. 그때 그는 무슬림이 장악하고 있던 바르셀로나를 정복하였고 프랑크 왕국의 권위를 피레네 산맥의 남쪽에 있는 바스크와 팜플로나까지 펼쳤다. 루이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루이는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자 세 아들에게 요직을 주어 정사에 참여토록 하고 언젠가는 영토를 나누어 줄 생각을 했다. 당시에는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 루이가 황제가 된후 10년은 여러 비극적인 사건들이 많았었다. 특별한 것은 조카인 이탈리아의 베르나르트를 잔인하게 처리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루이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자처하며 크게 후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830년경에는 루이의 아들들간의 내전 때문에 프랑크 제국이 분열될수 밖에 없었다. 루이와 아들들간의 알륵과 불만이 고조된 것은 루이가 둘째 부인에게서 낳은 샤를르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프랑크 제국의 질서는 루이 시대에 상당히 정착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들간의 분쟁, 즉 왕자의 난으로 3년간의 내전에 시달려야 했다. 이제 '경건왕 루이'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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