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 집중분석/HRE가 뭐길래

신성로마제국 집중탐구

정준극 2015. 10. 21. 16:29

신성로마제국 집중탐구

 

본 블로그를 통해서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모쪼록 자세히 설명코자 했으나 아무래도 단편적이 될수 밖에 없었다. 물론 너무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기 때문에 회피하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독자들 중에서는 기왕이면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할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기야 정말로 자세히는 설명할수 없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자세히 정리해 보는 것도 관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개략적인 사항부터 언급하자면, 신성로마제국은 중세에 유럽에 군림하였던 유럽국가들의 정치적 연합체였다.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은 현재의 독일, 네덜랜드, 룩셈부르크,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공화국과 슬로박 공화국, 슬로베니아, 그리고 프랑스의 동부 지역 일부와 이탈리아의 북부지역에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여기에 신성로마제국의 말기에는 폴란드의 서부지역도 관할 아래에 두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잘 아는대로 현재의 독일 중부지역에 있었던 프랑크 왕국의 샤를르 1세 국왕(샬레마뉴 대제)이 로마로 가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당시에는 명색만 있었던 로마제국(서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갖게 되어 출범하였다. 800년 12월 25일의 일이었다. 로마제국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상을 떠난 후에 두 아들이 서로 영토를 나누어서 하나는 동로마제국이라고 했고 다른 하나는 서로마제국이라고 했다. 동로마제국은 오늘날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기고 기독교의 정통성은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면서 별도의 교황을 두고 정교회(Orthodox Church)를 발전시켜 나갔다. 한편, 서로마제국은 놀고 먹기에 바뻐서 그랬는지 세력이 약해져서 이윽고 게르만 민족의 침략을 받아 결국 476년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대신에 서로마제국의 로마에는 바티칸 교황청이 명목을 유지하고 있었다.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에 비하여 거의 1천년을 더 유지히다가 오토만 터키에 의해 1453년 멸망하였다.

 

샤를르 6세 황제와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황비, 그리고 세 딸들, 큰 딸이 마리아 테레지아


유럽의 사람들은 서로마제국을 과거 로마제국을 계승한 나라로 보았다. 특히 로마의 바티칸에 교황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마제국이 기독교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 서로마제국인데 476년 막을 내린 이래 800년까지 거의 330년 동안 군주가 없이 지내야 했다. 그래도 바티칸에 교황은 있었다. 기독교가 열심히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멸망한후 몇 백년이 지난 시기에 교황 레오 3세의 아이디어로 프랑크 왕국의 샤를르 1세에게 그동안 빈 자리였던 서로마제국의 황제자리를 주기로 했다. 대신에 샤를르 1세에게 이탈리아를 외적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요구했다. 샤를르 1세는 자기가 로마황제까지 겸직하게 된다니까 기쁜 마음으로 교황의 제안을 받아 들이기로 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비록 로마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먼 프랑크 왕국의 샤를르 1세가 로마제국의 황제격으로 인정을 받아서 씁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했던 로마제국이 회복되었다고 생각해서 그런대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샤를르 1세에 의해 힘차게 출범한 신성로마제국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얼마후에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샤를르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적법한 아들인 루이 1세가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트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루이 1세는 '경건왕'(Louuis the Pious)이라고 불릴만큼 신앙심이 깊었다. 그래서 로마가톨릭의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앞장서서 하였다. 그런데 루이 1세의 아들대에 가서 아들들이 그러면 안되는데 마치 왕자의 난처럼 영토를 서로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바람에 내전이 끊일 새가 없었으며 결국 프랑크 왕국은 비틀 거릴수 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왕이 죽으면 아들이 하나만 있으면 문제가 없지만 여러 명이며 그 아들들에게 영토를 골고루 나누어 주어 각각 왕으로 세워주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었다. 아무튼 루이 1세의 아들들, 즉 샤를르 1세의 손자들이 서로 싸우는 바람에 결국 887년에 프랑크 왕국은 영구히 분열되었으며 이후 924년에 오토 1세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가질 때까지 신성로마제국은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라는 타이틀의 황제가 없는 공위시대를 경험하였다. 그후 약 1천년 동안 물론 여러가지 역경도 많았지만 신성로마제국은 그런대로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여 오다가 1806년에 오스트리아 대공을 겸하고 있는 프란시스 2세 황제는 나폴레옹이 너무나 득세하여서 어깨에 힘을 주고 살자 저러다가는 신성로마제국도 나폴레옹에 의해 문을 닫게 될 것으로 불안하게 생각하여 스스로 신성로마제국의 막을 영원히 내렸다.


비엔나의 호프부르크 내정에 있는 프란시스 1세 황제 기념상. 프란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는 프란시스 2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정식 명칭은 '독일국가의 신성로마제국'이다. 영어로는 Holy Roman Empire of the German Nation 이라고 하며 독일어로는 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 이라고 한다. 이 명칭은 샤를르 1세 황제가 로마로 가서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로서 대관식을 가질 때부터 사용한 것이 아니라 훨씬 훗날 바바로사의 프레데릭 1세의 시기에 제국 사무국에서 비로소 사용하기 시작한 명칭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1157년부터였다. 제국의 이름에 '신성'이라는 것을 붙이는 것이 사실상 논란이 되었었다. 교회의 권세가 막강하던 중세에서 '신성'이라는 단어는 교회 이외에는 사용할수 없었다. 말하자면 신성은 교황청의 독점 단어였다.  교황청의 교회를 '신성로마교회'(Holy Roman Church: Sancta Romana Ecclesia)라고 불렀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러던 것을 바바로사의 프레데릭 1세가 제국의 명칭에 '신성'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교회와 제국이 같은 대열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물론 바티칸으로서는 껄끄러웠겠지만 그렇다고 교황이 대관식을 치루어주고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할수 있게 해 놓은 마당에 '신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반대하고 난리를 칠 일은 못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이 '독일국가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더 그럴듯한 명칭으로 변경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프레데릭 1세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때로부터 3백년도 훨씬 지난 1474년부터였다. '독일국가'라는 용어를 포함한 것은 '신성로마제국'이 명칭만 허울 좋은 집단이 아니라 독일의 유수한 국가들 처럼 정치적인 권한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와함께 독일이 세상의 성스러운 기독교계를 지배할 운명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었다. '신성'이라는 단어에는 또 다른 의미도 숨어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하늘이 선택해 주는 것이므로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감히 도전하면 곤란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재위: 1515-1547)가 1519년에 자기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출마하겠다고 주장했을 때에 합스부르크의 샤를르 5세(재위: 1519-1556)가 '이 어찌 무엄한 인간이란 말인가'라면서 프란시스 1세와의 전투를 벌여 그를 패배시킴으로서 더 이상 말을 못하게 만들었던 일도 있다.


프레데릭 바바로사 신성로마제국 황제

 

어느 제국이든지 전성기가 있기 마련이다. 합스부르크의 왕가가 세력을 펼치기 시작한 시대가 신성로마제국의 전성기라고 할수 있다. 프레데릭 3세의 치하 때부터라고 보면 된다. 그 즈음에 신성로마제국의 관할지역은 서쪽으로는 프랑크 왕국, 동쪽으로는 헝가리와 폴란드, 북쪽으로는 발트해와 북해, 그리고 덴마크 왕국에 이르기까지, 남쪽으로는 알프스를 포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올시다'라고 말할수는 없었으며 마찬가지로 인구에 있어서도 몇명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입장이 아니었다. 다만 기록에 의하면 1500년대에 신성로마제국의 전체 인구는 1천 5백만 정도였고 되어 있다. 그리고 여러 나라의 연합체이다보니 언어가 제각각이었다. 물론 독일어가 대표였지만 이탈리아어 슬라브어도 공용어처럼 사용되었다. 따라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어려서부터 독일어, 이탈리아어, 슬라브어를 배워야 했다. 그래야 시의에 부응할수 있었다. 인종도 제각각이었다. 게르만민족, 라틴민족, 슬라브민족이 공존하는 제국이었다. 여기에 유태인도 상당수 비집고 들어와서 살고 있었다. 제국의 남쪽과 서쪽에서 그러했다. 신성로마제국에는 유럽의 중요한 강들이 포함되어 있다. 강이야말로 무역을 위한 가장 훌륭한 교통 시스팀이었다. 라인강, 도나우강, 엘베가, 마인강 등이다. 이들 강안에 경제도시들이 자리를 잡았다. 대표적인 도시는 쾰른이었다. 라인강변의 쾰른은 중세에 이미 인구가 3만을 넘을 정도로 경제활동이  활발했던 도시였다. 이밖에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 도나우 강변의 비엔나, 엘베 강변의 함부르크도 신성로마제국의 중요한 경제도시였다.

 

신성로마제국은 세월이 지나면서 아무리 국가들의 연합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황제가 있고 행정을 맡아보는 사무국이 있는 마당에 체제를 정비하고 필요한 법령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이와 함께 제국의회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우선 황제가 어떤 지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도 필요했다. 여러 의견을 종합하여서 황제는 제후(Prince)들과 영주(Lord)들과 봉신(Vassal)들보다 상위에 있는 대군주(Overlord)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그렇게 대우하기로 했다. 다음으로 황제를 선출하는 방법에 대한 규정을 정하였다. 기본적으로 로마 교황도 추기경들이 선출하므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추기경과 같은 위상의 제후들이 선출키로 했다. 이들을 선제후라고 불렀다는 것은 다 잘 아는 사실이다. 선제후들은 우선 '로마 왕'이라는 타이틀의 인물을 선출했다. '로마 왕'이라고 불렀던 것은 신성로마제국을 대표하는 사람은 과거 로마제국 황제의 뒤를 잇는 서열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선제후들이 '로마 왕'을 선출하는 절차는 1356년 샤를르 4세(재위: 1346-1378)가 정한 금인칙서(金印勅書: The Golden Bull)에 규정해 놓았다. 금인칙서라고 번역한 골든 벌은 제국의 기본법을 규정한 것이다. 기본법이라고 했지만 모든 기본을 다 정할수는 없고 주로 선제후들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내용만을 규정해 놓았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 또는 추기경들은 일곱명으로 한정했다. 4명은 일반 제후들로서 보헤미아 왕(King of Bohemia), 작소니 공작(Duke of Saxony), 브란덴부르크 변경백(Margrave of Brandenburg), 라인 팔라틴 백작(Count Palatine of the Rhine)이었다. 나머지 3명은 추기경들로 채웠다.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추기경들이었다. '로마의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저 멀리 바티칸에 가서(또는 교황이 있는 곳으로 가서)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고 대관식을 치루어야 그때부터 공식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타이틀을 사용해도 되었다. 그것이 샤를르 1세 이후로부터 수백년 동안 내려온 전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막시밀리안 1세(재위: 1493-1519) 시대부터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로마까지 가서 교황에게 무릎을 꿇고 왕관을 받고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로마가 멀기도 멀었지만 도대체 같은 황제인데 마치 신하처럼 굽실거려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미 선제후들이 로마왕으로 선출했는데 교황으로부터 다시 왕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그동안 사용하던 호칭인 'King of the Romans 을 저만치 밀어두고 대신에 Elected Roman Emperor(선출된 로마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런데 그의 뒤를 이은 샤를르 5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로마로 가서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았다. 하지만 그 한 사람으로서 충분했다. 그 다음으로 '로마 왕'으로 선출된 사람들은 2중행사를 철폐하자는 생각에 로마로 가서 대관식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금인칙서'에서 또 하나 규정한 것은 남자 후계자만이 황제로 선출될수 있다고 규정한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샤를르 6세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자 그 딸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삼기 위해 국사조치(Pragmatic Sanction)라는 것까지 발표했으나  제후들의 반발이 심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성로마제국이라고 하면 샤를르마뉴 대제를 생각해서 프랑크 왕국을 머리에 떠 올릴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합스부르크라는 단어와 연결해서 생각하게 된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신성로마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아마 1438년 알베르트 2세가 '로마 왕', 즉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고부터일 것이다. 알베르트는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사촌인 프레데릭 3세(재위: 1440-1493)가 알베르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알베르트 2세와 프레데릭 3세는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의 출신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자자손손 맡게 되었다. 다만, 잠시동안의 예외가 있다면 저 유명한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비텔스바흐 왕가 출신인 바바리아의 샤를르 알베르트가 여자는 황제가 될수 없다고 하면서 3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재임했던 일이 있을 뿐이다. 그 여자는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를 말하는 것이었다.

 

비엔나는 수백년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다. 비엔나 1구의 링 슈트라세 건물들.

 

신성로마제국은 겉으로 보면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수백개의 작은 단위체가 서로 독립적인 활동을 하는 특이한 존재였다. 구성원들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면, 우선 선제후들이 통치하는 7개의 공국(Principality)이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보헤미아, 작소니, 브란덴부르크, 라인 팔라틴, 마인츠, 트리어, 쾰른이다. 여기에 25개의 일반 공국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 공국, 바바리아 공국, 브룬스비크 공국 등이다. 또한 약 90개에 이르는 독립적인 대주교 및 추기경 관할지역이 있었고 여기에 주요 수도원들이 관할하는 지역이 있었다. 그리고 약 1백개에 이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독립국가들이 있었다. 군주가 세상을 떠날 때에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는 관습 때문에 자꾸자꾸 작은 나라들로 갈라지게 된것이 연유였다. 독립적인 자유도시라는 것도 약 70개나 있었다. 북쪽으로는 쾰른(Köln), 브레멘(Bremen), 뤼베크(Lübeck), 함부르크(Hamburg) 등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뉘른베르크(Nürnberg), 울룸(Ulm), 아우그스부르크(Augusburg)가 있었으며 중부 독일 지역에는 푸랑크푸르트(Grankfurt), 뮐하우젠(Mühlhausen)이 있었다. 이러한 자유도시들은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오직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는 복속하였다. 그리하여 혹자는 신성로마제국을 '부조화속의 공동체'라고 말하기도 했다.

 

비엔나의 쇤브룬 궁전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이 여름 궁으로 사용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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