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 집중분석/HRE 더 알기

3백개 국가를 거느린 제국

정준극 2009. 7. 20. 23:08

3백개 국가를 거느린 제국

 

신성로마제국은 중세부터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중부유럽에 있었던 여러 나라들의 연맹이다. 흥성하던 시기에는 유럽의 3백개에 이르는 국가, 공국, 영주국, 주교통치령, 자유무역도시 등이 신성로마제국의 지붕 아래에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은 15세기 이후에 공식적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제국의 명칭이 없었으며 로마황제에 버금하는 명칭만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전성기의 신성로마제국이 관할하는 영토는 현재의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리히텐슈타인, 룩셈부르크, 체코공화국, 슬로베니아, 벨기에, 프랑스, 폴란드, 헝가리, 크로아티아, 유고슬라비아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으며 스페인과 포르투갈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성로마제국은 수많은 공국(Principalities), 공작령(Duchies), 지방의 영주령(Counties), 자유도시(Free Imperial Cities), 주교통치령, 기타 상당수의 왕국과 영토로 구성되었었다. 외형적으로 보면 세상에 이만한 권력과 영토를 관할하는 존재는 없었다. 아무튼 신성로마제국은 수많은 이질적인 국가, 영지, 자유도시들의 연합체라고 보면 된다. 한가지 더! 명칭은 신성로마제국이지만 이탈리아의 로마와는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프레데릭 3세 

 

새로운 로마제국, 즉 나중에 신성로마제국이라고 하는 조직은 게르만 민족에 의해 막을 내린 서로마제국의 뒤를 잇는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였으니 아이러니컬하다. 게르만 민족 출신인 오토 1세가 황제가 되었으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바티칸에 있던 교황 레오 3세가 여러 생각 끝에 샤를르마뉴 대제에게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Augustus: 아우구스도 황제)라는 타이틀을 내린 것은 800년 12월 25일이었다. 샤를르마뉴의 그해 성탄절은 대단히 축하받아야 할 날이었다. 샤를르마뉴 대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라는 타이틀을 교황으로부터 받았으니 기쁘기가 한량  없었다. 얼마후 샤를르마뉴 대제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경건왕 루이(Louis the Pious)가 뒤를 이었다. 바티칸의 교황은 이번에도 재빨리 루이에게 아우구스투스 황제라는 칭호를 내리고 로마로 초청하여 바티칸의 베드로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의 로마제국은 말만 제국이지 아무런 형상이 없었고 행정도 완비되지 못했다. 말하자면 아무리 로마제국의 황제로서 교황이 대관식을 치러주었지만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여 다른 군주와 제후들에게 말발이 먹혀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무기력기간이 수십년 지속되었다. 새로 출범한 이른바 로마제국이 거의 30년이 되도록 제대로 행세를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군주가 세상을 떠난 후 후계자들이 서로 영토를 갈라 먹기에 혈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교황 이니아스를 만나고 있는 프레데릭 3세(프리드리히 3세)

 

샤를르마뉴 대제가 옛 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가졌고 이 자손들도 역시 황제로 추대되었지만 실제로 로마제국이라는 공식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앞에서도 잠간 언급했듯이 한참 후의 얘기다. 오토 1세를 신성로마제국을 부활시킨 주역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의 치하에서도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은 사용되지 않았다. 오토 1세는 자기의 영토를 ‘레그눔 프랑코룸 오리엔탈리움’(Regnum Frankorum Orientalium)이라고 불렀다. ‘동프랑크왕국’(East Francia) 또는 간단히 말해서 ‘프랑크 왕국’이라는 뜻이다. 그러다가 1034년 콘라드(Conrad) 2세 때에 자기의 영토를 로마제국(Roman Empire)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1157년부터는 웬 일인지 로마라는 말을 빼고 ‘신성제국’(Holy Empire)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제멋대로였다. 로마황제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실은 오토 1세의 아들인 오토 2세(재위: 973-983)부터였다. 다시 말하여 샤를르마뉴 대제로부터 오토 대제(오토 1세)까지는 로마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아우구스투스 황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번역할 때에 편의상 샤를르마뉴 대제나 오토 대제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겸직했다고 하고 있다. 신성로마제국(독일어로 Heiliges Römisches Reich: 라틴어로는 Sacrum Romanum Imperium)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254년부터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독일국가의 신성로마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 라틴어로는 Sacrum Romanum Imperium Nations Germaniae)라는 표현은 1512년에 등장했다. 기왕 얘기를 시작한 김에 조금 더 자세히 들어가 보자.

 

프레데릭 3세의 기념상이 서 있는 류블리아나 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