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 집중분석/HRE 더 알기

제국과 교회의 권력 쇠퇴

정준극 2009. 7. 20. 23:12

제국과 교회의 권력 쇠퇴

 

무릇 통치에는 헌법이 근거가 되기 마련인데 신성로마제국의 경우에는 15세기에 이르러서도 헌법은 커녕 헌법을 만드는 의회조차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독일왕(신성로마제국 황제)과 선제후들과 기타 군주들이 제국 내에서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규정이 없었다. 하기야 그런 문제는 대체로 황제 각자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법률을 정하는 라이히스타크(Reichstag: 제국의회)는 한참 후에나 결성되었다. 하지만 제국의회가 생겨서 나라간의 문제를 다룬다고 해도 사실상 곤란한 것은 군주들 간의 해묵은 알륵과 반목이 여전하다는 것이며 심지어는 전쟁까지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교회도 문제가 많았다. 주로 교황의 자리를 놓고 벌이는 경쟁 때문에 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교황문제와 같은 대단히 중요한 사안은 교회재판소라고 할수 있는 콘스탄스 회의(Council of Constance)에서 논의하여 해결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못했다. 그러한 처지에 교회는 종교개혁을 내세운 후스파(Hussites)와 대결해야 했다. 교회는 후스파를 이단으로 몰아 이들을 제거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였다. 결국, 너무 에너지를 소비한 결과, 황제와 교황의 권위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에 따라 15세기에 과연 신성로마제국의 향방에 대한 논란이 거세게 일어났다. 대체로 과거의 권위로 돌아가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에 따라 이른바 ‘개혁’(Reform)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개혁’이라는 말은 잃었던 모습을 되찾는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한가지 예를 들면, 과거에 치안유지를 위해 만들었던 란트프리덴(Landfrieden) 법을 다시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콘스탄스 회의에서 교황을 중심으로 토론을 벌이고 있다.

 

1486년 프레데릭 3세는 군주들에게 헝가리와의 전쟁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토록 요청하였다. 선제후들과 군주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제국의회(Reichstag)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토의하자고 주장했다. 한편, 선제후들과 군주들은 프레데릭 3세가 후계자로 지명한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를 제국재판소에 출두토록 하여 그에 대한 독일왕 임명이 정당했는지를 따지고자 했다. 그러나 프레데릭 3세는 제국의회를 거부했다. 이로써 황제와 선제후들 간에 반목의 골이 깊어졌다. 프레데릭 3세가 1493년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은 1495년에 제국의회의 소집을 지지하고 선제후 및 군주들과의 화합을 모색하였다. 선제후들과 군주들은 제국의회에서 네가지 법안을 채택하였다. 제국개혁법(Reichsreform)이라는 법안이었다. 그중 한가지는 제국관방재판소(Reichskammergericht)의 운영에 대한 것이었다. 제국관방재판소는 난관을 거치고 1512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하여 1806년 제국이 막을 내릴 때까지 존속되었다. 제국관방재판소가 설치된 1512년부터 제국의 명칭도 ‘독일국가의 신성로마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her Nation)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콘스탄스 회의에서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를 교황이 정죄하고 있다.

 

1517년,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에 항거하는 종교개혁(Reformation)을 주도하였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샤를르 5세였다. 독일의 여러 군주들은 종교개혁의 불길을 샤를르 5세의 헤게모니에 항거하는 기회로 삼았다. 제국은 운명적으로 분열되었다. 제국의 북부와 동부 지역에 있는 국가들, 그리고 중요한 도시국가(스트라스부르,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들은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편에 섰다. 제국의 남부와 서부지역의 국가들은 로마 가톨릭으로 남았다. 그로부터 거의 1세기에 걸쳐 유럽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간의 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다만, 독일 지역의 국가들은 1555년의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조약으로 그나마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개신교를 받아 들인 독일 지역의 국가들이지만 가톨릭의 간섭을 받지 않고 평온하게 지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평온함도 1618년의 저 유명한 프라하 창문던지기 사건(Defenestration)으로 일대 전환점을 찾게 되었다. 프라하의 개신교도들이 골수 가톨릭인 비엔나의 프레데릭 황제가 파견한 측근들을 프라하의 궁전에서 만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창밖으로 내던진 사건이었다. 제국에 복속되어 있는 보헤미아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반기를 들자 이른바 ‘30년 전쟁’(1618-1648)이 터지게 되었고 이로써 제국은 전대미문의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재산상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노동인력이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잃었다. 독일 지역에서만 인구의 30%가 전쟁으로 줄어들 정도였다. 프랑스와 스웨덴 등 외세의 간섭도 컸다. 결론적으로 30년 전쟁으로 인하여 신성로마제국은 과거의 세력을 다시는 찾지 못하는 길로 빠져 들었다.

 

30년 전쟁의 최대 전투였던 화이트 마운틴 전투 

 

단계적으로 찾아온 제국의 멸망

 

제국의 말로는 몇 단계로 찾아왔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말할 나위도 없이 30년 전쟁이었다. 30년 전쟁의 여파로 체결된 베스트팔리아조약(The Peace of Westphalia: 1648)은 제국 영토의 독립적인 분할을 촉진한 것이었다. 우선 30년 전쟁의 훨씬 전부터 반(半)독립적 체제로 운영하던 스위스 연맹이 완전 주권을 내세우게 되었다. 북부 네덜란드가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물론 북부 네덜란드의 자체 헌법에 의하면 제국에 대항하여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지 못한다고 되어 있지만 제국은 이미 사실상 아무런 힘도 없는 명목상의 존재였다. 제국으로부터 큰 덩어리들이 떨어져 나가자 합스부르크는 어쩔수 없이 자기들의 기반인 오스트리아와 인근 지역에만 정신을 쏟지 않을수 없었다.

  

 30년 전쟁의 발단이 된 프라하 궁전에서의 프레데릭 1세 사절단을 창문 밖으로 던진 사건

 

가장 큰 문제는 프랑스와 독일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의 세력이 욱일승천하고 있었다. 독일 지역에서는 프러시아가 놀랄만큼 강성해지고 있었다. 합스부르크는 독일 지역에서 발 빠르게 확장을 거듭하고 있는 프러시아에 대하여 감시를 게을리 할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 합스부르크를 얕잡아 본 프러시아는 합스부르크의 직속 영토에 대하여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합스부르크는 유럽의 여러 분규에 휩쓸리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등에 관여하여 별로 소득도 없는 결과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독일의 다른 국가들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지 더 강하다고 생각되면 그쪽으로 기울어질 입장이었다. 프랑스는 1792년 이후부터 나폴레옹의 주도 아래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린다는 명목으로 분쟁을 일삼고 있었다. 마침내 나폴레옹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로 진군하였다. 결국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1806년 프레스부르크(Pressburg)조약을 체결하고 프란시스 2세 황제의 퇴위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나폴레옹은 제국의 대부분 영토를 라인연방(Confederation of the Rhine)이라는 기치 아래 프랑스의 위성으로 재편하였다. 합스부르크의 프란시스 2세는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변경하여 프란시스 1세로서 겨우 존속하게 되었으며 그후 합스부르크는 프란츠 요셉 황제에 이르러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 겸 헝가리 왕으로서 위안을 삼아야했다. 그러다가 1918년 제1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편, 나폴레옹이 재편한 라인연방은 독일연방으로 대체되었으며 그후 1871년 프러시아의 주도아래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어권 지역이 독일제국으로 통합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시스 2세(프란츠 2세). 그는 나폴레옹에 의해 제국의 와해될 운명에 처하자 스스로 제국의 종말을 고하였다. 그에 앞서 그는 오스트리아제국을 창설하여 프란시스 1세로서 첫 황제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