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 집중분석/HRE 더 알기

영광과 시련의 역사

정준극 2009. 7. 20. 23:09

영광과 시련의 역사

 

프랑크 왕국의 샤를르마뉴 대제는 자기가 죽은 후에 제국의 영토를 아들들에게 분배할 계획이었다. 당시의 관례는 군주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아들들에게 골고루 영토를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샤를르마뉴 대제의 경우에는 여러 아들 중에 한 아들만 살아남았다. 경건왕이라고 하는 루이(Louis the Pious)였다. 루이는 아버지 샤를르마뉴 대제의 모든 영토와 타이틀을 혼자서 상속받았다. 루이는 영토와 타이틀을 앞으로 계속 한 사람의 아들에게만 상속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영토를 아들 모두에게 적당히 골고루 분할하여 상속한 것은 오히려 무한한 혼돈만을 빚었기 때문이었다. 루이가 '장자 1인 상속'을 결정하자 루이의 다른 아들들이 거세게 반대하거 일어섰다. 결국 아들들 간에 거의 내란과 같은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843년 프랑크 제국은 나누어지고 말았다. 다만, 이 경우에는 동프랑크왕국과 로마제국이라는 특이한 형태로 분할되었다. 로마제국이라는 타이틀은 기본적으로 루이의 큰 아들인 로타르(Lothar) 1세에게 양도되었다. 이후로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라는 타이틀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해졌다. 주로 샤를르마뉴 대제와 연관된 카롤링거 왕조의 사람들에게 상속되었다. 어떤 때에는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어떤 작은 영토의 군주에게도 이관된 일이 있을 정도였다.

 

십자가 군병으로 갑주를 입고 방패와 창을 든 경건왕 루이. 라바누스 마우루수(Rabanus Maurus)가 쓴 시를 배경으로 넣었다.  

 

동프랑크왕국은 10세기 초에 카롤링거 사람이 아닌 사람이 국왕으로 선출된 때까지 별개의 국가로 발전했다. 그러다가 962년 오토 1세가 교황에 의해 아우구스투스 황제로 대관식을 가짐으로서 로마제국의 타이틀을 부담 없이 사용하게 되었다. 오토 1세에 의한 로마제국은 얼마후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 합스부르크의 프란시스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종말을 고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다시 반복하지만, 프랑크 왕국의 주류라고 주장하는 카롤링거 왕조는 경건왕 루이 이후 세 갈래로 나뉘어졌다. 동부는 독일의 루이의 직속 후손들에게 떨어졌는데 그의 후손들이 카롤링거 왕조가 중단될 때까지 동부 왕국을 통치하였다. 또 한 파트는 콘라드(Conrad) 1세가 통치하는 프랑크 왕국이었다. 프랑크 왕국의 왕은 알레마니아(Alemannia: 주로 중부와 북부독일을 말함), 바바리아, 프랑키아, 작소니아의 영주들이 대표로 선출하였다. 콘라드 1세는 카롤링거 왕조의 사람이 아니었다. 콘라드 1세의 후계자인 작소니 출신의 헨리(하인리히) 1세는 동서 프랑크 왕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자신을 동프랑크의 국왕(Rex Francorum Orientalum)이라고 칭했다. 동프랑크왕국은 하인리히의 아들 오토 시대에 크게 확장되어 그로부터 이른바 오토왕조(Ottonian dynasty)가 시작되었다.

 

샤를르마뉴 대제가 아들 루드비히(루이)에게 대관함.

 

헨리(하인리히)가 자기 아들인 오토를 후계자로 임명하였을 때 오토 1세는 이미 아헨국왕으로 선출되어 있었다. 그러한 때에 오토 1세는 미망인이 된 이탈리아 여왕과 결혼했다. 그리하여 오토 1세는 이탈리아에 대한 통치권도 행사할수 있게 되었다. 오토 1세는 나중에 교황의 요청에 따라 이탈리아의 베렝가 왕을 물리치고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용맹한 오토는 955년에 마쟈르(헝가리)를 레흐펠트(Lechfeld) 전투에서 패배시켜 헝가리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기도 했다. 오토가 아우구스투스 황제로서 대관식을 가진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고대 로마제국을 새로운 왕조의 제국으로 이양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독일 황제들은 시저와 옥타비아누스로부터 시작한 로마제국 황제의 직접 후계자로서 명예와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Emperor)라는 타이틀은 당장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아우구스투스 황제(Imperator Augustus)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제국 황제의 심경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다가 로마황제(Imperator Ramanorum)라는 호칭은 콘라드 2세 황제 때부터 일반화되었다. 11세기 초반이었다.

 

822년 경건왕 루이(Ludwigh der fromme)가 교황 파샬1세(Paschal I)에게 사과하고 있다. 이런 치욕!

 

당시 동프랑크왕국은 바바리아, 알레만느, 프랑크, 작소니 등 여러 국가들이 연합을 이룬 왕국이었다. 연합체이므로 대표가 되는 국왕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작소니의 헨리(하인리히)가 국왕이 되고 나서 자기 아들인 오토에게 왕위를 세습하자 그후로는 국왕 선출이 사실상 형식적이 되었다. 그러다가 헨리 2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얘기는 달라졌다. 헨리 2세의 뒤를 이어 동프랑크왕국의 국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콘라트 2세(재위: 1027-1039)였다. 그는 오리지널 동프랑크 출신도 아니며 샤를르마뉴의 뒤를 잇는 카롤링거 왕조 출신도 아니었다. 콘라트는 프랑크 족의 한 지파인 살리(Salian) 가문의 출신이었다. 이때쯤 해서는 이미 영토 따로, 국왕 따로가 현실로 다가왔다. 프랑크 땅에 뿌리를 둔 전통부족들은 영토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 출신으로 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선출된 사람에 대하여는 별로 협조하지 않았다. 선출된 국왕도 당연히 자기 출신지역에 가서 지내기를 좋아했다. 출신지역도 아닌 곳에 가서 국왕이라고 폼을 잡고 앉아 있으면 누가 기쁜 마음으로 따르겠는가?

 

오토 3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십자가 형상의 보주를 들고 있다.

 

이렇게 되자 영토 간에 서먹서먹한 것이 점점 노골적으로 발전했다. 이때 오토 3세가 등장하여 해묵은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고 나섰다. 오토 3세는 각 지역에 있는 주교 궁전을 최대로 활용하여 오늘은 이곳 주교 궁전에서 지내고 내일은 저곳 주교 궁전에서 지냄으로서 전체 부족국가들을 통할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로마 교황이 임명하는 주교들의 세력은 막강하여서 마치 영주와 같은 행세를 하였다. 한편, 오토 3세는 각 부족국가의 군주를 공작으로 임명하여 군신간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리하였다. 이때로부터 독일왕국(Regnum Teutonicum: German Kingdom)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즉, 독일국가 또는 독일왕국이라는 것은 바바리아, 알레만느, 프랑크, 작소니 등의 부족국가들의 연합을 말하며 신성로마제국을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