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 집중분석/HRE 더 알기

예루살렘 왕까지 겸직

정준극 2009. 7. 20. 23:10

예루살렘 왕까지 겸직

 

감람산에서 바라본 예루살렘 (황금 사원이 보인다) . 예루살렘도 신성로마제국의 우산 아래에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처음에 그냥 로마제국이라고 불렀다. 그런 로마제국은 한때 와해될 뻔 했다. 이른바 책봉논란(Investiture Controversy)에 휩싸였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라는 타이틀을 지닌 로마제국의 황제는 교황이 임명하는 절차로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교황의 권위가 더욱 높아지었다. 결국 얼마후 부터는 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생겼다. 로마제국의 황제로서는 '아니,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밥도 먹기 힘들터인데 교황이라고 웃기네'라는 생각이었으며 교황은 교황대로 '아니, 우리가 임명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임명을 받지 못하면 황제는 무슨 황제냐?'면서 교황을 얕잡아 보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어느 때, 교황 그레고리 7세는 무슨 심사가 났는지 독일국가 국왕이며 로마제국의 황제인 헨리 4세의 임명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교황의 절대 권력에 순종하는 독일국가의 일부 군주(제후)들은 새로운 독일 왕으로 슈봐비아의 루돌프를 선출하고 교황에게 아우구스투스 황제로서의 대관식을 거행하여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새로운 로마제국 황제의 선출에 반발한 헨리 4세는 새로 선출된 루돌프와 한바탕 전쟁을 벌이지 않을수 없었다. 1080년의 일이었다. 전쟁은 3년이나 들었다. 독일의 일부 군주들이 새로 선출한 루돌프가 패배했다. 바티칸의 교황과 헨리 4세의 로마제국간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특히 바티칸이 로마제국에 순종하지 않고 순전히 독립적으로 행세하는 것이 계속 문제가 되었다. 얼마후인 1138년, 콘라트 3세가 독일국왕 겸 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그는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왕조의 사람이었다. 콘라트 3세는 로마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콘라트 3세의 뒤를 이어 독일국왕 겸 로마제국 황제에 오른 바바로싸의 프레데릭 1세는 로마제국의 명칭 앞에 신성(Holy)이라는 말을 붙여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교황에 버금하는 위상을 가지고자 해서였다. 프레데릭 1세는 신성로마제국이 국제적으로 공인되기를 원했다. 그렇게 되면 로마 교황의 간섭으로부터 독립적인 권력을 가질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1158년 론칼리아(Roncaglia)에서 회집한 제국의회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법에 저촉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레데릭 2세. 독수리와 함께 

 

로마제국이 신성로마제국으로 개명하고 나서 일어난 여러 변화에 대하여는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프레데릭 1세 이후에 새로운 개념의 도시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황제는 물론, 공국의 군주인 공작도 도시국가를 설치할수 있었던 것이다. 도시국가들이 생긴 이유는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략적 지역에 경제력을 집중하려는 목적이 컸다. 12세기에 설립된 도시국가의 대표적인 예는 프라이부르크(Freiburg)와 뮌헨이었다. 프라이부르크는 나중에 생긴 여러 자유도시들의 모델이 되었다. 도시국가들을 설립하는 것은 교황의 권세를 약화시키기 위한 제스처이기도 했다. 예루살렘도 하나의 도시국가로 간주하였다. 프레데릭 1세의 뒤를 이은 프레데릭 2세는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을 통하여 예루살렘을 신성로마제국의 도시국가로 선포하였다. 교황은 성지 예루살렘을 독일국가인지 신성로마제국인지 하는 것에 종속되는 도시국가가 되는 것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대놓고 싸울 형편도 아니어서 속만 상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예루살렘의 왕을 겸하는 관례가 생겼으니 그간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 팔레르모에 대성당에 있는 프레데릭 2세의 대리석관

 

프레데릭 2세는 호엔슈타우펜 왕조 출신으로서는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다. 프레데릭 2세는 종전의 황제들과는 다르게 명목상이 아닌 실권을 지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역할을 하고자 했다. 그는 처음에 시실리의 왕이었다. 그러다가 독일로 돌아가자 독일왕의 자리를 놓고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해야 했다. 바바로싸의 둘째 아들인 슈봐비아의 필립, 그리고 사자왕이라고 부르는 헨리의 아들 오토 4세가 경쟁 상대였다. 프레데릭 2세는 이들을 제치고 1220년 마침내 독일왕에 선출되고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그는 로마 교황이 마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위에서 군림하는 듯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교황이란 것이 말만 앞서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1228년 프레데릭 2세는 십자군을 모집하여 사라센이 점령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였고 마침내 성지 예루살렘을 수중에 넣게 되었다. 프레데릭 2세는 자연히 예루살렘 왕을 겸하게 되었다. 물론 교황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반대하였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위력이 너무 커서 실제로는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시리아와 레바논 국경지대에 있는 Krak des Chevaliers(십자군 기사들의 요새: 유네스코 보존문화재)

 

예루살렘 왕이 된 프레데릭 2세는 이제야말로 신성로마제국의 위상을 명실공히 높이는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러자니 각 군주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프레데릭 2세는 각 군주들의 권세를 크게 강화해 주는 몇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다만, 과거에 그가 통치하였던 시실리 왕국만은 교황이나 다른 어느 군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어 놓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그는 시실리가 독립국가로 존속되도록 하기 위해 재정독립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였다. 한편, 프레데릭 2세는 독일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군주(공작)들의 권위를 높여주어 그들로부터 복종을 얻어 내기 위해 그들에게 중앙권력이 직접 간섭할수 없는 특권을 부여하였다. 주로 영토 소유에 대한 특권이었다. 그런가하면 프레데릭 2세는 각지의 주교들도 더욱 많은 권력을 갖도록 했다. 즉, 주교들에게 그들이 통치하는 영토에서 세금을 걷고 화폐를 만들며 요새를 구축하는 사항들을 독자적으로 수행할수 있게 인정한 것이다. 이로써 도시국가들과는 별도로 이른바 주교가 통치하는 지역이 생기게 되었으니 예를 들면 잘츠부르크였다. 주교들에게 권세를 주는 것은 로마 교황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프레데릭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은혜를 입은 주교들이 로마 교황보다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더 종속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프레데릭 2세의 개혁조치로 인하여 유럽의 판도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알프스 북쪽은 주로 독일국가들의 군주(공작)들이 통할하고 프레데릭 2세는 그의 고향이라고 할수 있는 이탈리아(시실리 포함)의 통치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1232년의 문서에 의하면 독일 공작들은 처음으로 Domini Terrae(도미니 테라에: 영주)라는 호칭을 사용할수 있게 되었다. 이는 그들이 다스리는 영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대단한 변화가 아닐수 없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황제들이 이탈리아에 오래 머물자(1138-1254) 독일의 군주들은 그틈을 타서 자기들의 세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분주하였다. 특히 주로 평화협상을 통하여 서부 슬라브 지역들을 독일 국가들의 소속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런 조치는 따지고 보면 신성로마제국의 영역을 더욱 확장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신성로마제국은 포메라니아(Pomerania)와 실레지아(Silesia)까지 포함하는 광대한 영토를 포용하게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영토가 된 실레지아(사진은 실레지아 최대의 도시인 브라클라브). 실레지아는 현 체코공화국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