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8 바벤버그 왕조(Babenberg Dynasty)

정준극 2009. 7. 26. 08:05

참고자료 8

 

바벤버거슈트라쎄와

바벤버그 왕조(Babenberg Dynasty)

 

바벤버그 왕조는 오스트리아의 기초를 세운 왕조이다. 바벤버그 왕조는 9세기에 현재의 오스트리아 일부에 불과한 서쪽 지역을 관할하다가 차츰 세력을 확장하여 동쪽으로 영토를 넓혀 나가므로서 오늘날 오스트리아(당시는 오스타리키)의 기반을 마련했다. 바벤버그의 하인리히 2세(야소미오고트 대공)는 비엔나를 바벤버그 왕조의 본부로 삼기 위해 궁전을 짓고 당시 오스타리키의 수도로 삼았다. 지금의 1구 암 호프의 궁전이 그것이다. 그러면 과연 비엔나는 언제 어떻게 하여 도시로서 구실을 하게 되었는지 그 연혁을 바벤버그 왕조의 변천과 함께 살펴보자.

 

하인리히 2세 기념상. 비엔나 시청 앞 공원에 있다. 비엔나를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삼고 궁전을 지었으며 아일랜드 수도승들을 초청하여 기독교를 진작시키고자 했다.

 

비엔나가 처음으로 마을로서 기록에 올라간 것은 1137년이었다. 로마시대의 이름을 빌려 빈도보나 Civitas(마을)라고 불렀다. 1147년, 성슈테판성당이 봉헌되었고 1155년에는 바벤버그의 하인리히 2세가 현재의 암 호프(Am Hof)에 궁전을 짓고 오스타리키의 수도로 삼아 정착하였다. 1189년에는 신성로마제국황제인 바바로싸의 프레데릭(프리드리히) 1세 대왕(1123-1196)이 제3차 십자군전쟁에 참가하여 성지를 탈환하고 돌아오는 길에 암 호프에서 체류하였던 것은 비엔나를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인정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2세기에 들어서서 비엔나는 점차 확장되어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에 도심을 둘러싸는 성벽이 구축되었다. 바엔나 성벽은 오늘날의 링슈트라쎄를 따라 설치되었다. 그리고 슈테판스돔은 성벽 밖에 있었다.

 

 신성로마제국황제 프레데릭 바바로사. 두 아들(레오폴드 6세, 프리드리히 6세)을 양 옆에 거느리고 있다.

 

그후 레오폴드 6세 공작은 현재의 노이어 마르크트(Neuer Markt) 일대에 중요건물들을 건설하고 베니스와의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거점으로 삼았다. 이어 캐른트너슈트라쎄, 그라벤, 콜마르크트 지역에 건물들이 들어섰다. 13세기에 들어서서 비엔나에는 현재의 제1구인 인네레 슈타트(Innere Stadt)로부터 교외로 도시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비엔나는 알프스 북부에서 쾰른 다음으로 무역과 문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레오폴드 6세는 비엔나의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1221년에는 비엔나를 하나의 시(市)로서 정식으로 승격하고 시장을 임명하고 오늘날의 시의회와 같은 자문위원회를 두어 비엔나 시를 운영토록 했다. 그는 아직도 이교도들이 활동하던 비엔나를 기독교 도시로 만들기 위해 가톨릭을 초청하였다. 당시 비엔나에 들어온 독일 기사단, 도미니카 수도회, 미노리텐 수도회 등은 아직도 예전의 모습을 남겨 놓고 있다. 도이치 오르덴스 키르헤, 도미니카너키르헤, 미노리텐키르헤 등이 그것이다. 레오폴드 6세는 호프부르크 궁전 앞에 있는 미하엘교회를 창설하기도 했다. 비엔나는 점점 발전하여 음유시인들이 찬양의 노래를 부르는 대상이 되었다. 이때로부터 비엔나는 유럽의 문화예술의 중심지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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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하우스파르크에 있는 레오폴드 6세 기념상

 

1246년, 프레데릭 2세의 치하에서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와 영토문제를 두고 라이타(Leitha)라는 곳에서 일대 전투를 벌였다. 이곳에서 불행하게도 프레데릭 2세 공작이 전사하자 보헤미아 왕인 오토카르 2세와 헝가리 왕인 벨라 4세는 서로 오스트리아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비엔나의 귀족들이 보헤미아의 오토카르를 지지함으로서 오토카르가 당분간 오스트리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얼마후인 1273년, 독일 왕으로 선출된 합스부르크 왕조의 루돌프 1세가 오토카르를 물리치고 오스트리아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오스트리아에서 바벤버그 왕조가 통치하던 시기는 종말을 고하였으며 합스부르크 왕조의 시대가 문을 열었다. 이것이 바벤버그로부터 합스부르크까지의 간략한 일정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무엇이 무엇인지 확실히 않으므로 바벤버그 왕조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프레데릭 2세. 바벤버그 왕조에서 오스타리키(오스트리아)를 마지막으로 통치한 군주.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위스에서 시작된 것과는 달리 바벤버그 가문은 바바리아 북부인 프랑코니아의 밤베르크(Bamberg)에서 시작되었다. 가만히 살펴보면 밤베르크와 바벤버그라는 명칭은 서로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바벤버그가 독일의 동부 변방지역에 불과한 오스트리아(당시에는 오스타르키)를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일찍이 976년부터였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의 군주를 변방의 행정관(March: Mark) 또는 공작(Duke)이라고 불렀다. 바벤버그 왕조는 이로부터 공식적으로는 1248년 프레데릭 2세 공작이 보헤미아와 전투하다가 세상을 떠난후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왕이 오스트리아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고 나선 때까지 오스트리아를 통치하였다.

 

바벤버그 왕조는 어떤 왕조인가? 프랑스의 군왕들을 배출한 카페트 왕조(Capetian Dynasty)와 마찬가지로 바벤버그 왕조도 로베르트(Robertian) 가문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일반적으로 바벤버그 문중의 시조 어른은 포포(Poppo)라는 양반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9세기경 현재의 독일 헤쎄(Hesse)와 투링기아(Thuringia)에서 일어난 그라브펠트(Grabfeld) 백작으로서 제국의 동쪽에 있는 현재의 오스트리아 일부 지역을 통치하였다. 당시의 백작은 영주였다. 포포의 가문은 흥성하여 얼마후에는 포포의 아들인 헨리(하인리히)가 프랑코니아의 영주가 되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프랑코니아는 앞에서도 지적했듯 바바리아 북부의 넓은 지역이었다. 오늘날 프랑코니아의 중심도시는 프랑크푸르트이다. 886년 헨리는 북쪽의 노르만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포포의 또 다른 아들인 포포(아버지의 이름과 같음)는 880-892년에 투링기아의 태수로서 임명되었으나 독일 카롤링거 왕조의 아르눌프(Arnulf) 왕에게 폐위를 당하는 운명을 겪었다. 바벤버그 가문은 오래동안 콘라트(Conrad)가문과 원수지간이었다. 아르눌프 왕은 바벤버그를 견제하기 위해 콘라트 가문을 지원하였다. 당시 바벤버그의 기둥은 헨리의 세 아들이었으나 카롤링거 왕조의 아르눌프에게 눌려서 별로 기를 펴지 못하고 지냈다. 이들은 조상때 부터의 본거지였던 마인(Main) 상류지역에 집합하여 재기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에 옛 바벤버그 성을 확장하여 건설한 도시가 바로 밤베르크였다.

 

바벤버그와 콘라트의 원한 관계는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특히 두 가문이 서로 세력을 확장코자 분주했으므로 그러는 중에 트러블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바벤버그 숙원: Babenberg Feud’(宿怨)이라고 부른다. 906년, 두 가문은 프리츨라(Fritzlar)에서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콘라트 가문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선대 콘라트 백작이 전사하는 불운을 당했다. 바벤버그에서도 헨리의 세 아들 중 두명이 전사했다. 마지막인 아달베르트(Adalbert)는 독일 국왕에 의해 제국재판소에 소환되었지만 아달베르트는 소환을 거부하고 테레스(Theres)성에서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국왕의 군대에게 항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왕의 섭정인 마인츠의 주교 하토(Hatto)는 아달베르트에게 관용을 베풀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건 말뿐이었고 결국은 참수형을 당했다.

 

콘라트 가문은 바벤버그가 세력을 떨치던 프랑코니아를 인수하여 군주가 되었다. 반면, 바벤버그 가문은 제국의 동부 변방에 있는 작은 영토만을 겨우 관할하는 처지가 되었다. 영토의 한쪽 길이가 60마일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규모이기 때문에 영지라고 할수도 없는 곳이었다. 바바리아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지역이었다. 얼마후 동부 변방의 작은 지역을 관할하던 바벤버그의 레오폴드 1세는 ‘땅이 곧 국력’이라는 모토로 영토 확장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레오폴드 1세에 의해 확장된 동부 변방지역은 나중에 오스트리아 공국이 되는 기반이 되었다. 976년, 바바리아 공국의 오토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자 바바리아의 세력은 크게 높아졌다. 오토 2세에게 충성을 보인 바벤버그의 리우트폴드(Liutpold)는 오토 2세에 의해 동부지역인 오스타리키의 변경백(Margrave 또는 태수)으로 정식으로 임명을 받았다. 한편, 리우트폴드는 동진 정책을 계속하여 헝가리의 일부까지 오스트라키의 관할 아래에 두었다. 994년, 리우트폴드의 뒤를 이은 헨리 1세(하인리히 1세)는 아버지의 정책을 충실히 이어 받아 계속 영토를 확장해 나갔고 이러한 동진 정책은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2세(야소미어고트)에 까지 이어져 오스타리키의 태수로서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인리히 2세는 비엔나를 오스타리키의 수도로 삼고 로마 시대의 빈도보나에 바벤버그의 궁전을 짓고 정착하였다. 그것이 자꾸 말해서 미안하지만 암 호프의 궁전이다.

 

하인리히 2세의 뒤를 이어 1177년에 오스타리키 공작이 된 레오폴드 5세는 1182년과 1190년의 두차례에 걸쳐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였다. 레오폴드 5세는 팔레스타인에서 영국의 사자왕 리챠드 1세와 다툼이 있었다. 비엔나에 돌아온 레오폴드 5세는 리챠드 1세가 귀국하는 길에 오스트리아를 경유하게 되자 그를 느닷없이 체포하여 헨리 6세 황제에게 넘겼다. 사자왕 리챠드는 비엔나에서 상당히 떨어진 뒤른슈타인에 감금되었다가 나중에 영국으로부터 몸값을 받고 석방하였다.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는 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레오폴드 5세는 슈티리아(Styria)를 획득하여 바벤버그 왕조의 영토를 더욱 확장하였다. 1194년, 레오폴드 5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프레데릭에게 오스트리아를 상속했으며 다른 아들인 레오폴드 6세에게는 슈티리아를 물려 주었다. 그러나 1198년 프레데릭에 세상을 떠나자 오스트리아와 슈티리아는 통합되어 레오폴드 6세의 통치아래에 있게 되었다. 레오폴드 6세는 영광왕이라는 별명을 받을 정도로 오스타리키의 번영을 위해 노력하였다. 레오폴드 6세의 치하에서 비엔나는 독일 국가 중에서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특히 음유시인들의 활동이 활발한 도시가 되었다. 그로부터 비엔나가 예술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레오폴드 6세의 아들인 프레데릭 2세는 외교에 능하지 못하여 보헤미아왕, 헝가리왕, 그리고 심지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도 마찰이 심했다. 프레데릭 2세는 내정에도 문제를 일으켜 그의 어머니와 누이들을 자격박탈 함으로서 궁중에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백성들에게 강압적이어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1236년 프레데릭 2세는 강제로 공작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얼마후 로마 교황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레데릭 2세(오스트리아의 프레데릭 2세와 이름이 같음)를 파문하자 오스트리아의 공작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1246년, 오스트리아의 프레데릭 2세는 어떤 전투에 참가했다가 불행하게도 전사하였다. 그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유일한 후계자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형의 유일한 아들인 게르트루트(Gertrud)였다. 그러나 게르트루트이건 누구건 아무도 오스트리아의 공작에 임명되지 못하였다. 몇 년에 걸쳐 공위시대가 이어졌다. 그 틈을 타서 보헤미아의 오타카르(Otakar) 2세가 오스트리아와 슈티리아를 점령했다. 그러다가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가 대반격을 시도하여 오타카르를 무찌르고 오스트리아의 공작이 되었다. 그로부터 합스부르크가 1918년 1차 대전의 종말까지 오스트리아를 통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