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14
크리스틴넨가께와
합스부르크의 마리 크리스틴 대공비(Archduchess Marie Christine)
마리 크리스틴 자화상. 실을 뽑는 물레를 감고 있는 모습이다. 다른 공주들 같았으면 호화로운 옷으로 감싸고 있었을 텐데 마리 크리스틴은 여염집 아낙네들 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비교적 검소한 옷을 입고 노동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사랑을 받을만한 행동이 아닐수 없다.
마리 크리스틴(마리아 크리스티나: 1742-1798)은 마리아 테레자 여제와 신성로마제국 프란시스 1세 황제의 넷째 딸이다. 마리 크리스틴은 작센의 알베르트 공작과 결혼하여 비엔나의 알베르트 궁전(현재의 알베르티나 미술관)에서 살았다. 마리 크리스틴은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 알베르트는 사랑하는 부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나서 너무나 상심하여 모든 재산과 정성을 기울여 합스부르크의 교구교회인 아우구스틴 교회에 묘지(영묘)를 만들어 봉정하였다. 아우구스틴 교회의 마리 크리스틴 영묘는 당대 최고의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Antonio Canova)가 제작한 피라밋 형태로서 묘지 중에서는 가장 값비싸고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편 알베르트는 마리 크리스틴이 세상을 떠난후 오로지 미술품에만 취미를 들이며 독신으로 평생을 지냈다. 아무튼 마리 크리스틴과 알베르트의 순애보적인 부부애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에피소드였다. 혹시, 남편 알베르트가 남들이 보지 않는 화장실가서 팍팍 웃으면서 겉으로는 가장 애통하는 척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거야 알수 없는 일이다. 마리 크리스틴은 다행히 엄마 아빠를 별로 닮지 않아서 미인형이었다. 한참 아래 동생인 마리 앙뚜아네트(마리아 안토니아)보다 더 예쁘면 예뻤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리 크리스틴은 마리아 테제자의 아들딸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유결혼에 성공한 사람이다. 다른 모든 형제들은 정략결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마리 크리스틴의 아버지 프란시스 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마리 크리스틴의 애칭은 미미(Mimi)였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에 나오는 청순가련형 주인공의 이름도 미미이다. 마리아 테레자와 프란시스 1세는 자식 농사를 열심히 지어서 무려 16명의 자녀를 두었다(그 중 1명은 사산하여 세상에서 빛을 보지도 못했다). 일개 소대에 달하는 자녀 중에서 미미가 마리아 테레자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유는? 하는 짓이 밉지 않았고 교양이 풍부했으며 특히 예술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딸들 중에서 가장 예뻤다. 일례를 들어서 미미는 재능 있는 화가였다. 미미가 그린 자화상을 비록 자기가 자기의 얼굴을 그렸기 때문에 되도록 예쁘게 그렸겠지만 아무튼 타고난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이어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척 즐겁게 들뜨도록 만들고 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가 넷째 딸 마리 크리스틴을 특별히 사랑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두 사람의 생일이 같다는 것이다. 5월 13일이었다. 그러니 평소에 검소를 주장하는 어머니로서는 생일상을 두 번 차리지 않아서 좋았을 것이다.
마리 크리스틴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 여제
아무리 성모 마리아와 같은 어머니라고 해도 어떤 한 아이를 유별나게 총애하는 사람이면 다른 아이들의 하는 짓이 밉게 보이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형제들도 미물이 아닌 다음에야 어머니가 유독 누구 한 사람만 사랑하면 질투를 하게 마련이다. 큰 아들인 요셉(나중에 요셉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경우가 그러했다. 요셉은 앞으로 대권을 맡을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로부터 별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꾸지람만 들어서 항상 마음이 불편한 입장이었다. 더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명목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지만 실권은 모두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가 쥐고 있어서 상당 기간 동안 어머니의 수렴청정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러한 입장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여동생 마리 크리스틴을 예쁘게만 보아줄 수 없었다. 얼마후 요셉은 파르마(Parma)의 공주 마리아 이사벨라(Maria Isabella: 1741-1763)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사벨라는 마음씨도 착하지만 예쁘게도 생겼다. 마리 크리스틴과는 한살 위였다. 요셉은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이사벨라를 무척 위하게 되었다. 물설고 낯 설은 비엔나에 온 이사벨라에게 사분사분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은 마리 크리스틴이었다. 이후 이사벨라와 마리 크리스틴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이 동성연애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마리 크리스틴은 결혼한 후에도 이사벨라와 각별하게 지냈다. 멀리 떨어지지 않고 같은 비엔나에 살게 되었기 때문에 자주 만날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은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다졌다. 요셉 2세와 이사벨라 사이에는 딸을 하나 두었다. 마리아 테레자라고 이름을 붙였다. 불행하게도 8살 생일을 며칠 남겨둔채 세상을 떠났다. 이사벨라는 22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장질부사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마리 크리스틴과 알베르트 대공 사이에 첫 아기가 태어났으나 진실로 불행하게도 사산되었다. 딸이었다. 마리 크리스틴은 그 아이의 이름을 친구이며 올캐의 이름을 따서 이사벨라라고 지었다. 마리 크리스틴은 이렇듯 자기 부인이 자기보다는 올캐인 마리 크리스틴과 아주 가깝게 지내자 요셉은 외톨이가 된 듯한 느낌이었고 그리하여 더욱 마리 크리스틴과 소원하게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이사벨라가 세상을 떠나자 요셉은 자기가 더욱 따듯하게 이사벨라를 대하여 주지 못한 것을 매우 후회하며 마리 크리스틴에게 가졌던 미운 감정을 모두 털어냈다고 한다.
마리 크리스틴의 다른 초상화. 이번에는 머리에도 신경을 쓰고 옷도 그럴듯한 것을 입었다.
마리 크리스틴은 예쁘고 착하기도 했지만 똑똑했다. 마리 크리스틴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 마리 크리스틴은 먼 사촌이 되는 알베르트 공작과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알베르트가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어서 곤란하기도 했지만 가진 것도 별로 없었다. 마리아 테레자로서는 정치적 입장 때문에 마리 크리스틴을 저 멀리 스페인이나 네덜란드의 왕실로 시집보낼 생각이었다. 그러한 때에 아버지 프란시스 1세가 세상을 떠났다. 프란시스 1세는 대단한 바람둥이였지만 마리아 테레제는 의외로 그를 무척 사랑하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마리아 테레자의 상심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마리 크리스틴은 이러한 어머니의 심정을 잘 이용하여서 ‘세상에 사랑 없는 결혼을 하면 얼마나 불행한지 아세요?’라면서 설득하여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승낙 받았다. 마리아 테레자의 자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자유결혼을 한 경우였다. 알베르트 공작은 마리아 테레자에게 왕국을 제공할 처지도 아니고 왕관을 증정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마리 크리스틴이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를 설득하여 결혼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알베르트 공작과 마리 크리스틴 공작비는 네덜란드의 공동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마리 크리스틴과 결혼한 알베르트 대공(네덜란드 총독)
마리 크리스틴의 동생인 마리아 아말리아도 별로 권세가 없는 샤를르 공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언니 마리 크리스틴의 자기가 선택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가지고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에게 자기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연히 마리아 테레자가 ‘오냐, 너도 네 마음대로 해라’라고 말할줄 알았다. 하지만 마리아 아말리아는 전략을 잘못 세웠다. 어머니로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감히!’라는 일성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고 대신 파르마의 페르디난트 왕과 결혼하였다. 이렇게 되자 다른 딸들은 모두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의 마리 크리스틴 편애에 대하여 상당한 불평을 털어 놓았다. 더구나 마리아 테레자는 마리 크리스틴의 결혼 지참금으로 테센공국의 영지를 알베르트에게 주었다. 그래서 알베르트는 작센-테센 공작의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 알베르트로서는 마리 크리스틴이 세상을 떠나자 애통에 애통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리 크리스틴이 마리아 테레자의 사랑을 독차지하자 다른 딸들은 아예 마리 크리스틴과는 상대도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연락하며 지냈다. 마리아 안토니아(마리 앙뚜아네트),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카롤리나는 서로 편지도 주고받고 선물도 주고받으면서 지냈다. 마리 크리스틴의 여자 형제들만 마리 크리스틴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마리 크리스틴의 큰오빠인 요셉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큰 아들.
요셉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의 대공이 된 레오폴드 2세도 마리 크리스틴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리 크리스틴이 건방지며 오만하고 톡톡 쏘는 말을 서슴지 않기 때문에 싫어했다. 그리고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자에게 형제들에 대한 시시콜콜한 얘기까지도 모두 고해바친다고 생각해서 싫어했다. 마리 크리스틴의 형제들은 마리아 테레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마리 크리스틴과 화해하지 못했다. 특히 여자 형제들이 그랬다. 망내 여동생인 마리 앙뚜아네트가 특히 그랬다. 언젠가 네덜란드 총독으로서 마리 크리스틴이 베르사이유를 방문했을 때 마리 앙뚜아네트는 언니 마리 크리스틴을 마치 딴 사람을 보는 듯 무시했다. 마리 크리스틴은 베르사이유 안에 건설한 마리 앙뚜아네트의 농촌스타일 저택인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지만 마리 앙뚜아네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마리 크리스틴의 올캐인 파르마의 마리아 이사벨라 공주. 22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마리 크리스틴은 알베르트 공작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 크리스티나였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때어난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두 사람은 마리 크리스틴의 둘째 오빠인 레오폴드의 아들 중 하나를 양자로 들였다.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샤를르 대공이다. 레오폴드와 부인인 시실리의 마리아 루도비카는 1792년에 세상을 떠났다. 레오폴드가 황제가 된지 2년후였다. 그래서 샤를르는 어릴 때에 마리 크리스틴과 알베르트 부부의 양자로 들어올수 있었다.
아우구스틴 교회에 있는 마리 크리스틴 묘지(영묘) - 안토니오 카노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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