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36
프리드리히슈트라쎄와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슈트라쎄는 합스부르크의 프레데릭 3세(프리드리히 3세)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기념하여서 붙인 이름이다. 슈테판성당의 중앙제단 오른쪽의 조용한 곳에 있는 커다란 대리석관은 프레데릭 3세의 관이다. 대단히 아름답고 웅장한 대리석관이다. 그의 치하에서는 권력 다툼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부르군디를 합스부르크의 예하에 둠으로서 합스부르크의 위상을 크게 높인 공적을 쌓았다. 프레데릭 3세(1415-1493)는 1440년 알베르트 2세의 뒤를 이어 독일 왕에 선출되었고 이어 로마에서 니콜라스 5세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가져 정식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인물이다. 프레데릭 3세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받은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다. 그 이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로마 교황간에 불화가 계속되어 대관식이 거행되지 못했다.
프레데릭 3세
프레데릭 3세는 에르네스트 공작의 아들로 인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에르네스트 공작은 인너 오스트리아(Inner Austria), 즉 슈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Carniola)를 통치하였다. 그는 마조비아(Masovia)의 심부르기스(Cymburgis)와 결혼하여 마조비아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에르네스트 공작은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 라인이다. 프레데릭 3세는 142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레데릭 5세로서 인너 오스트리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1440년에는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때에는 프레데릭 4세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12년후인 1452년,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이때부터는 프레데릭 3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가지던 해에 포르투갈의 엘레오노르(Eleonor)공주와 결혼했다. 엘레오노르는 막대한 지참금을 가지고 왔다. 프레데릭은 그 돈으로 빚을 갚았다. 뿐만 아니라 재정이 넉넉해지자 입지가 크게 강화되었다.
프레데릭 3세가 신부가 될 포루투갈의 엘레오노라 공주를 그럴듯하게 영접하고 있다.
그때 바티칸의 교황은 아무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고 해도 교황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문서를 만들어 비엔나의 신성로마제국 황제(프레데릭 3세)와 합의하였다. 이를 Vienna Concordat라고 부른다. 이 문서는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까지 유효하여 합스부르크와 교황청간의 관계를 규정했다. 프레데릭은 로마에서 교황에 의해 대관식을 가진 마지막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프레데릭 이후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교황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로마에 가지 않았다. 프레데릭가 독일 왕으로 선출된 이래 선제후들과 대공들은 신성로마제국의 일대 개혁을 요구하였다. 그라나 프레데릭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선제후들은 새로운 독일 왕을 선출코자 했다. 프레데릭은 선제후들을 설득하여 또 다른 독일 왕을 선출하는 일을 겨우 막았다.
프레데릭의 정치는 대단히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성공적인 면도 있었다. 프레데릭의 제1의 적은 그의 통치를 반대하는 동생 알베르트 6세였다. 프레데릭은 알베르트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승리한 일이 없이 그저 패배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뛰어난 수완을 보여주었다. 당시 남부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한 지역, 즉 오스트리아공국과 헝가리 및 보헤미아는 프레데릭 3세의 조카인 10세의 라디슬라우스(Ladislaus Posthumus)가 통치하고 있었다. 프레데릭 3세는 오스트리아공국과 헝가리 및 보헤미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코자 라디슬라우스를 체포하여 감금하였다. 라디슬라우스는 1452년 남부오스트리아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프레데릭 3세는 사실상 남부오스트리아를 통치하였다. 마찬가지로 프레데릭 3세는 또 다른 조카인 합스부르크의 티롤 라인인 지기스문트(Sigismund)에게도 같은 전략을 구사하였다. 하지만 그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와 보헤미아는 통제하지 못했다. 게다가 1485년 헝가리왕 마티아스 코르비누스(Matthias Corvinus)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비엔나에 연금되었고 결국은 그로부터 5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프레데릭 3세는 조카 라디슬라우스로부터 남부 오스트리아를, 다른 조카 지기스문트로부터는 북부 오스트리아의 통치권을 얻어 내는데 성공했지만 주위에 많은 적을 두게 되었고 특히 헝가리와 보헤미아로부터 언제 침공을 당할지 모르는 형편에 있었다. 그리하여 프레데릭 3세는 재임 기간중 비엔나에서 뿐만이 아니라 린츠, 그라츠, 비너 노이슈타트 등지를 전전하여 지냈다.
프레데릭 3세의 기념 메달
그러나 외부적인 정책은 놀랄만큼 성공적이기도 했다. 프레데릭 3세는 북부 부르군디(Burgundy)의 샤를르를 제압하여 샤를르의 딸인 메리를 자기의 아들인 막시밀리안과 결혼토록 했다. 샤를르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브루군디는 샤를르의 딸과 사위인 막시밀리안이 통치하게 되었다. 결국 합스부르크는 브루군디라는 막강한 영토를 통치하게 되어 유럽에서 강호로 부상하게 되었다. 당시 합스부르크의 모토는 ‘다른 사람들은 전쟁이나 하라, 우리는 결혼이나 하겠다’였다. 한편, 프레데릭 3세의 딸인 쿠니군데(Kunigunde)와 바바리아 공작인 알베르트 4세와의 결혼은 또 다른 음모와 기만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프레데릭의 패배라고 할수 있다. 알베르트는 프레데릭의 영토 일부를 불법적으로 차지한 후에 당시 인스부르크에 별도로 살고 있는 쿠니군데에게 청혼하였다. 프레데릭은 알베르트의 청혼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알베르트는 결혼 지참금으로 그가 불법으로 점령한 프레데릭의 영토들을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후 알베르트는 또 다시 프레데릭의 영토를 차지했다. 이번에는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였다. 분노한 프레데릭은 결혼약속을 취소했다. 그러나 프레데릭이 결혼취소를 인스부르크에 있는 딸 쿠니군데에게 전하기도 전에 알베르트는 재빨리 인스부르크로 가서 프레데릭이 이미 허락한 사항이라면서 쿠니군데와 결혼식을 올렸다. 프레데릭의 아들 막시밀리안이 중간에 나서서 ‘기왕 이렇게 된 것을 어떻게 하느냐? 남들의 이목도 있는데’라면서 중재하는 바람에 다행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프레데릭은 77세에 린츠에서 세상을 떠났다. 왼쪽 다리의 큰 상처 때문에 절단하는 수술을 받다가 수술이 실패하여 숨을 거두었다. 니콜라우스 게르하르트 폰 레이덴이 만든 프레데릭 3세의 대리석관은 중세 조각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절단된 그의 다리는 함께 안장되었다. 프레데릭의 뒤를 이어 아들 막시밀리안이 오스트리아를 통치하였다.
프레데릭 3세는 린츠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슈테판성당의 대리석관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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