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54 레오폴드 휘글(Leopold Figl)

정준극 2009. 8. 8. 09:18

참고자료 54

 

레오폴드-휘글-가쎄와

정치가 레오폴드 휘글(Leopold Figl)

 

 

레오폴드 휘글은 1902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루스트(Rust)에서 태어나 1965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 기민당 정치가였다. 그는 2차 대전후 구성된 오스트리아 정부의 초대 내각수상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40대 초반이었다. 비엔나자연자원-응용생명과학대학교의 농학과를 졸업한 그는 1931년 남부오스트리아 농민연맹의 부회장으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1933년, 농민연맹의 회장이 되었으니 그때 31세였다. 나중에 연방 수상이 된 엥겔베르크 돌푸스(Englebert Dollfuss)는 그때부터 휘글의 후원자였다. 돌푸스가 수상이 되어 행정개혁을 단행할 때에 휘글은 남부오스트리아 의회의 경제개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아울러 연방정부의 경제자문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돌푸스 수상은 오스트리아가 나치에게 합병당하기 전에 이미 나치에 의해 살해되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직후, 휘글은 다하우(Dachau) 강제수용소로 추방되었다. 휘글은 이곳에서 무려 5년을 지내다가 1943년 5월에 석방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한때 석유기술자로 취직하여 일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944년 10월,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휘글은 다시 나치에게 체포되어 마우타우젠(Mauthausen)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1945년 2월, 휘글은 비엔나의 나치 법정에서 반역죄로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처형이 지연되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연합군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하고 통치하기 시작했다. 소련군 사령부는 휘글에게 비엔나 시민들에 대한 식량조달 문제를 해결토록 일임했다. 1945년 4월 14일, 휘글은 농민연맹을 재조직하였고 3일 후인 4월 17일에는 농민연맹을 그날 창설된 오스트리아국민당(ÖVP)에 통합시켰다. 휘글은 ÖVP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그는 남부오스티리의 주정부의 임시 주지사 겸 부총리가 되어 전후 국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1945년 12월, 오스트리아에서는 1934년 이해 최초로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 ÖVP는 절대 다수의 의석을 차지했다. 휘글은 수상으로 추천되었다. 소련은 휘글을 적극 지지하였다. 소련은 휘글의 반나치 운동과 업무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휘글은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다. 휘글에 대한 농담이 많은 것은 그만큼 인기가 높다는 증거였다. 예를 들면, 미국과의 ‘포도주 정책’에 대한 농담, 그리고 ‘소련 곰’에 대한 농담이었다. 휘글은 1945년부터 1966년까지 오스트리아사회당(SPÖ)과의 대연정이 유지되도록 이끌어주었다. 휘글은 연정을 통하여 국가경제부흥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미국의 전후 마샬 플랜은 휘글의 경제부흥정책에 많은 도움을 준 것이었다. 1950년대 초반에 ÖVP내에서 휘글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연정에 대한 불만이었다. 1953년 11월, 휘글은 수상직에서 사임하였다. 율리우스 라브(Julius Raab)가 바톤을 이어받았다. 라브는 SPÖ에 대하여 휘글보다 융통성이 없었다. ÖVP는 라브의 정책을 지지하였다.

 

미노리텐키르헤 앞에 있는 레오폴드 휘글 흉

 

라브는 1955년 5월 15일, 4대 강국이 서명하는 ‘오스트리아조약’을 체결토록하여 오스트리아를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토록 했다. 휘글은 비록 수상직에서 물러났으며 정부의 외무장관직을 맡아 오스트리아조약의 체결에 막후에서 큰 역할을 했다. 1959년의 총선에서 SPÖ는 예상 외의 대승을 거두어 이제 의석에 있어서 ÖVP와 1:1이 되었다. SPÖ는 ÖVP와의 협상카드로서 브루노 크라이스키(Bruno Kreisky)를 외상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휘글은 국가위원회 의장(1959-1962)를 맡았다. 그러다가 얼마후 비엔나의 공직을 사퇴하고 고향인 남부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부오스트리아의 주지사로 활동했다. 휘글은 오스트리아에서 보이스카웃과 유사한 화드핀더(Pfadfinder: 개척자동맹)를 창설하였다. 그의 아들인 요한네스는 초대 화드핀더의 총재를 맡아했다. 비엔나는 레오폴드 휘글을 기념하여 미노리텐교회 앞에 그의 흉상을 설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