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55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

정준극 2009. 8. 8. 09:26

참고자료 55

 

리비히가쎄와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

 

위대한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히히


일반 화학도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자로서 위대한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가 누군지 모른다고 하면 곤란한 일이다.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태어난 리비히(1803-1873)는 질소(나이트로젠)를 발견했고 리비히 콘덴서를 발명했으며 미니멈법칙(Law of Minimum)을 개발한 화학자이다. 비엔나의 리비히가쎄는 화학자 리비히를 기념하여 붙인 거리이름이다. 리비히는 농화학과 생화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위대한 학자이다. 그는 세계 최초로 유기화학협회의 창설을 위해서도 크게 기여했다. 교수로서 리비히는 실험위주의 현대화학교육을 주도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화학교수였다. 리비히는 근대 ‘비료산업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식물 영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질소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그가 개발한 ‘미니멈 법칙’은 각 영양소의 작물에 대한 효과를 계산하는 공식이다. 한편, 그는 소고기와 마찬가지 성능의 인조고기 가공공정을 개발하여 산업화에 기여했다. 리비히가 세상을 떠난지 20여년후 제조된 옥소(Oxo)표 인조소고기 맑은 국물 수프(부이용: Bouillon)가 산업화되었다. 각설탕처럼 큐브로 된 것을 물에 담그면 진짜 소고기로 만든 것과 똑같은 부이용 수프가 되는 물질이다.

 

진짜 소고기와 똑같은 옥소표 부이용 큐브제품 

 

다름슈타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리비히는 어릴 때부터 화학에 유별난 관심을 가졌다. 그는 불과 11세 때에 어떤 약국의 도제(견습)로 들어가 화학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리비히는 본(Bonn)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지도교수인 칼 빌헬름 코트로브 카스트너(Karl Wilhelm Gottlob Kastner)는 리비히의 아버지의 사업 친구였다. 카스트너 교수는 화학자로서 리비히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카스트너 교수가 에어랑겐(Erlangen)대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리비히도 그를 따라갔다. 리비히는 화학박사학위를 에어랑겐대학교에서 받았다. 1822년 리비히는 스승인 카스트너가 헤쓰정부로부터 주선한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리비히는 루이 게이-뤼사크(Louis Gay-Lussac)의 개인 실험실에서 일했다. 리비히는 파리에 있으면서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와 조르주 퀴비어(Georges Cuvier: 1769-1832)등과 친분을 쌓았다. 파리에서 고향인 다름슈타트로 돌아온 그는 정부관리의 딸인 헨리에트 몰덴하우어(Heinriette Moldenhauer)와 결혼하였다.

 

유스투스 리비히 대학교 기쎈의 로고

 

기쎈 대학교 본관

 

리비히는 21세의 청년으로서 훔볼트의 추천에 의해 기쎈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2차 대전후 기쎈(Giessen)대학교는 리비히를 기려서 대학교명을 ‘유스투스 리비히 대학교 기쎈’(Justus-Liebig-Universität Giessen)으로 바꾸었다. 그는 기쎈에서 세계 최초로 화학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어 그는 바바리아 국왕의 요청으로 1852년부터 뮌헨대학교 교수가 되어 1873년 뮌헨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봉사했다. 리비히는 1845녀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는 뮌헨의 남부공동묘지(Südfriedhof)에 안장되었다. 1953년 당시 서독정부는 리비히를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다.

 

    

1953년  서독정부가 발행한 리비히 기념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