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12. 말러슈트라쎄(Mahlerstrasse)로부터 뮤제움슈트라쎄(Museumstrasse)까지

정준극 2009. 8. 8. 21:54

말러슈트라쎄(Mahlerstrasse)로부터 뮤제움슈트라쎄(Museumstrasse)까지

 

마리아 테레지엔 플라츠의 마리아 테레자 여제 기념상 

 

- 말러슈트라쎄(Mahlerstrasse): 1919년 위대한 작곡가 겸 지휘자인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를 기념하여 붙인 거리이름이다. 1861년부터는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을 기념하여 막시밀리안슈트라쎄(Maximilianstrasse)라고 불렀으나 1918년 합스부르크의 종말과 함께 거리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막시밀리안은 프란츠 요셉 황제의 동생으로서 멕시코 황제를 지내다가 멕시코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말러슈트라쎄는 캐른트너슈트라쎄에서 슈테판성당 쪽으로 첫 번째 오른쪽 길이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이후인 1938년부터는 말러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말러슈트라쎄라는 명칭을 없애고 대신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명가수’(Meistersinger)라는 단어를 가져와 마이스터징거슈트라쎄(Meistersingerstrasse)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난 후인 1946년 다시 말러슈트라쎄로 환원되었다. 구스타브 말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 블로그의 비엔나의 음악가들 편을 참고하기 바람. 슈타츠오퍼 옆의 브리스톨 호텔 뒤편 길이다.

 

말러슈트라쎄

 

- 마카르트가쎄(Makartgasse): 1894년, 유명한 화가인 한스 마카르트(Hans Makart)를 기념하여 붙인 거리이름이다. 그 전에는 쉴러가쎄(Schillergasse)라고 불렀으나 비엔나미술아카데미의 앞에 쉴러플라츠(쉴러 광장)가 조성되었으므로 마카르트가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한스 마카르트는 합스부르크 루돌프 황태자비인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 초상화 등을 남겼다. 자세한 내용은 본 블로그의 ‘비엔나에서 활동한 미술가’편을 참고하기 바람.

 

마카르트가쎄

 

- 마르크-아우렐-슈트라쎄(Marc-Aurel-Strasse): 1886년부터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기념하여 붙인 거리이름이다. 그전에는 크렙스가쎄(Krebsggase)의 일부였다. 마르크 아우렐 황제는 비엔나 교외의 카르눈툼(Carnuntum)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마르크-아우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 블로그의 비엔나 역사에서 빈도보나편을 참고하기 바람. 마르크-아우렐-슈트라쎄는 투흐라우벤에서 프란츠 요셉스 카이 방향으로 연결된 길이다.

 

마르크 아우렐 슈트라쎄

 

- 마르코-다비아노-가쎄(Marco-d'Aviano-Gasse): 비엔나에 카푸친수도회를 도입하고 카푸친교회를 세운 마르코 다비아노를 기념하여 1935년부터 붙인 거리이름이다. 카푸친교회에는 합스부르크 왕실의 영묘가 있다. [참고자료 58]

 

마르코 다비아노 가쎄. 노이에 마르크트 안쪽.

 

- 마리아-테레지엔-플라츠(Maria-Thersien-Platz):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의 사이에 있는 광장이다.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기념상이 장엄하게 서 있다. 1888년부터 마리아-테레지엔-플라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 중간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플라츠

 

- 마리아-테레지엔-슈트라쎄(Maria-Thersien-Strasse): 1870년부터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기념상을 기념하여 부르기 시작한 거리이름이다.

- 마리엔슈티게(Marienstiege): 마리아 암 게슈타데 교회로 올라가는 길로 ‘마리아의 계단’이라는 뜻이다. 1837년부터 성모를 기려서 마리엔슈티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안 운제러 프라우엔 슈티게(An unserer Frauen Stiege: 성모계단), 안 데어 그슈태텐(An der Gstätten), 슈티게 추르 키르헤 마리아 암 게슈타데(Stiege zur Kirche Maria am Gestade)등으로 불렀다.

 

마리엔슈티게

 

- 막스-봐일러-플라츠(Max-Weiler-Platz): 2003년부터 화가 막스 봐일러를 기념하여 붙인 거리이름이다. 캐른트너슈트라쎄에서 봘피슈가쎄로 나 있는 짧은 길이다.

 

막스 봐일러 플라츠

 

- 마이제더가쎄(Maysedergasse): 1876년부터 궁정음악감독인 요셉 마이제더(Josef Mayseder)를 기념하여 붙인 거리이름이다. 그전인 1305년에는 치허슈트라쎄(Ziecherstrasse: 이부자리길)라고 불렀으며 1708년부터 1862년까지는 코뫼디엔가쎄(Komödiengasse)라고 부르다가 한때는 세실리엔가쎄(Caciliengasse)라고 부르기도 했다. 자허 호텔 옆길이다.

 

마이제더가쎄. 안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알베르티나이다.

 

- 메타스타시오가쎄(Metastasiogasse): 1886년에 이탈리아 출신의 시인이며 극작가인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를 기념하여 붙인 거리이름이다. 그전에는 크로이츠가쎄(Kreuzgasse: 십자가길)이라고 불렀다. 메타스타시오의 기념상은 미노리텐교회 안에 설치되어 있다. 미노리텐교회에서 폭스가르텐(Volksgarten: 국민공원) 방향으로 빠지는 길이 메타스타이오가쎄이다.

 

메타스타시오가쎄. 안쪽의 건물은 미노리텐교회

 

- 미하엘러플라츠(Michaelerplatz): 호프부르크 궁전의 정문인 미하엘러토르(미하엘문)의 앞에 펼쳐진 광장이 미하엘러플라츠이다. 지하철을 건설중에 로마유적지가 발굴되어 현재 노천에 보관하고 있다. 미하엘러플라츠라는 이름은 13세기에 건설된 성미하엘 궁정교구교회를 기념하여서 붙인 것이다.

 

미하엘러플라츠. 왼쪽이 로스하우스, 오른쪽이 미하엘러키르헤

 

- 밀르흐가쎄(Milchgasse): 일찍이 1380년에 이미 밀르흐슈트라쎄(Milchstasse)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1846년에는 베드로교회(Peterskirche)를 기념하여 산크트 페터 가쎌(St Peter Gassel)이라고 불렀다. 그전에는 밀르흐페어카우프플라츠(Milchverkaufplatz), 즉 우유를 사고파는 광장이라고 불렀다. 밀르흐가쎄 1번지는 모차르트가 비엔나에 취직하러 와서 하숙하던 집이다. 모차르트는 이 하숙집에서 요셉 2세 황제의 요청에 따라 독일어 오페라인 ‘후궁에서의 도주’(Entführung aus dem Serail)를 작곡했다. 그런 내용의 명판이 1번지 건물에 붙어 있다. 모차르트는 하숙집 딸인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하였다.

 

밀르흐가쎄

 

- 미노리텐플라츠(Minopritenplatz): 미노리텐키르헤(프란치스코회의 소형제단교회)의 앞이 미노리텐플라츠이다. 1786년부터 미노리텐교회를 기념하여 붙인 명칭이다. 1310년에는 바이 덴 민네렌브뤼데른(Bei den mineren Brüdern)이라고 불렀다. 탁발형제단이라는 뜻이다.

 

미노리텐플라츠. 왼쪽 건물은 슈타츠아르히브(정부문서보관소)

 

- 묄커 바슈타이(Mölker Bastei): 비엔나 성벽을 쌓을 때 이곳에 능보를 구축하고 멜크 사원을 기념하여 묄크 바슈타이(능보)라고 불렀다. 아직도 옛 능보의 모습을 볼수 있다. 베토벤이 한때 살았던 파스쿠발라티하우스는 묄커 바슈타이 위에 있다. 그 옆에는 슈베르트 식당이 있다.

 

묄커 바슈타이. 오른편 건물이 파스쿠발라티 하우스. 베토벤이 한때 기거했던 곳이다.

 

- 묄커 슈타이크(Mölker Steig): 1871년에 묄커 바슈타이로 올라가는 계단길을 묄커 슈타이크라고 불렀다. 그 전에는 클레퍼가쎄(Kleppergasse: 늙은 말길), 또는 카일가쎄(Keilgasse: 쐐기길)이라고 불렀다. 주로 늙은 말을 내다 파는 곳이었으며 또한 쐐기와 같은 연장을 파는 상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묄커 슈타이그(계단)

 

- 모르친플라츠(Morzinplatz): 1888년부터 자선가인 페터 프로코프 모르친(Peter Prokop Morzin)백작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프란츠 요셉스 카이의 잘츠토르브뤼케 부근에 있다. 나치와의 합병 전에 이 광장의 한쪽에 메트로폴(Metropol)이라는 호텔이 있었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후, 메트로폴은 나치 게슈타포의 비엔나 본부가 되었다. 수많은 지식인과 유태인들이 메트로폴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고 대부분은 강제수용소로 이감되었으며 더러는 죽임을 당했다. 전쟁이 끝나자 비엔나 시민들은 메트로폴에 몰려가 건물을 부셨다. 그 자리에는 주거지로서 보눙(Wohnung: 아파트)이 건설되었지만 광장은 그대로 남아 있고 광장의 길가쪽에는 나치의 만행을 잊지 말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모르친플라츠

 

- 무제움스플라츠(Museumsplatz): 미술사박물관 및 자연사박물관과 예정의 메쎄팔라스트(Messe Palast)가 있던 곳으로 현재는 박물관구역(무제움스크바르티에)라고 부르는 사이에 있는 큰 길이다. 1996년부터 예정에 비엔나만국박람회가 열리던 곳을 정리하여 박물관구역으로 삼았다. 그전에는 왕실마사(馬舍)였다.

 

미술사박물관 뒷편 무제움스플라츠

 

- 무제움슈트라쎄(Museumstrasse): 1882년에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을 건설하고 법원(Justiz-palast) 뒤편 길을 무제움슈트라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호프슈탈슈트라쎄(Hofstallstrasse: 왕궁마사길)라고 불렀다.

 

무제움슈트라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