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67 로베르트 슈톨츠(Robert Stolz)

정준극 2009. 8. 11. 19:31

참고자료 67

 

로베르트-슈톨프-플라츠와

작곡가 로베르트 슈톨츠(Robert Stolz)

 

오페레타 작곡가 로베르트 슈톨츠

 

로베르트 엘리자베트 슈톨츠(Robert Elisabeth Stolz: 1880-1975)는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작곡가 겸 지휘자로서 주로 비엔나의 정서를 표현하는 노래들을 작곡했으며 오페레타와 영화음악도 작곡했다. 그를 기념하여서 슈타트파르크(시립공원)에 기념비가 있으며 프라터 유원지의 넓은 풀밭에도 기념비가 있다. 슈톨츠의 대표적인 노래는 1912년에 작곡한 Servus Du 이며 오페레타로는 랄프 베나츠키와 공동으로 작곡한 Im weissen Rössl(백마장 여관)이 있다.

 

프라터에 있는 로베르트 슈톨츠 기념비. '프라터의 나무에는 다시 꽃이 피고'라는 노래의 첫 소절 악보가 그려져 있다.

 

슈톨츠는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음악가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지휘자였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당대의 소프라노 테레사 슈톨츠(Teresa Stolz)는 그의 할머니가 된다. 슈톨츠는 비엔나음악원에서 로베르트 푹스(Robert Fuchs)와 엥겔버트 훔퍼딩크(Engelbert Humperdinck)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1899년부터 1907년까지 그는 마리보르(Maribor: 당시는 Marburg), 잘츠부르크, 브르노에서 지휘자 생활을 하다가 점점 명성을 쌓게 되어 1907년 비엔나의 테아터 안 데어 빈(빈강변극장)의 지휘자로 발탁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1908년 오스카 슈트라우스의 유명 오페레타인 Der tapfere Soldat(초콜릿 병사)의 초연을 지휘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는 지휘도 지휘지만 작곡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1910년 테아터 안 데어 빈의 전속지휘자를 사임하고 프리랜서 작곡가 겸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슈톨츠는 이미 여러 편의 노래를 작곡하여 인기를 끌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정부가 발행한 오페레타 '왈츠(4분의 3박자)의 두 마음' 기념 우표. 대단하다.


1930년도 비엔나 영화인 '왈츠의 두 마음'. 발터 얀센과 그레틀 타이머 주연

 

1차대전이 일어나자 슈톨츠는 용감하게 오스트리아군대에 들어가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이 끝난후 그는 주로 캬바레 음악에 치중하였으며 캬바레 음악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베를린이 최고이므로 1925년에 간단한 짐을 싸서 들고 베를린으로 향하였다. 베를린에서 그는 캬바레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지만 당시 새로운 테크닉으로 등장한 유성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일 최초의 사운드 영화인 Zwei Herzen im Dreivierteltakt (츠봐이 헤르첸 임 드라이피어르텔탁트: 4분의 3박자의 두 마음)의 음악을 작곡했다. 이 영화의 주제곡 왈츠는 단번에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또한 그가 작곡한 오페레타 Die lustigen Weiber von Wien(비엔나의 유쾌한 아낙네들)의 주제곡인 Adieu, mein kleiner Gardeoffizier (안녕, 나의 귀여운 근위대 장교님)도 이 영화에 사용되어 널리 사랑을 받게 되었다. 얼마후 나치가 득세하자 슈톨츠는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는 비엔나에서도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영화 Ungeküsst soll man nicht schlafen gehn(잠자기 전에는 키스를)의 주제곡은 히트를 기록했다. 그런후에 히틀러의 안슐르쓰(합병)가 다가왔다. 히틀러의 나치는 백성들을 감상주의적 음악으로 물들게 하는 것을 퇴폐음악이라고 주장하며 억제하기 시작했다. 나치에게는 바그너의 독일 국수주의적인 음악이 최고였다. 그는 히틀러를 피하여 처음에는 취리히로, 다음에는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그는 나치의 스파이로 오인을 받아 처형을 당하게 될 운명이었지만 참으로 천우신조로 그를 아는 사람들이 나서서 옹호해주어 석방될수 있었다. 그는 1940년 천신만고 끝에 뉴욕에 도착할수 있었다.

 

그린칭의 라인프레헤트 호이리게 집에 붙어 있는 로베르트 슈톨츠 기념 명판. 이 주점에 와서 Ich bin in Grinzing einheimisch라는 노래를 작곡했다는 내용이다.  

 

슈톨츠는 미국에서 비엔나 음악을 연주하는 콘서트를 개최하여 인기를 끌었다. 첫 번째 연주회는 카네기 홀에서 있었던 A Night in Vienna(비엔나에서의 밤)이었다. 콘서트가 끝나자 슈톨츠는 뮤지컬, 영화, 쇼에 사용할 음악을 작곡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슈톨츠는 두 번에 걸쳐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었다. 그가 작곡한 Waltzing in the Clouds(구름속에서의 왈츠)는 1941년 베스트 오리지널 송의 후보에 올랐으며 1945년에는 It Happened Tomorrow(내일 일어났네)라는 스코어가 베스트 드라마틱/코미디영화 스코어의 후보에 올랐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 슈톨츠는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는 우선 그라츠의 부모님 묘소를 찾아뵙고 벌초를 하며 불효자를 용서해 달라며 눈물로서 기도하였다. 하지만 제발 그라츠에서 살라는 친척들의 간곡한 부탁을 뒤로하고 비엔나로 와서 여생을 지냈다(부모님 묘소를 찾아뵙고 벌초를 하고 불효자를 용서해 달라며 눈물로서 기도했다는 얘기는 순전히 필자가 지어낸 얘기임을 말씀 드립니다). 슈톨츠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비엔나에서 주로 음반 취입을 위한 지휘를 맡아하였다. 주로 요한 슈트라우스, 프란츠 레하르, 엠러리히 칼만, 레오 팔(Leo Fall)등의 오페레타 취입을 지휘하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오 팔과는 전부터 친분있게 지낸바 있다.

 

임 봐이쎈 뢰쓸(백마장 여관)은 너무나 유명해서 인형극으로도 사랑을 받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 프란츠 요셉 황제.

 

1970년, 비엔나시는 슈톨츠의 90세 생일을 맞이하여 그를 명예시민으로 선정하였다. 그는 또한 비엔나의 명예대훈장을 받았다. 명예대훈장을 받은 음악인으로서는 슈톨츠가 두 번째로 첫 번째는 리하라트 슈트라우스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발행하는 우표에 여러번 등재되었었다. 말년에 그는 지휘할 때에 프란츠 레하르가 사용하던 지휘봉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원래 요한 슈트라우스가 사용하던 것으로 아름답게 은장식을 한 무거운 것이다. 그는 1975년 베를린을 방문하였다가 그곳에서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5세였다. 슈톨츠의 시신은 비엔나로 운구되었으며 슈타츠오퍼의 회랑에 시신과 함께 빈소가 차려졌다. 슈톨츠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구역에 안장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와 브람스의 묘지 뒤편이다. 그는 도합 5편의 오페레타를 남겼지만 노래는 수없이 많이 남겼다. 프라터의 기념비에는 그의 히트곡인 Im Prater blühn wieder die Bäume(프라터의 나무에는 다시 꽃이 피고)의 첫 소절이 새겨져 있다.

 

슈타트파르크(시립공원)에 있는 로베르트 슈톨츠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