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69
슈멜링플라츠와
정치가 안톤 폰 슈멜링(Anton von Schmerling)
안톤 리터 폰 슈멜링(Anton Ritter von Schmerling: 1805-1893)은 비엔나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진보적 정치가로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을 하나의 헌법, 하나의 의회로 묶어 하나의 공화국으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는 평생을 공직자로서 제국을 개혁코자 노력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제국의 법원에 근무한 공직자였다. 비엔나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슈멜링은 1829년 공무원으로 들어가 18년동안 남부오스트리아에서 공직생활을 하였다. 1847년, 그는 남부오스트리아 평민당에 들어가 진보적인 행정개혁의 중심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1848년, 3월 혁명이 일어나서 백성들이 의사당을 난입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평민들의 대표로서 궁전에 들어가 백성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결과, 그는 국민방위군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는 이어 제국의 사절로서 프랑크푸르트에 가서 독일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프러시아가 강력하게 등장하는 바람에 비엔나로 돌아왔다.
비엔나에 돌아온 그는 법무장관을 지내며 여러 면에서 개혁을 주도하였다. 그의 진보적인 정책은 제국 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나 그는 박수 칠 때에 무대를 떠날 줄을 알아 1851년 법무장관직을 사임하였다. 겉으로의 이유는 개헌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그후 그는 최고재판소의 판사로 임명되었으며 전체주의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자 1862년 다시 법무장관을 맡았다. 그가 우선 시도한 것은 제국 전체를 하나로 묶는 헌법을 완성하여 반포하는 것이었고 정부가 의회중심으로 운영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시도는 크로아티아와 헝가리(마쟈르)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다.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상원(Herrenhaus)의 멤버가 되었고 1871년에는 상원의장이 되었다. 1891년 그는 모든 직책에서 사임하였으며 2년후인 1893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슈멜링은 육군장성인 쿠델카(Koudelka) 남작의 딸 파울리네(Pauline)와 1835년 결혼하였다. 결혼한지 5년후인 1840년에 세상을 떠난 파울리네는 생전에 문학과 예술적 재능이 출중하여 비엔나 지식사회의 중심인물이었다.
유스티즈팔라스트(Justizpalast). 법무성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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