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71 칼 필립 추 슈바르첸버그(Karl Philipp zu Schwarzenberg)

정준극 2009. 8. 12. 12:04

참고자료 71

 

슈봐르첸버그플라츠와

칼 필립 추 슈바르첸버그(Karl Philipp zu Schwarzenberg) 장군

 

칼 필립 추 슈봐르첸버그 장군

 

캐른트너링과 슈베르트링의 사이에 러시아 적군(赤軍) 기념상이 높이 서 있다. 적군기념상의 앞에는 마치 적군상을 가릴듯 높이 치솟는 분수가 있고 그 앞으로 한 참 떨어진 곳에 어떤 인물의 기마상이 위엄있게 서 있다. 기마상의 주인공이 바로 칼 필립 추 슈봐르첸버그 장군이다. 칼 필립의 직함은 휘르스트(Fürst)이므로 후작이라고 해야 하지만 편의상 공자(Prince: 公子)라고 부른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타이틀도 Fürst Bismarck이다. 비스마르크 후작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후작은 주로 왕족의 경우에 갖는 타이틀이다. 그래서 Fürst를 왕후(王侯)하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건 그렇고, 기마상의 주인공인 칼 필립 추 슈봐르츠버그(1771-1820)는 오스트리아의 장군이다. Feldmarschall(펠트마르샬)이므로 육군 원수(元帥)가 된다. 왕자에 버금하는 왕족에게는 거의 관례적으로 펠트마르샬이라는 직책을 준다. 칼 필립을 슈봐르첸버그 공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슈봐르첸버그 후작이었기 때문이다.

 

 칼 필립 추 슈봐르첸버그 장군 기마상. 그 뒤로 분수와 러시아 적군기념상이 보인다.

 

칼 필립은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슈봐르첸버그의 요한 네포무크 안톤이며 어머니는 외팅겐-발렌슈타인(Öttingen-Wallenstein)의 엘레오노레 백작부인이었다. 칼 필립은 17세 때에 제국기병대에 입대하여 이듬해인 1789년에는 터키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여 뛰어난 용맹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21살 때인 1792년에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물론 왕족이기 때문에 진급이 빠르긴 했다. 1793년 프랑스와의 전투에서는 코부르크(Coburg) 장군 휘하에서 선봉부대를 맡아 맹활약을 했다. 당시 전투는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대적한 것이었다. 칼 필립은 12명의 영국군 특공대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 기병대를 이끌고 적진에 과감하게 돌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프랑스군 3천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 때문에 칼 필립은 마리아 테레자 십자훈장을 받았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에서 바라본 링슈트라쎄 방향

 

1796년, 그는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1799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1800년 호엔린덴(Hohenlinden)전투에서는 샤를르 대공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이 패배하였으나 전멸의 위기에서 칼 필립이 프랑스군의 우익을 공격하여 물리치는 바람에 겨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만큼 칼 필립은 용감한 지휘관이었다. 1804년 칼 필립은 슈봐르첸버그 후작이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의 형인 요셉도 슈봐르첸버그 후작의 타이틀을 가졌지만 칼 필립의 전공이 위대하여 같은 타이틀을 보유토록 했던 것이다. 1805년 10월 울름(Ulm)이 나폴레옹에게 포위되어 운명이 풍전등화였을때 칼 필립은 기병대를 이끌고 용감하게 나폴레옹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적의 진영을 교란함으로서 울름을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해에 칼 필립은 황금양털(Golden Fleece)의 명예를 받았다.

 

1808년 나폴레옹에 의한 새로운 전운이 감돌자 마리아 테레자는 칼 필립을 제정러시아에 보내는 특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칼 필립은 생페터스부르크 궁정에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 칼 필립으로 인하여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칼 필립이 러시아에서 돌아왔을 때 오스트리아는 바그람(Wagram)에서 나폴레옹군과 일대 격전을 앞두고 있었다. 칼 필립은 기병대 장군으로 승진하여 당장 전선에 투입되었다. 전투는 불행하게도 오스트리아의 패배였다. 바그람 전투의 결과,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비엔나 조약을 맺었다. 곧이어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스 공주와의 결혼이 진척되었다. 칼 필립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여 파리에 파견되어 혼담을 진행하는 책임을 맡았다. 비엔나에 돌아온 칼 필립은 신부인 마리 루이제를 위한 무도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무도회장에서 뜻하지 아니한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칼 필립이 가장 총애하는 누이동생도 목숨을 잃었다.  

 

나폴레옹은 칼 필립을 대단히 존경했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할 때에 예비군으로 편성한 오스트리아군의 총지휘를 칼 필립에게 의뢰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군은 비록 바그람 전투에서 패배하여 나폴레옹의 기치아래 들어가게 되었지만 프랑스와 오랜 원한관계에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이 나폴레옹의 부대에 편입되어 러시아 공격에 가담하게 되자 사실상 칼 필립의 마음은 편치 않았으며 장병들의 사기도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일단 프랑스군과 동맹을 맺은 상태이므로 프랑스를 위해 전투에 참여해야 했다. 칼 필립은 탁월한 전략으로 별로 심각하지 않은 전투를 벌이면서도 러시아군을 퇴각시키는 전공을 얻었다. 이를 눈치 챘는지 어쨋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나폴레옹은 칼 필립을 후방으로 물러나게 하고 전투에는 직접 참여시키지 않았다. 유럽의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것이어서 그러할 때에 오스트리아는 상당한 주저 끝에 보헤미아와 연합하여 나폴레옹에게 반기를 들게 되었다. 칼 필립이 보헤미아 동맹군까지 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동맹군을 지휘하려면 가장 높은 계급이 되어야 하므로 칼 필립은 육군 원수로 승진되었다. 이어 1813-14년의 나폴레옹과의 전투에서 칼 필립의 동맹군은 프랑스군과의 파리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이로써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적군분수 쪽에서 바라본 슈봐르첸버그플라츠

 

칼 필립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지나치게 결단력이 부족하고 신중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 필립이 이끄는 군대는 오스트리아의 중점부대로서 만일 이 부대가 패배한다면 오스트리아로서는 더 이상의 군사력이 없을 정도가 되므로 신중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견도 지배적이었다. 칼 필립은 나폴레옹군을 몰아낸후 여러 훈장과 포상을 받았으며 제국의 궁정군사위원회(Hofkriegsrat) 위원장을 맡아 마리아 테레자를 자문하였다. 칼 필립은 슈봐르첸버그 후작으로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문장을 사용할수 있는 특권도 얻었다. 대단한 영예였다. 그러나 칼 필립은 여동생 카롤리나가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1820년 라이프치히를 방문했을 때 심장마비가 와서 세상을 떠났다.

 

 

칼 필립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프레데릭(1800-1870)은 군인으로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프레데릭은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심지어는 프랑스가 북아프리카의 알레지라를 정복하였을 때에도 아마추어로서 참전하였다. 그는 스페인의 칼리스트(Carlist)전투와 스위스의 내전에도 참전하였다. 그는 오스트리아제국군의 중장까지 진급했다. 둘째 아들 칼 보로모이스 필립(1802-1858)은 오스트리아제국군의 병참사령관을 지냈다. 셋째 아들인 에드문트 레오폴드 프레데릭(1803-1873) 역시 오스트리아제국군의 육군원스를 지냈다. 조카인 펠릭스는 정치가가 되었고 또 다른 조카인 프리드리히 요한 요셉 쾰레스틴은 대주교가 되어 오스트리아의 가톨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칼 필립의 후손들은 보헤미아의 올리크(Orlik)성에서 살았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가 탄생하자 이들은 체코어를 사용하는 체코 국민으로서 지냈다. 현재의 슈봐르첸버그 가문의 장손은 칼(1937-)로서 1948-1989년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되었을 때 스위스에서 살았다. 칼은 1980년대에 국제인권 헬싱키연맹의 회장을 지냈다. 칼은 체코에서 벨베트 혁명이 일어난 후 체코로 돌아왔으면 2004년 체코공화국의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2007년 이래 체코공화국의 외무장관을 지내고 있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 일대 공중사진. 하단 중앙 부분이 슈봐르첸버그 장군 기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