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 더 알기/세례 요한은 누구?

세례요한의 등장

정준극 2009. 8. 23. 19:13

[세례요한의 등장]

 

세례요한이 태어났다고 하는 곳에 세운 세례요한교회. 갈릴리 지방의 아인 케렘에 있다.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예수 그리스도보다 3년 정도 일찍 세상을 떠난 이스라엘의 선지자이다. 세례요한이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누가복음을 보면 마리아가 친족인 엘리사벳을 방문하기 위해 산골에 있는 유대의 한 동네로 갔다는 기록이 있어서(누가 1: 39) 어딘지 모르지만 유대의 한 산골 동네에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고 추측할 뿐이다. 물론 그 집도 누구의 집인지 확실치 않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로서 제사장 직분을 맡고 있던 사가랴의 집인지, 또는 세례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의 친정과 관련된 집으로서 엘리사벳이 임신하자 임시로 거처하던 집인지 분명치 않다. 다만, 마리아가 천사장 중의 하나인 가브리엘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은 후에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혼자서 찾아 갔었다고 하니 엘리사벳의 친척인 마리아도 미리부터 알고 있던 집임에는 틀림없다. 성경에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에 엘리사벳은 이미 세례요한을 복중에 가지고 있었으며 복중의 태아가 어떻게 알았는지 하여튼 마리아의 메시아 수태를 기뻐하여 뛰어놀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보다 6개월 정도 먼저 태어났다고 말할수 있는 것은 천사장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할 때에 ‘네 친족 엘리사벳도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달이 되었나니’(누가 1: 36)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가브리엘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은 직후 엘리사벳을 방문하였다. 그러므로 그때에 엘리사벳은 이미 임신 6개월이었다고 볼수 있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두 사람은 이종사촌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릎 꿇고 있는 양반은 뉘신지? 교황같디고 하고...

 

세례요한의 원래 이름은 요카난 벤 스가랴(Yochanan ben Zecharyah)이다. ‘스가랴의 아들 요카난'이다. 영어로는 John the Baptist 라고 부르며 프랑스에서는 Jean de Baptiste, 이탈리아에서는 Giovanni da Battista라고 부른다. 세례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는 제사장이었다(누가 1: 5). 세례요한은 유대에 있는 어떤 산골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예루살렘 인근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대로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에 의해 머리가 잘려 죽었다. 갈릴리와 페레아(Perea: 요단강 서안지방)의 통치자인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당시에 유대의 왕이었던 헤롯대왕의 아들이다. 헤롯대왕은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에 동방박사들이 ‘유태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자 큰일이라고 생각하여 베들레헴과 인근 마을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육하라고 명령하였다. 헤롯대왕은 수많은 어린아이들을 죽인 장본인이다. 유대의 어떤 산골마을에 살고 있던 사가랴도 마침 어린 아들이 있었다. 잘 아는 대로 세례요한이었다. 생후 6개월 정도 되었다고 할수 있다. 헤롯대왕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사가랴가 살고 있는 마을에 몰려와 어린 아기들을 수색하여 죽이기 시작했다. 사가랴는 하나님이 주신 아들 세례요한을 죽음에서 보호하기 위해 완강하게 저항하다가 대신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사가랴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러한 과거가 있기 때문에 세례요한은 헤롯대왕은 물론, 그의 뒤를 이어 통치자가 된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에 대하여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세례요한을 죽인 왕의 이름은 헤롯 안티파스이지만 편의상 안티파스라고만 부른다.

 

세례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와 그와 결혼한 헤로디아스에게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하고 있다. 프랑스 리유박물관 소장

 

헤롯대왕이 죽자 그가 통치하던 영토는 넷으로 갈라져서 헤롯대왕의 세 아들이 나누어 통치하게 되었다. 헤롯 아켈루스, 헤롯 안티파스, 그리고 필립이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아버지인 헤롯대왕이 영토를 큰아들인 아켈루스에게만 많이 나누어 주고 자기에게는 갈릴리와 페레아만 통치하도록 했으며 더구나 별 볼일 없는 이복동생 필립에게까지 영토를 나누어준데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사실 전체 유대 땅은 별로 넓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좁은 땅을 세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통치하라고 했던 것이다. 얼마후 헤롯 안티파스는 형인 헤롯 아켈루스가 갑자기 죽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형의 땅까지 다스리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안티파스가 형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형을 죽였다고 한다. 그건 그럴수도 있다고 하겠지만 문제는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또 다른 이복형제로서 헤롯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었는데 헤롯 안티파스가 이복형제인 헤롯의 부인, 즉 헤로디아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안티파스가 로마에 갔을 때 그곳에서 만나 눈이 맞았다고 한다. 헤롯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원래 부인과 이혼키로 하였고 헤로디아도 헤롯 안티파스와 결혼하기 위해 헤롯(헤롯대왕의 아들로서 이름이 헤롯이었음. 헤롯 안티파스와는 이복 형제 사이임)과 이혼하였다. 헤로디아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헤로디아의 딸의 이름이 살로메라는 것은 사실 성경의 어떤 파트에도 나오지 않는다. 1940년대 말에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쓴 ‘살로메’라는 극본에서 처음으로 나온 이름이다. 그러므로 살로메라는 이름은 근세에 만들어진 순전히 가공의 이름이다. 그런데 살로메가 헤로디아와 죽은 남편(헤롯)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지는 확실치 않다. 세례요한이 죽임을 당했을 때 살로메가 몇 살이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모든 사람들을 현혹할 정도로 춤을 잘 추었다고 하므로 나이가 적어도 16세 이상은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에서는 살로메가 일곱 베일의 춤을 추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걸치고 있던 옷과 베일을 하나하나 벗으면서 스트립 쇼를 했던 것이다.

 

살로메가 쟁반에 담은 세례요한의 머리를 들고 있다. 티티안 작품. 

 

세례요한은 30년 전쯤에 헤롯 대왕이 아기 예수가 유태인의 새로운 왕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베들레헴 인근의 두살 미만 어린아이들을 모두 학살한 사실을 잊지 않고 있던 차에 헤롯 대왕의 아들인 안티파스가 비록 이복동생이긴 하지만 아무튼 자기 동생의 부인과 재혼한 것을 보고 이는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한 율법을 어긴 악행이라면서 기회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소리쳐서 알렸다. 그런 소식을 들은 안티파스는 속이 상했지만 만일 세례요한을 체포하여 처벌할 것같으면 민심이 동요하여 곤란하게 되므로 참고만 있었다. 하지만 안티파스의 부인이 된 헤로디아는 성깔이 고약해서 세례요한이 소리치는 것을 참지 못했다. 헤로디아는 안티파스에게 저렇게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그냥 놓아두면 왕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므로 어서 잡아넣어 더 이상 떠들지 못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안티파스는 결국 헤로디아의 간청에 못 이겨서 세례요한을 체포하여 지하의 옥에 가두었다. 어느 지하의 감옥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며칠후 안티파스가 잔치를 벌이게 되었다. 헤로디아의 딸(살로메)이 잔치중에 기막힌 춤을 추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에는 일곱 베일의 춤이라고 되어 있다.  일곱 베일의 춤이라는 것은 자기의 몸에 걸치고 있던 베일을 하나하나 마지막 일곱번째 까지 벗어 던지는 요상한 춤이었다. 살로메의 춤을 보고 있던 안티파스는 너무나 감격하여(실은 섹시한 살로메에 대하여 음탕한 생각을 참지 못하여) 살로메에게 소원이 있으면 무엇이던지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살로메는 어머니인 헤로디아에게 어떤 소원을 말하면 좋을지 의논하였다. 헤로디아는 ‘기회는 이때다’라고 생각하여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지시했다. 안티파스는 명색이 왕으로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뱉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체면문제이므로 어쩔수 없이 부하에게 세례요한의 목을 쳐서 쟁반에 담아 오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세례요한은 30세라는 짧은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세례요한을 매장했다고 생각되는 예루살렘에는 현재 성세례요한교회에 있다. 그로부터 3년후, 안티파스는 유태인 제사장들의 성화에 못이겨 이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토록 했다.

 

살로메. 쟁반에 칼을 들고 있는 모습. Heinri Regnault 작품

 

세례 요한은 여러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선지자, 선임자(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자, 순교자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세례 요한(또는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는 개신교에서는 크게 비중을 두고 있지 않지만 로마가톨릭, 동방정교회, 동방가톨릭교회, 아시아정교회, 영국성공회, 이슬람, 만데아니슴(Mandeanism)에서는 성인으로 존경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에서는 세례 요한이 태어난 날인 6월 24일(예수 그리스도보다 정확히 6개월 전), 그가 참수형을 당한 8월 29일을 축일로 지키고 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1월 7일에도 세례 요한을 위한 성체배령미사를 드린다. 세례요한의 상징은 십자가, 어린 양, 약대(낙타) 가죽 옷 등이다. 세례요한은 캐나다의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방, 뉴펀들랜드(New Foundland), 푸에르토리코의 수호성인이다. 또한 예루살렘의 의료봉사단체, 플로렌스, 제노아, 요르단 등의 수호성인이기도하다. 이제 세례요한에 대하여 보다 자세하게 고찰해보자.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한 필요한 과정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의 뉴욕 메트로폴리탄 초연 장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세례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가져오자 이를 보고 희열을 느끼는 살로메. 너무나 끔찍하여서 초연 이후 공연이 금지되었다. 살로메의 지나치게 육감적인 모습도 문제가 되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