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 이야기/막달라 마리아는 누구?

막달라 마리아는 귀족가문 출신

정준극 2009. 9. 22. 11:34

막달라 마리아는 귀족가문 출신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얼빠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니까 ‘아, 뭘 막 달라는 사람인가요?’라고 물어보아 대답하기도 싫었던 일이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최근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과 영화, 그리고 멜 깁슨의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으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활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여인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열두제자와 함께 예수의 복음전파 여행을 따라 다니던 몇 안되는 여인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골고다 언덕에 가서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함께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시체를 세마포로 싸서 장사를 지내는데 함께 하였고 그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한 예수를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부활한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참으로 중요한 임무를 부여하였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부활에 대하여 다른 모든 사도들에게 알리라는 임무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만큼 기독교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 중의 사도’라고 부른다.

 

암몬 산에서 바라본 갈릴리 호수(키네렛 호수)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호수 건너편의 막달라(Magdala)라는 어촌 출신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다른 마리아들과 구별하기 위해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갈릴리 호수는 로마황제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아스 호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키네렛(Kinneret)호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막달라 또는 미그달(Migdal)은 히브리어로 망루라는 뜻이다. 어떤 학자들은 막달라 또는 미그달이라는 단어가 비둘기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영어로 Mary of Magdala 또는 Mary Magdalene(막달라의 여인 메리)라고 쓴다. ‘막달라의 여인 마리아’라는 뜻이다. 마리아, 또는 메리라는 것은 독일어나 영어식 표현이며 원래의 히브리어로는 미리암(Miriam)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아버지 사이루스(Syrus)는 귀족으로서 대단히 부유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유카리스(Eucharis)로서 역시 좋은 가문 출신이었다. 사이루스는 다윗왕가의 직계후손이라는 설도 있었다. 사이루스는 막달라 마을에 훌륭한 성을 가지고 있었다. 마그달로(Magdalo)라는 이름의 성이었다. 사이루스는 이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갈릴리 호수에 있는 막달라 마을이라고 생각되는 곳

 

막달라 마리아를 베다니의 마리아로 간주하여 잘 아는 대로 오빠는 라사로(Lazarus)이며 언니는 마르다(Martha)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마리아와 마르다’라는 찬송에 나오는 바로 그 마르다이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베다니의 마리아과 같은 사람인지에 대하여는 아직 연구중이다. 현재로서는 서로 다른 여자로 간주하지만 예수에게 향유를 바른 사건은 한 건으로 보고 있다. 마리아의 아버지 사이루스는 세상을 떠날 때에 재산을 세 남매에게 골고루 분배하였다. 라사로는 군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득병하여 집에서 요양하던 중 병마와의 싸움에 져서 결국 숨을 거두었다. 혹자는 라사로가 나병에 걸렸다는 주장도 한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죽은 라사로를 무덤에 장사지냈다. 예수는 사랑하는 사람인 라사로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애통해 하다가 그를 살리기로 결심하고 무덤 문을 열게 하고 육체가 이미 부패되고 있는 그에게 ‘라사로야 일어나라’라는 한마디로 살렸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놀라운 사건이다. 언니 마르다는 근검하며 세상 열락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 사이루스가 나누어준 준 재산을 잘 운영하였다. 사람들은 마르다에 대하여 덕스럽고 예의바르며 교양 있는 여인이라고 칭송하였다. 한편, 마리아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겨하였다. 마리아는 세상 열락에 탐닉하여 율법에 어긋난 행동을 자주 하였다. 사람들이 마리아에 대하여 ‘죄 있는 여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여기서 막달라 마리아와 관련하여 한가지 혼돈을 주는 사항이 있다. 베다니의 마리아 때문이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예수께서 베다니의 문둥병자인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실 때 찾아와서 예수의 발을 향유로 닦은 여인이다. 베다니의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얘기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하자. 걸 기대!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프란체스코 하예스(Francesco Hayez 작품)

 

마리아는 이른바 일곱 가지 죄악에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탐욕과 욕정과 나태와 허영과 자만과 낙담과 분노였다. 마리아는 좋은 음식만을 탐하였고 재물을 사랑하였으며 분노를 참지 못했고 정신적으로 나태하였으며 이기적인 헛된 생활을 하였다. 성경에서는 이같은 일곱 가지 죄악을 일곱 악마에 씌었다고 표현했다.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의 온당치 못한 생활에 대하여 무던히도 꾸짖기도 하고 더러는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마르다는 마지막 수단으로 마리아를 예수에게 데려가 훈계를 듣도록 했다. 이윽고 예수의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마음이 크게 감동하여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씌었던 일곱 마귀들을 쫒아내 주었다.

 

무덤에서 썩고 있는 나사로를 살리심. Bonnat 작품.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의 옆에 무릎 꿇고 경외하고 있다.

 

어느날 예수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였다. 평소에 예수를 극진히 존경한 마르다는 예수를 지극히 대접하기 위해 땀이 흐르도록 준비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는 데만 열중하였다. 학자들은 마리아가 이때에 예수로부터 말씀을 듣고서 죄악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고 있다. 그건 그렇고, 언니 마르다는 음식만드는 일은 도와주지 않고 예수의 발아래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에게 그러면 되겠느냐고 한 마디 하자 예수는 오히려 마리아를 두둔하면서 ‘나의 얘기를 듣는 사람이 더 복이 있다’고 말하고 덧붙여서 마르다에게 ‘음식을 너무 여러 가지 장만할 필요는 없다. 몇 가지만 하던지 한 가지만 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예수를 대접하기 위해 땀을 흘리며 애쓰는 마르다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부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혹자는 예수가 마리아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같이 있고 싶어서 억지 주장을 했다고 보기도 했다. 얼마후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이 생겼다. 예수가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 저녁을 자시게 되었다. 예수를 따라온 마리아는 눈물로서 예수의 발을 씻고 머리칼로 닦았으며 발에 키스를 하였다. 그리고 마노로 만든 향합(香盒)을 깨트려 값비싼 유향을 예수의 발에 발랐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그대의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고 베다니의 마리아라는 여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우둔해서 성경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오신 예수. 루벤스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