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 이야기/이런저런 에피소드

바다로 추방된 막달라 마리아

정준극 2009. 9. 22. 18:33

프로방스에 도착한 막달라 마리아

 

  

예루살렘에서 바다로 추방당하는 막달라 마리아. 화가 Pera Matas는 왕관을 쓴 막달라 마리아가 훌륭한 배로 떠나는 것처럼 그렸으나 전설에 의하면 돛도 없는 배에 실려 무조건 먼바다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로 막달라 마리아 일행은 육지에 무사히 도착하였는데 그곳이 마르세이유였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는 유태인들에 의해 추방되어 오늘날의 프로방스 지방에 도착한후 마르세이유 인근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다른 주장도 있다. 6세기의 신학자인 그레고리는 막달라 마리아가 에베소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주장하고 골(Gaul: 갈리아) 지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강조했다. 프로방스 지방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전설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인 1959년 작가 빅토르 삭서(Victor Saxer)가 그의 저서 La culte de Marie Magdalene en occident(동방에서 온 마리 막달레느의 전설)이라는 수필집에서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프랑스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숭배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다. 버건디(Burgundy)지방의 베즐레(Vezelay)에 있는 수도원에서 비롯한 사항이다. 771년 당시 버건디 공작인 제라르(Gerard)가 액-상-프로방스(Aix-en-Provence)의 성막시맹 수도원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석관에서 그의 유해를 거두어서 베즐레 수도원으로 가져옴으로서 베즐레에서의 막달라 마리아 숭배가 비롯하였다는 것이다. 왜 옮겼는가 하면 당시에는 사라센이 프로방스 지방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의 유해를 옮겼다는 것이다. 이같은 내용은 12세기의 역사학자 겜블루 지거버트(Gembloux Sigerbert)가 그의 저서에서 주장한 것이다. 베즐레 수도원에는 오늘날까지도 막달라 마리아의 유해라고 생각되는 것이 보존되어 있다.

 

프랑스 남부 해안지대에 있는 바다의 세 마리아의 교회(Les Saintes Maries de la Mer). 마치 요새와 같다.

               

프로방스의 생-막시맹-라-상트 보메(Saint-Maximin-la-Sainte-Baume)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유해를 크게 숭배하고 있다. 이곳에 막달라 마리아의 작은 영묘가 있었다. 너무나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1279년 나폴리왕 샤를르 2세가 훌륭한 고딕 교회를 세우고 이곳에 막달라 마리아를 위한 새로운 영묘를 설치하였다. 그러므로 프랑스에서는 버건디의 베즐레와 프로방스의 생 막시맹이 서로 막달라 마리아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베즐레는 베네딕트파 수도원이며 생 막시맹은 도미니크파 수도원이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전설이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작가 야코부스 드 보레인(Jacobus de Voragine)의 기여가 크다. 그는 Legenda Aurea(황금 전설)라는 저서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참회하는 인간의 상징으로 삼고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그의 발에 향유를 바른 여인이라고 주장하였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전설을 정리한 이 책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생 보메(성동굴)에서 금식하며 고행에 정진하고 있을 때에 천사들이 매일 하늘로부터 내려와 막달라 마리아를 옹위하여 하늘로 올라가서 식사를 하도록 하고 다시 내려왔다는 전설이 설명되어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죽음이 가까워 왔을 때 천사들이 그를 동굴에서부터 생 막시맹 수도원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이곳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생 막시맹이 건설한 작은 예배당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프랑스에서 성지 예루살렘을 찾아가는 순례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무오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 T.C. Chiu 작품.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프로방스의 전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프로방스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관련된 곳을 세 곳이라고 내세웠다. 첫째는 생 막시맹 수도원으로서 이 수도원에 가면 납골당(영묘)에 아직도 막달라 마리아, 성막시맹, 성시도니우스(St Sidonius)의 석관들이 남아 있다. 두 번째는 성보메(St Baume)계곡이다. 이곳의 절벽에 있는 동굴(보메)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고행을 하면 지냈으나 항상 영적으로 만족한 생활을 하였으며 특히 천사들과 교통하였다는 것이다. 세 번째 장소는 해변에 있는 ‘바다의 세 마리아’교회이다. 원래는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교회였으나 나중에 Les Saintes Maries de la Mer(바다의 성마리아 교회)라는 이름으로 바꾸었고 최근에 ‘바다의 세 마리아’교회로 다시 이름이 바꾼 곳이다. 1200년경부터 흘러 내려온 전설에 따르면 이 해변은 유태인들의 박해를 받은 막달라 마리아가 성모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마리아 살로메의 세 마리아와 함께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이라는 것이다. 이때 함께 온 사람들로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언니인 마르다, 하녀인 사라, 막달라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 라사로, 72성인 중의 하나인 성막시맹, 그리고 소경이었으나 예수가 눈을 뜨게 해준 시도니우스였다고 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막시맹, 시도니우스, 라사로, 마르다, 사라(Sarah) 등은 그로부터 4-5백년 지난후인 4-5세기경 프랑스 성자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성막시맹과 성시도니우스는 오베르뉴(Auvergne) 출신의 성자로서 그중 성시도니우스는 5세기에 오베르뉴의 주교였다. 라사로 역시 5세기의 액스(Aix)의 주교였으며 마르다와 사라는 4세기 파사(페르시아: 이란)에서 순교한 성자들로서 이들의 유골은 남부 골(Gaul)로 옮겨왔다고 한다. 어떤 전설에 따르면 사라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라의 혈통이 프랑스의 메로빙 왕조를 거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까지 이어졌다느니 하는 얘기는 너무나 방대하기도 하거니와 신빙성을 주장할수 없어서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프랑스 베즐레이의 막달라 마리아 성당. 이곳에 막달라 마리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이 중세 이후 중부 유럽에서 약 7백년 동안이나 권세를 떨치던 합스부르크 왕조에 이어졌다는 얘기는 할 일이 별로 많지 않은 학자들의 몫이고 여기서는 다만 한가지 에피소드만 소개코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관련된 중요한 유품으로는 성십자가, 성의(로마 병사들이 벗겨서 제비 뽑아 가진 옷), 성창(로마 병사중 하나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 성수의(예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 베로니카의 수건(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할 때 피와 땀이 흐르는 그의 얼굴을 씻은 수건) 등이다. 속설에 의하면 만일 어떤 군주가 이 중에서 하나만 간직하고 있어도 세계를 제패하는 열국이 군주가 된다는 것이다. 간단히 결론만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던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모후)인 헬레나가 성지를 순례할 때 발견하여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으니 그곳이 현재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또는 갈보리교회)라는 것이며 성의는 독일 북부 트리어(Trier)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고 성수의(Shroud)는 이탈리아의 토리노 성당에서 보존하고 있다고 하는데 과학검사 결과(방사성연대측정) 예수님 당시의 물건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 아직도 진위가 오리무중이며 베로니카의 수건(Veil)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다만, 성창(Holy Lance) 만은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간직하고 있는데 얼마전 까지만 해도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왕실 보물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 중요한 물건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가 수백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맡아하며 흥성할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왕실 보물 전시장에 전시되었던 성창(Heilige Lanze).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가 흐르게 한 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