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 이야기/이런저런 에피소드

막달라 마리아 진실게임

정준극 2019. 2. 3. 22:52

막달라 마리아 진실게임

사실인가 픽션인가?


막달라 마리아


신약성서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인이 여러 명 등장한다(실은 미리암). 그 중에서 물론 가장 잘 알려진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이다. 그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이다. 교회는 성모 마리아에 비할수는 없지만 막달라 마리아도 존귀한 여인으로 숭상하고 있다. 왜냐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며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하였고 더구나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부활이라는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서 전파하라는 부탁을 받은 첫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되신 성모 마리아는 원죄가 없이 태어나셨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죄인이었고 심지어 창녀라고까지 알려져 왔기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과연 창녀였을까? 그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안이다. 성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기록은 아무데도 없다. 다만, 예수께서 일곱 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의 몸에서 귀신들을 쫓아내 보내셨다는 기록은 있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요즘으로는 정신이상의 증세를 말하는 것이지 그렇다고 죄인이며 더구나 창녀였다는 근거는 아니다. 한편, 막달라 마리아를 베다니의 마리아, 즉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이라는 주장도 있어서 혼란을 더해주고 있다. 그런가하면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의 앞에서 참회하여서 그의 발이 자기의 눈물로 젖게 되자 자기의 머리털로 씻은 죄많은 여인여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수세기에 걸친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는 죄많은 창녀가 아니라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인가? 역사학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누구라고 말하고 있는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사실과 픽션은 어떠한 것인가? 하나하나 풀어보자.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만지려고 하는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는 마리아의 라스트 네임, 즉 성(姓)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이 아니다. 막달라라는 도읍의 출신이므로 막달라 마리아라고 불렀던 것이다. 막달라 마을은 갈릴리바다의 서안에 있는 티베리우스의 근처에 있는 마을이다. 그러므로 막달라 마리아에서 막달라라는 것은 성이 아니라 그의 출신인 도읍을 말하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이름은 성경에 12번이나 등장한다. 그중에서 11번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직접 관련되어서이다. 그만큼 중요한 위치의 인물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를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오른 편에 앉아 있는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오른 편은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이야기, 더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주장 역시 픽션, 즉 꾸며낸 것이다. 이 얘기는 막달라 마리아를 둘러싼 논란 중에서 가장 핵심되는 사항이다. 많은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으며 자기의 죄를 참회하고 그후로부터는 예수님을 따르는 신실한 여인이 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막달라 마리아라가 창녀였다는 기록은 신약성경의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으므로 창녀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라는 얘기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이름은 신약성경의 4복음서에 모두 나오지만 누가복음 8장 2-3절에 막달라 마리아를 소개하는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다. 기록되었은즉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라고 되어 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하여는 그 이상의 설명이 없으므로 그가 과연 창녀였는지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다. 8장 2-3절의 말씀을 영어로 표현된 것을 보고 정확한 해석을 하는 것도 참고가 될 것이다. 2 And certain women, which had been healed of evil spirits and infirmities, Mary called Madgalene, out of whom went seven devils, 3 And Johanna the wife of Chuza Herod's steward, and Susanna, and many others, which ministered unto him of their substance.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묘사한 그림


실상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라는 얘기는 사도들의 증언에 따른 것이 아니라 중세에 비롯한 떠도는 얘기를 근거로 삼은 것이다. 아무튼 다시 말하지만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얘기도 성경에 없다.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가 아니겠느냐는 얘기는 공식적으로 591년 그레고리 교황이 부활절 강론에서 언급함으로서 일반 사람들도 믿게 되었다. 그레고리 교황은 강론에서 누가복음 7: 37절의 참회하는 죄인과 누가복음 8: 1절의 베다니의 마리아를 같은 사람, 즉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물리쳐 주신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였다. 그로부터 많은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누가복음 7장에 기록된 참회하는 죄인이라고 믿었다. 그런가하면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음행한 여인과 같은 인물로 보았다. 하지만 음행한 여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기록에 나오지 않으므로 그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근거는 없다. 아무튼 그레고리 교황의 강론이 있은 후부터 각지의 사제들이 강론할 때에 그 이야기를 언급하였고 또한 미사시에도 막달라 마리아를 음행한 여인 및 참회하는 죄인으로 설명하기 시작했으며 나아가 모든 예술분야에서도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처럼 묘사하기 시작하므로서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인식이 굳어졌던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를 죄많은 여인으로 묘사한 그림. 해골은 죽음을 의미한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표현이다.


그러다가 근자에 이르러 많은 신학자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음행한 여인이며 참회하는 죄인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오해라는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근세의 교황들도 그같은 주장에 동조함으로서 힘을 실어 주었다. 교황청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제장 중의 제자였으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십자가 아래에 있었고 예수의 시체를 장사 지낼 때에도 있었으며 사흘후 빈무덤에서 처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부활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라는 특별한 사명을 받은 여인이기 때문에 성자로 높혔고 아울러 2016년에는 7월 22일을 단순한 교회의 기념일이 아니라 성막달라 마리아의 축일로 지키도록 했다. 이날의 미사에서는 성경구절에서 음행한 여인이라든지 참회하는 죄인 등의 구절은 봉독하지 않으며 대신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장사지낸 무덤을 찾아간 내용이 적혀 있는 구절을 봉독하는 것을 관례로 삼았다. 어떤 신학자는 그레고리 교황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하여 그런 강론을 한 것은 당시 로마제국의 혼란한 정세를 빗대어서 말한 것이라는 해석을 했다. 당시에는 게르만 민족의 침입, 역병의 발호, 기아 등등으로 제국내의 불확실의 시기였었다. 그러므로 강론에서 죄인이었으나 회개하여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된 막달라 마리아를 희망의 상징으로 보아서 그런 내용을 얘기했다는 것이다.  


교황는 막달라 마리아를 참 신앙을 가진 교회의 희망이라고 말하였고 그로부터 교회는 막달라 마리아를 높이 숭상하였다. 그림은 향유합을 들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눈물과 머리칼로서 닦았다는 주장도 픽션이라는 주장이다. 누가복음 7장 36-50절에는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향유로 닦다가 참회의 눈물을 한없이 흘리게 되자 머리칼을 수건 삼아서 눈물에 젖은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는 얘기가 적혀 있다. 사람들은 그 죄많은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별개의 여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도 베다니의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는 서로 다른 여인이라고 확정해서 발표했다.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얘기는 아마도 유태의 문서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이다. 유태인 문서에 의하면 막달라라는 마을은 '음란함과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될 곳'이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막달라라고 하면 음란함 중에도 간음이 심한 곳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도 창녀가 아니었겠느냐는 주장이었다.


예수님의 발을 씻는 여인. 사람들은 이 죄많은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믿었다. 그러나 근자의 주장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와 베다니의 마리아는 별개의 여인이라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많은 제자들은 두려워서 도피하여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두려움 없이 십자가의 아래에 있었다는 얘기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19장 25절에 보면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삽자가 아래의 막달라 마리아. 들라크루아 작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처음으로 나타내 보이신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다. 마가복음 16장 9-11절의 말씀을 보면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피 울고 있는 중에 이 이을 알리매 11 그들이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태복음 28장 7절을 보면 (천사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하기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녔고...라고 되어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부활이라는 복음을 제자들에게 선포하도록 보내졌다는 것이다. '제자'라는 단어는 영어로 Apostle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보내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것이다. 즉, 제자들에게 알리도록 보내졌다는 얘기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새ㅔ는 막달라 마리아를 '제자 중의 제자'(Apostle of the apostles)라고 불렀다. 막달라 마리아는 기독교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므로 훗날 세계 각국에서 많은 교회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봉헌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이다.  교회는 그런 막달라 마리아를 성인으로 추앙하였고 매년 7월 22일을 축일로 정하였다. 교회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약사들의 수호성인이며 회심한 자, 장갑 만드는 사람, 헤어 드레서, 참회하는 죄인들, 극도로 경건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향수 만드는 사람들, 창녀의 생활을 청산한 여인들, 성적 유혹을 견디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일컫고 있다.


세계에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봉헌된 교회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파리의 유명한 마델레이느도 막달라 마리아에게 봉헌된 교회이다.


세상에는 사이비 역사소설과 비교적인 문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것들이 내세운 주장 중의 하나가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마치 예수의 부인이나 애인이었던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담은 비교적인 문건들이라고 해도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께서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언급을 한 것은 없다. 대신에 상징적으로 또는 신비스런 형태로 내비쳤을 뿐이다. 그리고 더구나 비교적인 문건들은 대체로 신약의 정경들이 나온 후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역사적으로 별다른 가치가 없다고 하겠다. 다만, 비교적인 문건들에서는 여자를 경시하거나 심하면 경멸하는 견해가 나온 경우가 있다. 어떤 비교적인 문건은 여자를 남자에 비하여 2등 인간으로 묘사한 것도 있다.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가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내용이 그나마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경우는 '빌립 비경'(Gnostic gospel of Philip)이다. 그렇지만 빌립 비경은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교리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30이 되도록 여자친구 또는 부인이 없을리가 없다는 얘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독신주의자였음이 분명하다는 것이 정경 신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영화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과 결혼한 사이로 나온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는 어떻게 지냈는가? 중세에 이런 전설이 있었다. 마리아가 그의 오빠 나사로와 언니 마르다와 함께 유대땅을 떠나 프랑스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에 도착한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베다니의 마리아란 얘기다. 막달라 마리아가 프랑스에 왔었다는 얘기는 9세기가 지나서 나돌기 시작했다. 그 얘기를 믿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물론 지어낸 얘기일 뿐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 여기에다가 교황 그레고리가 막달라 마리아와 베다니의 마리아는 같은 여인이라는 식으로 강론을 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프랑스에 온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라는 전설이 생겼다. 프랑스에는 3세기 이전에는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런데 그 이전에 막달라 마리아던지 또는 어떤 마리아던지 프랑스에 왔다는 것은 받아 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나사로가 프랑스에 왔었다는 것도 신빙성이 없다. 프랑스에서 성나사로가 알려진 것은 3세기 이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나사로라고 하는 사람은 성경에 나오는 그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다. 아무튼 기독교가 유럽에 전파된 이후로 유럽의 각지에서는 별별 이상한 전설따라 삼천리가 난무하였다. 특히 중세에 무슬림이 유럽을 침입하자 각지에서는 성자들의 유물로서 외적의 침입을 막아달라는 기구가 유행이었고 따라서 성자들의 유골 등을 서로 확보하느라고 난리도 아니었다. 프랑스의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는 생 막시맹 라 상트 봄(Saint-Maximin-la-Sainte-Baume)이라는 교회가 있다. 여기에 막달라 마리아의 해골과 뼈 조각이 간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에 있는 생막시맹 라 상트 봄 교회의 제단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해골이라는 것.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가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에 와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는 도대체 어떻게 비롯된 것인가?  13세기에 프로방스 영주로서 샤를르 2세라는 사람이 있었다. 샤를르 백작은 어느날 막달라 마리아가 그에게 나타난 꿈을 꾸었다. 샤를르 백작은 꿈이 너무 생생하여서 아무래도 그 지방의 성막시맹 교회와 막달라 마리아가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백작은 사람들을 시켜서 생막시맹 교회의 지하를 파보았다. 그랬더니 대리석으로 만든 관이 하나 발견되었다. 조사해보니 1세기에 만든 관이었다. 백작이 대리석 관을 열자 그 안에서 신비하고도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는 것이다. 백작뿐 아니라 함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향기로운 냄새를 맡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냄새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길 때에 부었던 향유의 냄새라고 믿었다. 대리석 관 안에서는 두개골이 발견되었는데 턱이 분실된 상태였다. 다리 아랫쪽의 뼈들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파피루스가 한장 발견되었다. 파피루스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주님께서 태어나신지 710년이 되는해의 12월 6일 밤중에 당시 프랑크의 왕으로서 독실한 신자인 외드(Eudes)는 사라센 나라들이 프랑크에 반란을 일으켜서 온지역이 황폐되었을 때에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막달라 마리아의 시신을 사라센 약탈자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석고로 만든 깨지기 쉬운 관으로부터 대리석 관으로 옮기고 비밀리에 은밀한 곳에 숨겼다."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관 속에는 또한 왁스로 칠한 나무 판자도 나왔는데 Hic requiescit corpus beatae Mariae Magdalenae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막달라 마리아의 시체라는 뜻이다. 학자들은 이 나무판자가 1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


막달라 마리아의 해골이 보관되어 있다는 프랑스 성막시맹 라 상트 봄 교회. 중앙제단에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