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화가와 조각가

조각가 구스티누스 암브로시(Gustinus Ambrosi)

정준극 2009. 10. 2. 06:19

조각가 구스티누스 암브로시(Gustinus Ambrosi)

 

말년에 낚시를 즐기고 있는 암브로시

 

비엔나의 아우가르텐 넓은 공원 한쪽에는 구스티누스 암브로시 특별전시관이 있다. 그가 생전에 제작한 여러 조각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영원한 봄'(Eternal Spring)이라는 대리석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시내의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갤러리에도 전시되어 있다. 사실상 아우가르텐의 암브로시 전시관은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갤러리의 지점이다. 1893년 비엔나 동남쪽 아이젠슈타트의 이탈리아인 가정에서 태어난 암브로시는 비엔나판 '성공사례'이다. 아주 어린 시절, 그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세살 때에 음악을 암기하여 피아노연주를 했고 네살 때에는 악보를 보고 피아노를 쳤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와 같은 음악의 신동이 태어났다고 하여 감격해 했다. 그러다가 일곱 살 때에 큰 병을 앓고 난후 완전 귀머거리가 되었다. 더 이상 음악을 할수 없게 된 그는 자기의 예술적 재능을 조각으로 옮겼다. 그는 10대의 어린 소년으로서 조각가의 견습생이 되어 밤낮으로 수련에 정진하였다. 그는 10대의 소년시절에 조각지침서라고 할수 있는 '목이 부러진 사람'(Man with the Broken Neck)라는 책자를 정리하여 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10대의 소년시절에 이미 조각작품으로 국가최고상을 받았다.

 

암브로시의 대표작인 '영원한 봄'(Eternal Spring) 

 

'아벨의 희생'

 

암브로시는 매우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조각가이면서 시인이었다. 특히 단시(소네트)에 뛰어났다. 1923년에는 Die Sonatte an Gott(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네트)를 펼쳐냈으며 1937년에는 Einer Toten(죽은 사람을 위한 소네트)를 발표하여 놀라운 감격을 던져 주었다. 그는 매우 근면한 예술가였다. 휴가도 없이 그저 조각에만 열중하였다. 결과, 생전에 무려 3천 점의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는 로댕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흉상을 많이 만들었다. 1930년대 유럽의 유명 정치가와 예술가들의 흉상을 6백여 점이나 만들었다. 로마에서 무쏠리니의 흉상을 제작할 때에는 시간이 없어서 무쏠리니가 직접 참석한 정부의 중요한 회의 석상에서 작품을 만들도록 허락을 받았다. 왜냐하면 암브로시는 들을수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비밀회의라고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티칸은 그를 특별히 초청하여 비오12세의 흉상을 제작토록 했다.  그가 제작한 유명한 흉상은 슈테판 츠봐이크(Stephan Zweig),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sche), 아우구스트 슈트린버그(August Strinberg), 법조인인 안톤 빌트간스(Anton Wildgans), 정치가 칼 렌너(Karl Renner), 시온주의자 율리우스 라아브(Julius Raab), 정치가 레오폴드 휘글(Leopold Fogl) 등 수없이 많다.

 

'희열'

 

비엔나에서 활동할 때에 그가 전심으로 작품활동을 할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여 프란츠 요셉 황제는 아우가르텐에 있는 집 한채를 그에게 하사하였다. 오늘날의 암브로시전시관 건물이다. 암브로시는 주로 비엔나에서 살았지만 로마, 파리, 브뤼셀에도 작업장이 있었다. 그의 친구인 작곡가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Erich Wolfgang Korngold)는 '피아노와 스트링을 위한 5중주곡 E 장조'를 암브로시에게 헌정하였다. 그라츠 부근에 있는 라바(Raaba)는 암브로시가 말년에 간혹 휴양차 방문했던 곳이다. 라바 마을의 구스티누스-암브로시-슈타라쎄는 그를 기념하여 붙인 거리 이름이다. 암브로시는 1975년 비엔나에서 자살했다.  

 

아우가르텐의 아틀리에에서 작업하고 있는 암브로시. 한꺼번에 여러 작품을 제작하였다.